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처용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던 새하얀 공간이 점점 검게 물들었고.
-화아아!
다시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윽? 무슨…….”
처용이 시야를 덮는 태양 빛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 수호신. 일어났어?”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러자.
“많이 피곤했나 봐? 항상 눈을 번뜩이고 다니던 녀석이 대자로 뻗어 자고 말이야.”
“그러게. 하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맞장구를 쳐주듯 말했다.
처용이 눈앞에서 떠드는 이들을 잠시 바라봤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가 된 듯…….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의문을 제기해야 하지만.
“내가 긴장을 놓다니…… 실수했군.”
처용은 마치 익숙한 듯, 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이들을 모두 알고 이 상황도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저항군 특공대 대장이라는 새끼가 한가하게 낮잠이나 쳐 자다니.”
처용이 자기 자신을 다그치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구가 멸망하고 악신들과 전쟁을 치른 지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다.
저항군은 여러 차원을 넘나들며 악신들의 세계 파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구를 시작으로 고군분투하던 세계들이 하나둘 함락되며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은 세계들이 모두 연합하여 악신들에게 맞서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었다.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악신들의 세력을 몰아내고 남은 세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전선의 상황은?”
처용이 근처에 있던 저항군 멤버 중 하나에게 묻자.
“우리가 할 일은 이번에 딱히 없을 것 같은데?”
질문을 받은 저항군 멤버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와서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이번 세계는 무리 없이 지킬 수 있겠어.”
“동감이야.”
처용이 저항군 멤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악신들이 먼저 차원을 찢고 다른 세계를 침공하면 저항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뒤늦게 왔었다.
그렇게 끌려다닌 덕분에 매번 불리한 싸움을 했었고 여러 세계가 악신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저항군이 먼저 악신들이 침공할만한 세계에 자리를 잡았고 수월하게 방어하고 있었으니까.
“전방에는 거대 성운의 세력들이 있으니 문제없고…… 후방은?”
처용이 다른 저항군 멤버를 향해 물었다.
“후방에는 ‘천교’가 지키고 있으니까. 문제없어.”
질문을 받은 저항군 멤버가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처용이 천교라는 말을 듣자.
“천교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격렬하게 솟구쳐오는 분노를 느끼며 되물었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저항군 멤버 중 하나가 처용의 반응에 의문을 느끼며 되묻자.
“……아니야.”
처용이 작게 고개를 젓고는.
“그래, 문제 될 건 없군.”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묘한 울림을 무시하며 말했다.
거대 성운들의 연합 세력이 악신들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동안.
그나마 전력을 잘 보존한 천교가 방어에 집중한다.
이대로만 간다면 이 세계를 지키고 여기를 시작으로 다른 세계도 수월하게 지킬 수 있었다.
“스승님과 미륵님은 전방의 성좌들을 도울 테고…… 보살님은 후방에 계신 건가?”
“항상, 부상자들과 아이들을 돌보고 계시니까.”
처용의 말에 저항군 멤버가 말했다.
“이번에는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네.”
처용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지금 상황은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전방으로-.”
처용이 이대로 전방의 악신들과 싸우는 이들을 돕기 위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
또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커다란 울림이 전해졌다.
그리고.
-……가라!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왔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처용이 눈을 찌푸리고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긴 했었나 보네, 헛소리도 들리고.”
처용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전방을 향해 나가려는 때.
-당장! 후방으로 가! 이 멍청한 새끼야!!
머릿속을 세차게 흔드는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전방으로 가려던 처용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고.
“대장? 왜 그래?”
주변에 있던 저항군 멤버들이 처용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후방으로 간다.”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거기는 왜?”
저항군 멤버 하나가 의문을 담아 물었지만.
-탁!
처용은 이미 몸을 날려 후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처용에게 이미 조금 전 목소리는 잊혀진 상태였다.
뭔가…… 알 수 없는 강렬한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후방에 도착하자.
“한처용? 후방에는 무슨 일이야?”
저항군 소속 헌터들이 처용을 알아보고 의문을 표했다.
“…….”
처용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후방의 분위기부터 살폈다.
전장과는 조금 거리가 먼, 평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서.”
처용이 헌터들에게 대충 대답할 때.
“아오! 무지하게 빠르네.”
“갑자기 왜 여기로 온 거야?”
같은 특공대 소속 멤버들이 후방에 도착했다.
“특공대가 여기는 무슨 일이래?”
“아오! 나도 모르겠다. 대장이 갑자기 여기로 막 뛰어오는데…….”
헌터들이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계승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요?]
부상자들의 치료를 돕던 보살이 처용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아, 무사하셨군요.”
처용이 그런 보살을 보고 안도를 자아내며 말했다.
[……여긴 아무 일도 없습니다.]
보살이 그런 처용에게 의문을 표하며 말했다.
‘내가…… 왜?’
처용 역시 방금 왜 보살을 보고 안도를 자아냈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냥……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다.
처용이 속으로 의문을 자아내고 있을 때.
[특공대 대장이 여기는 무슨 일인가?]
후방을 지키고 있던 세력, 천교의 주신 옥황상제가 다가왔다.
‘옥황상제!’
돌연, 처용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
옥황상제가 그런 처용의 분위기를 관찰하듯 바라보며 말하자.
“하아, 계속된 전쟁 속에 예민한가 봅니다.”
처용이 얼굴을 쓸며 대답했다.
‘……왜 이러지?’
제어되지 않는 감정과 계속되는 불안감에 처용이 속으로 읊조렸다.
조금 전부터 알 수 없는 묘한 기시감과 불안한 감정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
옥황상제를 마주한 순간부터 마음속의 울림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옥황상제가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바라봤다.
[특공대 대장은 전방으로 가야-.]
옥황상제가 처용을 향해 명령하듯 말하려는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잠시 쉬는 게 좋습니다. 계승자.]
보살이 처용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계속 지쳐 있으면 중요한 순간에 힘을 낼 수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보살님.”
처용이 보살의 따듯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옥황상제가 표정을 굳히고는.
[어쩔 수 없다.]
마치 누군가를 향해 말하듯 입을 열었다.
그 순간.
“……!!”
처용의 감각에 아주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우우웅! 우웅!
후방 외부에 검은 게이트들이 다수 생겨났다.
“무, 무슨!?”
“왜 후방에 차원 균열이!”
검은 게이트를 바라본 이들이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고.
-캬아아!
-크아아!
게이트 속에서는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본부에 지원 요청해!”
“이 사실을 알려!”
후방에 머무르던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바삐 움직였다.
“젠장! 특공대는 모두 앞으로! 사람들을 지켜!”
처용이 특공대 멤버들을 향해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머릿속에는 도대체 후방에 어떻게 차원 균열을 일으켰는지 의문이 생겼지만.
“이 빌어먹을 마수 새끼들이!”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천교는 안에 틀어박혀서 뭐 하는 거야!”
처용은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천교 소속 신군들과 성좌들을 찾았다.
잠시 뒤로 물러난 처용이 상황을 살피려는 때.
-콰르르릉!!
뒤에서 새하얀 번개가 솟구쳤다.
천교 상위 신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인 천벌.
상당한 신력을 내뿜는 것으로 봐서는 옥황상제가 직접 나선 듯 보였다.
무려 대신이 직접 발휘하는 권능에 처용이 잠시 안심하려는 찰나.
[커흑!?]
들려서는 안 될 이의 비명이 뒤에서 들려왔다.
처용이 뒤를 돌자.
-파지지직!
새하얀 번개가 휘몰아치고 있는 옥황상제의 오른손이 보살의 가슴을 뒤에서 꿰뚫은 모습이 보였다.
“……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처용이 짧은 침음을 흘릴 때.
[이 더러운 하계종들을 전부 죽여라!]
[살려두지 마라!]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천교의 성좌들과 신군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컥!? 무슨 짓-!”
“배신이-!”
그들이 같은 편을 공격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처용이 괴성을 지르며 보살을 향해 뛰어갔다.
그 순간.
-쐐에에엑!!
처용의 뒤로 새하얀 번개가 내리꽂혔다.
-까강! 콰콰쾅!
기습을 알아차린 처용이 검을 들어 막긴 했지만, 폭발력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크크크.]
“……왜?”
처용이 눈앞에서 자신을 막은 이들을 향해 의문을 표했다.
가로막은 이는 다름 아닌 천교의 성좌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처용이 천교의 성좌들 중 가장 앞에 있는 나타와 이랑진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우리에게 질문하지 마라! 멍청한 하계종 같으니!]
나타가 처용에게 적의를 불태우며 불길을 뿜었고.
[드디어 거슬리던 네놈을 도륙 낼 수 있겠구나! 하하하!]
이랑진군이 새하얀 번개를 쏘아 보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처용이 천교의 성좌들에게 가로막혔을 때.
[애초에 네년이 천교의 자비를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옥황상제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보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커…… 상제.]
보살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옥황상제를 바라보자.
[어리석고 멍청한 년, 우매한 네년에게 기회를 주마.]
옥황상제가 들어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고는.
[태초의 권능을 나에게 사용한다면, 저 아이 만큼은 살려주마. 보현.]
처용을 손짓하며 보살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당장! 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이행하지 못할까! 하계종!]
옥황상제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하자.
[태초의…….]
보살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옥황상제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차오를 때.
[살아남은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다오.]
보살의 마지막 말이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옥황상제의 표정이 환희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네 이년!! 끝까지 나의 관용과 은혜를 무시하다니!!]
옥황상제가 보살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
“항마의 화신-결전기!”
-화아아!!
처용과 천교의 성좌들이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 거대한 황금빛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천수(千手)-태극천체장(太極天體掌).”
-콰콰콰콰!!
황마의 화신 뒤로 피어난 천 개의 손들이 주변을 포위하던 이들을 모두 쳐냈다.
그리고.
“옥! 황! 상! 제! 이 개새끼야!!”
처용이 야차처럼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옥황상제에게 달려들었다.
[이 쓰레기 같은 하계종이!]
-파지지직!
옥황상제가 새하얀 번개를 뭉쳐 달려드는 처용에게 내뿜었다.
-콰콰콰!!
항마의 화신과 옥황상제의 천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왜! 도대체 왜!!”
처용이 옥황상제를 거칠게 밀어붙이며 소리쳤다.
[이 더러운 하계종이! 감히, 드높은 하늘에 대고 질문하는 것이냐!]
옥황상제가 처용을 향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상제님을 도와라!]
[저 건방진 하계종을 죽여라!]
뒤로 물러났던 천교의 성좌들이 다시 처용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 죽여 버리겠다!”
이성을 잃은 처용이 항마의 화신을 움직여 달려드는 천교의 성좌들을 모조리 쳐냈다.
그때.
-화아아!!
쓰러진 보살에게서 연분홍빛 신력이 퍼져나갔고.
-사락. 사락.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생존자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이 마치 꽃잎에 휩싸인 듯 보살의 신력에 완전히 감싸인 순간.
-파아아.
마치 공간 이동을 한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끝까지 우리를 방해하다니, 어리석고 멍청한 년!]
옥황상제가 쓰러진 보살을 향해 거칠게 말하자.
“입 닥쳐! 이 개 같은 새끼야!!”
눈이 뒤집힌 처용이 옥황상제를 향해 죽일 듯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저 건방진 하계종을 죽여라!]
[우리의 숙원을 위해!]
사방에서 천교의 성좌들과 신병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아무리 처용이 인간들 중 유례없는 강자라지만, 하나의 거대 성운 전체를 상대로는 무리였다.
그때.
-사라락.
보살의 신력이 처용에게 닿았고 점점 처용을 휘감기 시작했다.
[놓치지 마라!]
[저 하계종만큼은 죽여야 한다!]
그 모습을 본 천교의 성좌들이 거칠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처용 역시 주변의 부상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신력을 내뿜어 저항했다.
이 자리에서 옥황상제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했으니까!
그러나.
[미안해요. 계승자.]
보살이 구슬픈 목소리로 처용에게 말하자.
-파아아!
처용에게 달려들던 천교의 성좌들이 모두 나가떨어졌다.
공간 이동에 저항하려던 처용 역시 신력이 짓눌리며 점점 꽃잎에 휩싸였다.
“아, 안-!”
처용이 끝까지 저항하며 남아 싸우려 했지만.
[미안해요…….]
피투성이 상태로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보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는.
-파아아…….
꽃잎에 완전히 뒤덮이며 사라졌다.
처용이 사라지자.
[어떻게든 네년을 이용할 것이다!]
옥황상제가 죽은 보살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하계종이 네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하하하!]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