#258화
처용이 레나에게 전음을 보낸 후.
“다시 묻겠습니다. 기계 장치의 여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와…… 아니, ‘우리’와 맞설 겁니까?”
처용이 말하는 우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는 두 대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
처용의 질문이 울리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침묵했다.
“여신님…….”
커맨더가 자신의 성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커맨더, 아니 임유진 헌터.”
처용은 그런 커맨더를 향해 말을 건넸다.
“나는 같은 한국 출신인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 말은 나름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도, 현재에도 든든한 전력이 되어 주는 동료.
아무리 지금이 현실과 상관없는 악몽 속, 과거라 해도 그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야. 권백호, 이진호…….”
처용은 커맨더의 옆에 자리한 그의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뒤에 숨은 샬럿까지.”
멀리 어느 한 지점을 정확히 바라보며 처용이 말하자.
-스르르.
그 주변 공간이 찰나의 순간 일렁였다.
처용의 눈에는 화들짝 놀란 샬럿이 급하게 자리를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부터 난 여기 전원과 싸울 생각이 없었어.”
처용이 나름 진심이 담긴 말을 꺼내자.
“…….”
“…….”
커맨더를 포함한 그의 파티원들, 살아남은 헌터들이 침묵했다.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았지만, 섣불리 공격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때.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제이크 로스차일드가 망설이는 헌터들을 향해 외쳤다.
“WHU가 왜 만들어졌는지 잊은 거냐!? 저놈은 지구를 위협할 재앙이란 말이다!”
제이크의 말에 헌터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큭, 저 개소리를 계속 믿을 건가?”
처용은 제이크의 말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
커맨더가 의문을 담아 처용에게 묻자.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봐, 커맨더.”
처용이 뒤에 있는 피해자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범죄자 같나? 저들은 세계 가문과 성운에 의해 강제로 실험을 당한 피해자들이다!”
지금 시기보다는 미래지만, 커맨더는 이종족들로 생체 실험을 벌인 소말리아를 쓸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만큼 커맨더는 인륜을 저버리는 불법적인 일에 경멸하는 인물이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사실이다.”
처용은 커맨더의 말에 강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와 맞설 겁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돌아간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뒤를 돌고는 커맨더를 향해 말했다.
그 말에.
“여신님.”
커맨더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그녀를 불렀고.
[무슨 짓이냐! 기계 장치의 여신!]
[감히 등을 돌리는 것이냐!?]
성좌들은 그녀의 태도에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그러자.
[여래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미친 짓을 하려거든! 네놈들끼리 해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성좌들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하듯 외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그런 다음 과거의 실수를 질책하는 듯한 말을 내뱉고는.
-치지직.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동시에.
-쿠우웅!
커맨더의 성지, 마키나가 뱃머리를 돌려버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처용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빠집니다.”
커맨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확고한 태도에 동의하듯, 파티원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커맨더! WHU를 무시하는 거냐!?”
그 모습을 본 제이크, 현 WHU 총장이 커맨더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이번에 벌어진 일에 대해 작정하고 알아볼 생각이니! 그리 아십시오!”
커맨더는 자신을 비난하는 제이크를 노려보며 외치고는.
-위이이!
마키나를 향해 날아오르며 사라졌다.
그의 파티원들과 안드로이드들 역시 커맨더를 따라 철수했고.
-피이이!
사람들을 태운 마키나가 현장에서 조금 멀어졌다.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듯 보였다.
커맨더가 전장에서 이탈한 것을 확인한 처용은.
“태양신 라!”
지상에 강림한 화신체 중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조인족과 비슷한, 깃털로 만들어진 코트를 입은 듯 보이는 붉은 성좌.
“헬리오폴리스는 자비의 대신을 도와줬던 만큼, 당신들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처용이 태양신 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과 관계가 있다는 건 분명하구나.]
라가 처용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는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 싸움에서 빠져! 당신이 아끼는 신관과 병사들이 이 자리에서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처용이 신력을 담아 진심으로 경고하듯 외쳤다.
이렇게까지 싸우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는데도 싸우려 든다?
그때는 정말 자비를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다!”
처용은 헬리오폴리스 성운에서 눈을 돌려 다른 성운들을 향해 외쳤다.
[이 건방진 하계종 따위가!]
[감히!]
신들이 처용의 말에 각각 다양한 반응을 보일 때.
[……라진, 물러나라.]
고민하듯 침묵하던 라가 라진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군말 없이 라의 말에 대답한 라진은.
“파라오 길드 전원! 즉시 여기를 이탈한다!”
힘을 소진하고 쓰러진 풍요의 신관, 이리스를 부축하며 빠르게 물러났다.
[라!]
[진심인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때처럼, 그녀를 비난하는 신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라는 그런 신들의 말에.
[혈선과 정면으로 싸우고 싶거든 당신들끼리 하십시오.]
고개를 돌리며 말하고는 휘하 성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라가 자리를 이탈하자.
[정말로 혈선과 관계가 있다면…….]
[이 일을 더 알아보는 게 좋겠군.]
소수의 몇몇 성좌들이 꺼리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이 시기에 제시카는 아직 신관이 되지 않았던 때였군.’
처용이 올림포스 진형을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아테나의 신관인 제시카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 그녀가 각성하지 않은 시기인 듯 보였다.
비단 제시카만이 아닌, 몇몇 신들도 신관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아레스.
패륜의 신 역시 지금 시기에는 신관이 없었다.
처용이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분위기를 살필 때.
[한 가지만 묻지.]
제우스가 처용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태초의 그릇은 어디로 빼돌린 거냐?]
-파지지직!
처용에게 겨눈 아스트라페의 창날에서 스파크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나도 한 가지만 묻지. 제우스.”
제우스가 던진 질문은 무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비의 대신에게 사죄는 했냐?”
처용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이런 건방진 하계종이-!]
[감히 신에게-!]
올림포스 성운의 성좌들이 분노를 드러냈다.
그들 입장에서는 고작 인간 따위가 주신을 똑바로 마주 보며 건방을 피운 것이었으니까.
처용은 그런 신들의 반응을 전부 무시하고는.
“너, 너, 너, 너, 너도!”
대신급 성좌들 중 몇몇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비의 대신에게 용서를 구했나?”
처용의 말이 울리자.
[당장 저 놈을-!]
[건방진 하계종 놈이-!]
아니나 다를까 아주 공격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이 건방진 하계종이! 당장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할까!]
제우스가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처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중요한 태초의 그릇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으니까.
제우스의 고함에.
“……그래, 그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주지.”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지었던 미소가 싹 사라지고는.
“몰라, 이 개 같은 새끼야! 네가 알아서 찾아. 이 씨발놈아!!”
제우스를 향해 격렬한 욕설을 내뱉었다.
분노가 섞인 처용의 고함이 울린 순간.
[…….]
“…….”
세상이 정지한 듯한 침묵이 흘렀다.
제우스.
올림포스라는 거대한 성운의 주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대신 중 하나.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대놓고 욕을 먹은 상황이었다.
지상에 강림한 화신체도,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인간들도.
시간이 정지한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큽, 크큭…….]
뱃머리를 돌린 마키나.
이 상황을 지켜보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침묵을 깼다.
침묵이 깨지자.
[이-!]
[죽이겠다-!]
정신을 차린 화신체들이 격렬한 신력을 내뿜으며 분노를 표출했고.
[내리쳐라.]
-파지지직!!
굳은 표정을 지은 제우스가 신력을 담아 처용에게 벼락을 내리쳤다.
“뇌류태극권.”
처용이 양손에 번개를 휘감고 빠르게 태극을 그리며 자세를 잡았다.
제우스의 벼락이 처용에게 내리치기 직전.
“반탄신장!”
처용이 내리치는 벼락을 향해 오른손바닥을 내밀자, 항마의 화신이 처용을 따라 손을 내밀었다.
-콰르르릉!
항마의 화신과 제우스의 벼락이 충돌했고.
-파직! 쿠릉! 쿠과과!
제우스의 벼락이 항마의 화신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며 지면 여기저기를 휩쓸었다.
“열 받은 것 치고는 공격이 형편없는데? 제우스.”
처용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우스를 한 번 더 도발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을 생포한다.]
제우스는 분노를 억누르며 휘하 성좌들을 향해 명령했다.
“크크크.”
처용은 그런 제우스를 한 번 더 비웃고는.
‘레나, 지금이다.’
무언가 준비를 끝마친 레나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바알.”
처용의 지시에 따라 무언가 준비를 하던 레나가 빠르게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촤아악!
손에 꼭 쥐고 있던 검은 색의 부적을 찢었다.
그 순간.
‘암영부-그림자 통로.’
처용이 미리 준비해 둔 진법을 발동시켰고.
-콰아아아아!!
레나의 주변으로 검은 마기가 솟구쳤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이전 회차 때와 마찬가지로 레나의 주문으로 인해 바알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태초의 그릇은 나의 것- 흠?]
기세 좋게 나타난 바알이 주변을 둘러보며 의문을 표했다.
바로 근처에 있어야 할 그릇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
[……대악마!]
[어째서!]
바알의 주변에는 성좌들의 화신체가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그는 소환자인 레나의 옆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바알이 나타난 장소는 다름 아닌 성좌들의 화신체가 자리한 정중앙이었다.
처용이 레나에게 미리 건네주었던 암영부 한 장.
그 암영부는 바알이 소환된 장소와 일종의 통로를 열어주는 ‘키’ 였다.
처용이 일으킨 자연재해가 점점 잦아드는 순간, 몰래 설치했던 진법이었다.
“…….”
[…….]
[…….]
소환된 바알도, 주변의 성좌들도,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인간들도 모두 당황을 표할 때.
“이젠 대놓고…… 대악마와 손을 잡았다며 티를 내는 건가?”
처용이 성좌들을 향해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리-?]
[도대체?]
일부 성좌들은 이 상황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당황을 표했고.
[……이런.]
[…….]
몇몇 성좌들…… 순혈자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듯한 분위기를 띠었다.
그리고.
[대악마!]
[감히! 어떤 성운이 대악마를-!]
갑작스럽게 나타난 바알을 보며 엄청난 적대감을 보이는 성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악마와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운들, 대표적으로 에덴이었다.
처용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예상대로 흘러갈 것이 뻔했으니까.
[천사들 전원! 대악마부터 막는다!]
가장 호전적인 대천사, 우리엘의 말에 천사들이 바알을 에워싸며 공격을 준비했다.
[하찮은 날파리들이 감히!]
-콰아아!
바알 역시 빛을 흩뿌리는 천사들이 거슬린다는 듯 마기를 뿜으며 대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콰르르릉!!
제우스는 다시 한번 처용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반탄신장!”
-쿠궁!
처용은 제우스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아무래도 대악마와 협력하는 성운 중 하나가 올림포스인가보군?”
제우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닥쳐라!]
[그럴 리가 없다!]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 중 일부가 공격을 준비하며 처용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나.
[아버지…….]
[사실은 아니시겠죠?]
아테나를 포함한 제우스의 자식들 중 몇몇, 그리고 대신들 중 일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 중, 역시나 처용의 예상대로 움직인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제우스! 정녕 사실인가!?]
제우스를 향해 거칠게 외치는 푸른 수염에 삼지창을 들고 있는 성좌.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한 포세이돈이 제우스를 향해 트라이던트를 겨누며 소리쳤다.
[저 하계종의 말은 듣지 마라! 포세이돈!]
제우스가 포세이돈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말하자.
[그럼 똑바로 해명해 봐라! 정녕 저 하계종의 말이 사실인가?]
포세이돈이 더욱 기세를 피워올리며 제우스를 압박하듯 소리쳤다.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을 못 하는 건가? 포세이돈! 그릇이 저놈한테 있단 말이다!]
제우스가 처용을 가리키며 거칠게 말했다.
“난 태초의 그릇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뿐,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그게 뭔지도 몰라 이 새끼야!”
처용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신력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진실이군.]
[……정녕 오해였단 말인가? 그저 혈선과 연관되어 있을 뿐이었던 건가?]
상대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권능의 성좌들.
대표적으로 대천사 미카엘과 토르가 반응을 보였다.
그때.
[거슬리는군.]
-콰아아아!!
바알이 달려드는 천사들을 모조리 쳐낸 후 점점 제우스와 처용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보아하니, 내게 이런 장난질을 친 자가 네놈들 중 하나인 것 같군.]
-쿠구구!
거대한 네 개의 검은 팔을 생성한 바알이 거친 마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릇을 내놔라!]
바알이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자.
[젠장!]
[일단 대악마부터 처치한다!]
대부분의 성좌들이 처용에게서 눈을 돌려 바알을 향했다.
[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크크.”
그와 반대로 처용은 이런 난장판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부를 상대하는 것보단 개판을 만들어 놓고 현장을 돌파하는 것이 수월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신들과 정면으로 싸울 필요는 없었다.
‘레나, 데커드에게 도망칠 준비를 하라고 해.’
처용이 레나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현장을 빠져나갈 준비를 하려는 순간.
[악몽이 재구성됩니다.]
돌연,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