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재밌구나.]
지상에 분신으로 강림한 바알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작 인간 따위가 나를 소환하는 데 성공할 줄이야.]
발밑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레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검은 해골의 입이 크게 찢어지듯 변형되더니.
[장막 뒤에 숨은 겁쟁이들도 이 자리에 있었구나. 크흐흐.]
바알이 제우스와 오딘을 알아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버려진 세계에 처박힌 더러운 것이 감히!]
-쿠구구!
오딘은 그런 바알을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며 마치 위협하듯 신력을 내뿜었다.
반면에 제우스는.
[설마…… 진짜 그릇은 저놈이 아니라…….]
바알 밑에 쓰러져 있는 레나에게 시선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심지어 더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처용이 바알의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며 속으로 경악했다.
지금 지상에 강림한 바알의 모습은 추기경에 의해 잠시 강림했을 때와 같았다.
악마 소환 의식에 의한 화신체 강림이 아닌, 성물이나 주문으로 인한 분신 소환이었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바알은 그저 단순히 분신을 통해 잠시 강림했다기엔, 상당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민하던 처용의 머릿속이 한 번 번뜩이더니.
‘……설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나에게 시선을 주며 속으로 읊조렸다.
정황상 레나가 바알을 소환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가 바알을 소환하기 위해 중얼거리며 했었던 말을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돌아가라. 디아블로.
조커가 디아블로의 연결을 끊어냈을 때, 외웠었던 주문과 아주 흡사했다.
처용은 작금의 상황을 살피고는.
-스르르.
동화경을 사용하여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처용이 사라지자.
[흠? 특이한 기운을 가진 인간이 하나 더 있었는데, 도망친 것인가?]
바알이 처용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들이 무슨 일들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성좌들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썩 꺼지지 못할까!]
오딘이 바알을 향해 궁니르를 겨누며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 역시 작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한 결과, 제우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짜 그릇’으로 인해 탄생한 존재는 방금까지 있던 처용이 아닌 레나라는 사실을…….
문제는 그 그릇이 다름 아닌 판데모니움에서 가장 강력한 대악마와 가까이 있다는 점이 거슬렸다.
어떻게든 바알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후, 그릇을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네놈들의 생각을 내가 모를까? 하하하!]
바알은 그런 제우스와 오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동시에.
-콰아아아!
바알 주변에 새까만 마기가 원형으로 모여들더니 마치 보호막과 같은 형상을 띠었고.
-촤자자자!
발밑에 검은 문자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스스스.
새까맣게 일렁이는 마기로 인해 바닥에 누워 있던 레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그릇을 차지하려 했거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인가?]
레나를 면밀히 살펴보던 바알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젠 나의 차지나 다름없느니라!]
[두고 볼 것 같으냐!!]
오딘은 바알이 레나에 대해 알아차렸음을 눈치채고는 궁니르를 치켜들었다.
[저 더러운 것의 심장을 꿰뚫어라!]
-투! 콰앙!!
궁니르가 파공음을 내며 바알을 향해 쇄도했다.
[소용없다.]
바알이 날아오는 궁니르를 보며 오른손을 들어 보이자.
-화아아!
주변에 퍼진 마기들이 바알의 앞으로 모여들며 벽을 형성했다.
-쿠구구구!!
궁니르가 바알이 만들어낸 검은 벽을 조금씩 깎아내기 시작했지만.
[젠장!]
오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대로면 벽을 뚫기도 전에 바알이 그릇을 들고 사라질 테니까.
[제우스!]
오딘이 다급하게 제우스를 부르자.
[알고 있네!]
-파지지직!
조용히 공격의 준비를 갖추던 제우스가 아스트라페를 앞으로 세우며 말했다.
-파지직! 파직!
아스트라페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개가 한 점으로 압축되고 퍼지더니 독수리의 형상으로 변했다.
[아퀼라의 분노.]
-캬아아아!
뇌전이 뭉쳐져 만들어진 20미터 크기의 독수리가 날개를 크게 펴며 포효하고는.
-쿠르릉!
한 줄기의 벼락처럼 바알을 향해 쇄도했다.
[어림없다!]
-화아아!
바알이 마기를 더욱 끌어 올리며 제우스의 공격에 대비했다.
-쿠쿠쿠궁!!
뇌전의 독수리가 바알이 만들어낸 검은 벽에 충돌하자.
-파지직! 파직! 콰콰!!
검은 벽이 갈라지고 깨지며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쯧.]
바알이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고는.
[거대한 어둠의 지배자가 명령하노니…….]
더욱 격렬한 마기를 내뿜으며 주문을 외었다.
[나의 뜻에 따라 움직여라!!]
바알이 팔을 들어 올리며 크게 외치자.
-쿠화아아아!!
어둠이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팔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바알이 뇌전의 독수리를 향해 팔을 뻗으며 쥐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콰쾅! 우드드득!!
거대한 팔이 독수리를 잡아채고는 거세게 쥐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붙잡힌 독수리가 밀리지 않겠다는 듯 저항했지만, 점점 힘에 부치는지 뇌전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때.
[반복해라. 스퀴테!]
제우스가 왼손에 쥔 스퀴테를 바알을 향해 던지며 외치자.
-붕붕붕! 파지지직!!
바알을 향해 날아가던 스퀴테가 뇌전이 뭉쳐져 만들어진 독수리로 변했다.
같은 공격을 그대로 복제하여 한 번 더 공격하는 스퀴테의 권능이었다.
-쿠궁!! 우드득!
스퀴테로 만들어진 뇌전의 독수리가 바알이 만들어낸 거대한 검은 손에 충돌하여 일부를 부수었다.
-갸아아!
그로 인해 붙잡혔던 독수리가 풀려났다.
[성가신 것들이!]
바알은 두 마리로 늘어난 독수리를 상대하기 위해 또 하나의 거대한 팔을 만들어 막아섰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한 모습.
[쯧, 제약만 아니었으면 이리 귀찮은 일은 없었을 것을…….]
바알이 혀를 차며 말했다.
시스템의 제약만 아니었다면, 그릇을 순식간에 판데모니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본체나 화신체가 아닌 분신에 불과한 상태.
시스템의 제약을 뚫어내고 그릇을 옮기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문제였다.
눈앞의 두 대신은 자신의 방어를 절대로 뚫을 수 없었다.
방어에 집중하는 동안 바닥에 그려지고 있는 전이 마법진이 완성될 것이다.
그때 그릇을 안전하게 추종자들에게 옮기고 지령을 내려 보호하면 된다.
그리고 추후…… 시스템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태초의 그릇은 자신의 차지가 된다.
바알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때.
-샤샥!
처용에 의해 멀리 날아갔었던 아테나와 헤라클레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젠장! 그 망할 녀석은 어디로 사라진 거냐!!]
-파지직!
고무공에서 빠져나온 토르 역시 격렬한 분노가 담긴 뇌전을 내뿜으며 나타났다.
[저 사악한 것을 공격해라!]
[토르!]
제우스와 오딘이 급하게 명령을 내리자.
[……악마? 어떻게 여기에?]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말에 따르지.]
아테나와 헤라클레스가 그 말에 따라 바알에게 달려들었다.
토르 역시 처용에게 당한 분노를 바알에게 풀겠다는 듯 묠니르를 쥐고 돌격했다.
동시에 뒤로 물러나 있던 남은 성좌들과 신병들 역시 바알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이 날파리 같은 것들이!]
바알이 달려드는 신격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쓰면 쓸수록 바닥에 그려지고 있는 이동 마법이 완성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제우스와 오딘을 돕는 신격들은 나름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신들이었다.
결국.
[아무래도 네놈들을 전부 쓸어버린 후에 그릇을 가져가야겠군.]
-화아아아!
바알이 두 개의 거대한 팔을 추가로 형성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거대한 팔을 형성한 탓에 주변에 안개처럼 번져 있던 마기가 조금 옅어졌다.
그 순간.
-스르르르.
처용이 바알의 뒤, 땅속에서 스며 나오듯 은밀하게 나타났다.
‘검성류-오의!’
-우우웅!
처용은 강기와 신력이 응축된 역천의 절을 들어 올리고는.
‘단절!’
-샤아아아!
칼날을 내리쳤다.
-사가가가가!
처용이 내지른 칼날에 의해 바알이 펼쳤던 방어막과 뭉쳐진 마기들이 잘려나갔고.
-사각!
마지막으로 연약한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
[……무슨 짓을!]
그 모습을 본 제우스와 오딘이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바알과 싸우던 신격들도 모두 자세를 멈춘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놈! 무슨 짓을!]
바알 역시 크게 경악하며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처용이 역천의 절로 베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주르르.
바닥에 누워 있던 그릇, 레나였으니까.
“네놈들 다 망했네?”
처용은 멍한 표정을 짓는 신격들을 한꺼번에 비웃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순간.
-쿠우우우!
주변의 배경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다음 회차에서 보자, 이 멍청이들아.”
한 번 더 신격들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의미심장한 말을 읊조렸다.
-쩌저적! 쩌적!
점차 흔들리던 배경들이 유리가 깨져나가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야갸 완전히 암전되었고.
-화르르륵!
다시 불타오르는 숲이 펼쳐졌다.
그리고.
[남은 기회는 ‘여덟’ 번입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후-.”
계획대로 잘 된 것을 확인한 처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신중하는 게 좋을 거야.
레나와 처음 마주했을 때, 시스템을 통해 들었었던 마녀의 목소리.
아직 악몽의 트라우마로 인해 처용이 예민할 때, 처음 마주했었던 레나의 목을 베어버렸었다.
그리고…… 마치 시간이 되돌려진 듯, 모든 상황이 처음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레나가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처용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제이크의 손에 잡힌 레나를 죽게 둔 것이었다.
쓸만한 정보들을 충분히 얻었고 남은 기회를 활용해 다른 정보들을 얻을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바알이 나타날 줄이야……!”
레나가 바알을 소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처용은 상황을 지켜보며 그냥 빠질까도 생각했었지만, 곧장 관두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은 레나의 ‘죽음’이다.
하지만 바알은 레나를 죽이지 않고 어디론가 이동시키려 했었다.
그녀가 판데모니움이나 마인들의 아지트로 살아있는 채 끌려가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바알의 손아귀에 레나가 잡힌 이상, 그녀를 무사히 빼돌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신격들로 인해 바알의 주의가 산만해진 틈을 타 레나를 죽일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나아가야 좋을까…….”
처용이 하늘을 보며 고민하듯 한숨을 내쉴 때.
“너…… 너! 너!”
레나가 굳은 표정으로 처용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너! 날 버렸어!”
처음 울고 있던 레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
“……설마!?”
처용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라, 란수즈…….”
레나의 입이 들썩이며 주문이 흘러나왔다.
“명환부-빛의 속박.”
처용은 재빨리 명환부 두 장을 레나에게 던졌다.
-탁!
밝게 빛나는 명환부 한 장이 레나의 입에 붙어 소리를 막았고.
-탁! 촤르르르!
다른 한 장은 빛의 사슬로 변해 레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다.
“읍읍……!”
꼼짝없이 묶인 레나가 발버둥 칠 때.
“후, 이거…….”
처용이 레나에게 다가가며 한숨을 내쉬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해졌는데.”
사슬에 대롱대롱 매달린 레나를 들어 보이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며 말했다.
***
처용이 마지막 악몽에서 처음으로 과거의 마녀, 레나를 만났을 무렵.
-쿠구구구!
성역 태룡전 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흑……!]
보살이 참담한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을 표하고 있었다.
미륵 역시 격한 분노를 참는 듯 표정이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거지 같은 기분은 오랜만이군.]
미륵이 요동치는 태룡전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태룡전이 요동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계승자, 처용이었다.
처용과 연결된 성역이 격한 분노를 표하는 듯 요동치고 있었다.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명의 성좌는 처용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성역의 중앙, 가장 큰 전각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한테 보여줄 수 없을 만했어.]
다름 아닌 처용이 악몽 속에서 마주한 기억이 세 명의 성좌에게 흘러들어왔으니까.
[성역이 영향을 받을 정도라…….]
미륵이 눈을 감으며 이해가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시에 대신인 보살이 왜 고통을 호소하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자비의 대신, 타인의 다친 마음을 보듬어주는 여신이었다.
타인의 감정과 마음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만큼 처용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대신이 영향을 받을 정도의 거대한 분노와 증오…….
미륵조차도 감정의 제어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처용의 기억은 너무 강렬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걱정되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괜찮은가?]
미륵이 눈을 감은 채 뒤돌아 서 있는 여래를 향해 물었다.
뒤돌아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쿠구구!!
마치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튀는 듯, 싸늘하고 차가운 살기와 신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래는 미륵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건가?]
미륵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래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저…… 작은 화풀이를 하러 갈 뿐입니다.]
-우우웅.
마지막 말을 이은 여래가 공간을 열며 사라졌다.
[……재앙이 일어나겠군.]
미륵은 여래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