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이걸 어찌해야 하나…….”
처용이 사슬에 매달려 있는 레나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변을 태워 버릴 듯 타오르는 불길은 마나를 넓게 펼쳐 임시 결계를 만드는 것으로 막고 있었다.
불을 끈다면 이전처럼 군인들이 몰려올 테니까.
그들이 다시 몰려온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지만,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흐음…….”
처용이 묶여있는 레나를 보며 고민하듯 침음을 흘리자.
“읍읍! 읍!”
레나는 그런 처용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흠…….”
처용이 팔짱을 끼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할 때.
발버둥 치던 레나가 고민하며 가까이 다가온 처용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로우킥을 하듯 레나의 오른쪽 발이 처용의 왼쪽 팔을 때렸지만.
-탁!
마치, 바위를 발로 찬 듯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으…… 읍…….”
다리에 밀려오는 고통으로 인해 레나가 몸을 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정말 강하게 찼는지 다리에 멍이 들어있었다.
레나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이렇게 하지.”
처용이 팔짱을 풀고는 레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레나 역시 눈물이 글썽이는 시선을 들어 처용을 마주 봤다.
“우선, 그 주문을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풀어주마.”
“…….”
레나가 응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처용을 노려봤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이 상태로 있던가?”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으, 읍…….”
레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탁!
처용이 손가락을 튕기자.
-촤르르르.
레나를 구속하던 빛의 사슬과 입을 막던 명환부가 떨어졌다.
“아! 으…… 너, 너!”
바닥에 떨어진 레나가 처용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표정을 보니, 이전 일을 정말로 기억하고 있나 보네?”
“…….”
처용의 말에 레나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거야.”
처용이 레나를 보며 말하자.
“…….”
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래도 너랑 나는 ‘게이트’에 휘말린 것 같다.”
처용의 말이 울리자.
“……게이트?”
레나가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잠시 생각하고는.
“설마 던전?”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던전에 대해 알고 있나 보네.”
처용이 레나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 어떻게 휘말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랑 나는 던전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처용은 레나를 향해 나름대로 머릿속에 계획한 ‘설정’을 이야기했다.
지금 처용과 레나가 있는 이 장소는 던전 속이라는 설정이었다.
“던전은 괴물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인데 이런 일도 일어난다고?”
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
“미지의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던전이다.”
처용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아.”
나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지금 갇힌 이 던전, 악몽 속만 해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그 말대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던전이었다.
“시간이 돌아가는 조건은 네 ‘죽음’인 것 같고.”
처용은 레나에게 진실 중 일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무한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처용에게 물었다.
“시스템에 대해서 아나?”
“……신들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볼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처용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시스템 창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남은 기회는 여덟 번이다. 그리고…….”
시스템이 알려주는 정보에 대해 처용이 레나에게 말해주었다.
“만약 이 여덟 번 안에 이 반복되는 장소를 탈출하지 못하면…….”
“못하면……?”
레나가 처용의 말에 의문을 담아 되묻자.
“너랑 나 사이좋게 죽을 확률이 높겠지.”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
레나가 침을 삼키며 굳은 표정을 짓자.
“이제 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게, 와 닿나. 꼬마야?”
“난 꼬마가 아니야!”
처용의 말에 레나가 거세게 외쳤다.
“그래, 마…….”
레나의 말에 처용이 마녀라고 하려던 것을 관두고.
“레나.”
마녀의 본명을 불렀다.
“……어떻게 내 이름을?”
레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처용에게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었으니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게 내 목적이니까.”
처용은 레나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알아내고 여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하고.”
“…….”
“그리고 너 역시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니 서로 협력하자는 거지.”
처용의 말을 들은 레나가 고민하듯 침묵했다.
“으, 응…….”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바알을 불러내는 주문을 쓰지 말라는 경고는 진심이다.”
처용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단단히 경고를 해주었다.
“……바알?”
“그래, 판데모니움에 있는 가장 강력한 대악마.”
레나의 물음에 처용이 바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가 산 채로 판데모니움에 끌려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군.”
처용의 말에 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 날 도와주려던 게-.”
레나가 처용의 말을 부정하듯 입을 열자.
“그럴 리가.”
처용이 레나의 말을 자르며 강하게 말했다.
“악마가 아무 목적 없이 너를 도와준다고?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평범한 악마도 아닌 대악마.
심지어 가장 강력한 대악마 중 하나인 삼천마, 판데모니움 서열 1위인 바알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일어난 상황을 쭉 지켜본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바알은 마녀를 아낀 것이 아닌, 마녀 안에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바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마녀가 아닌 ‘태초의 그릇’이라는 것이었다.
그 태초의 그릇은 지금 마녀 안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처용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조금 전 레나를 묶었을 때, 신력과 마나를 주입해 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질 뿐,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흠…….”
처용은 지금까지 알아낸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최초의 데미갓 프로젝트.
테초의 그릇.
레나 르블랑.
데미갓 프로젝트에 협력한 제우스와 오딘.
그리고 레나가 바알을 소환하기 위해 읊은 주문.
이중 몇몇은 이 악몽 속에서 알아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태초의 그릇이 무엇인지 가장 궁금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제우스와 오딘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생각을 마친 처용이 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가문의 저택으로 가보지.”
-여, 여긴 우, 우리 가문의 저택 뒷숲이야.
처음 이 장소가 어디인지 레나에게 물었을 때, 들려왔던 대답이었다.
처용의 감에…… 그곳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 거기는 지금 가문의 병기들과 군대가…….”
레나가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한 이들이 아직 있을 테니까.
“그놈들이 내 상대가 될까?”
“아…….”
처용의 말에 레나가 이해가 되었다는 듯 말했다.
눈앞에 있는 처용은 단 한 자루의 칼로 군대를 몰살시켰다.
가문의 병기가 내지른 공격을 손가락 하나로 막고 주먹 한 방에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지상에 강림한 신들까지 눈앞의 처용을 이기지 못했다.
두 눈으로 봐도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처용이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크게 소란을 피울 생각이 없다.”
처용이 레나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야겠으니까.”
“저, 저택은…… 저쪽이야.”
레나가 불타오르는 숲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지.”
처용이 앞장서 걷는 모습을 본 레나가 처용을 따라가려 움직였지만.
“아악!”
작은 비명을 내뱉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으으…….”
레나가 다리를 붙잡으며 울먹임을 토로했다.
조금 전 처용을 향해 발길질을 했을 때, 생겼던 멍 때문이었다.
“쯧, 귀찮네.”
처용은 짧게 혀를 차고는.
“자비의 손길.”
레나를 다리에 보살의 권능을 사용하여 치료해 주었다.
“아, 고, 고마-!”
레나가 처용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탓!
처용이 레나를 향해 명환부를 던졌다.
-휘릭! 스르륵!
명환부에서 만들어진 하얗고 두꺼운 붕대가 그녀를 누에고치처럼 감쌌다.
“……아?”
무언가 익숙한 상황에 레나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시간 낭비다.”
-샤삭!
레나를 들쳐멘 처용이 빠르게 저택을 향해 나아갔다.
***
처용이 마지막 악몽 속에서 새로운 회차를 시작했을 무렵.
“제단의 준비는 얼마나 되었나?”
신계, 천교의 성역 중심에 있는 드넓은 광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태상노군이 무언가를 작업 중인 이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만,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마치, 고대 중국 관료의 모습을 한 이들 중 하나가 태상노군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금, 천교의 성역에서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성역의 중심에는 검은색과 금색으로 어우러진 거대한 제단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성역의 외곽에는 여섯 개의 탑들이 건설 중이었다.
지상 역시 마찬가지.
같은 모양과 방향으로 건축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천교라는 성운의 탄생을 기원하는 거대한 행사라 표했지만.
그것은 그저 포장일 뿐, 다른 성운들에게 숨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두 완공된다면…… ‘대격변’이 시작될 것이다.”
태상노군이 기대된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제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때야말로 소홀해서는 아니 된다!”
큰 목소리로 태상노군이 명령을 내리자.
“예!”
“예!”
작업 중이던 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태상노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진행 중인 작업을 마저 관람할 때.
-쿠구구구!!
돌연, 큰 지진을 맞이한 듯 성역의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란이냐?”
태상노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외쳤다.
옥황상제가 자리를 비운 지금, 사고가 일어나는 일 만큼은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태상노군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
“크, 큰일 났습니다!”
천교의 관료 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태상노군이 불안감을 감추듯 윽박을 지르며 크게 외쳤다.
동시에 제발 큰일이 일어난 것만큼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타, 탑 중 하나가…… 무, 무너지려 합니다!”
관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좋지 못했다.
“뭐라!?”
태상노군의 눈이 커지며 외침과 동시에 관료가 뛰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는 성역 외곽에 지어지고 있는 탑 중 하나가 있었다.
멀리, 꼭대기 부분이 보이는 탑.
-쿠구! 쿠구!
그 탑이 흔들리는 땅에 맞춰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절대로! 무조건! 막아야 하느니라!!”
태상노군이 크게 외침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 뛰쳐나갔다.
그를 따라 제단을 작업중이던 이들 대부분도 따라나섰고.
“우리도 간다!”
제단을 지키던 천교의 신군들과 성좌들도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제단이 허전해졌을 때.
-스르르.
제단의 앞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기와 판테라움을 심은 건축물이라…….”
로브를 쓴 인물이 엄동설한처럼 시린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무엇을 꾸미는 것이냐? 옥황상제.”
제단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여래였다.
“뭐…… 오히려 좋은 상황이군.”
여래가 제단 앞으로 다가가며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화아아아!
검은 불길이 불타오르는 듯, 불길한 마기를 내뿜은 검은 덩어리.
그것은 처용이 디아블로의 화신체를 겨우 처치하고 얻은 대악마의 파편이었다.
그 파편에는 붉은 문자가 나열된 검은 부적이 붙어 있었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제단을 지키던 소수의 신군들이 여래를 향해 창을 겨누며 말한 순간.
“풍운부.”
여래가 한 장의 부적을 신군들을 향해 날렸다.
“무음(無音) 서릿바람.”
-스-샤삭.
마치 작은 벌레가 날아가는 듯, 미미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쩌저적! 쩌적!
여래에게 다가오던 신군들이 모두 조각 조각나며 땅에 흩뿌려졌다.
가볍게 신군들을 처치한 여래가 제단 앞에 섰다.
-화아아!
왼손에 쥔 대악마의 조각이 격렬한 마기를 내뿜더니.
-휘리릭!
아직 미완성 상태의 제단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다시는 학살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맹세했거늘…….”
제단을 바라보던 여래가 뒤를 돌며 입을 열었다.
“그 맹세를 네놈들이 어기게 만드는구나.”
발걸음을 옮긴 여래가 향한 방향은 옥황상제가 거주하는 하늘궁.
정확히는 하늘궁의 측면 구석이었다.
은밀하게 자리를 옮긴 여래가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을 대자.
-드르르륵.
벽이 열리며 통로가 드러났다.
천교 소속 극소수의 성좌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였다.
“이후 벌어질 일들은 모두 네놈들의 업보(業報)이니라.”
싸늘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이은 여래가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