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네놈의 반응을 보니 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맞나 보군.”
처용을 지긋이 바라본 악몽, 학살의 마녀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어떻게?’
처용이 인상을 구기며 침묵하고는 속으로 읊조리자.
“클래스가 변한 나, 네놈이 쓰는 기술들, 게다가 이 악몽까지…….”
악몽이 처용이 속으로 내뱉은 의문을 들은 듯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게 미래를 알고 있는 네놈이 만들어낸 나비효과라면 설명이 된다.”
“…….”
처용이 뭐라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무슨 수로 시간을 돌린 거냐?”
악몽, 학살의 마녀가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몰라.”
곰곰이 생각하던 처용은 그 말에 모른다고 답했다.
“모른다?”
“그래! 나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고!”
처용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가 시간을 돌렸는지,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짐작되는 것도 없었고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런가…….”
처용의 말을 들은 악몽, 학살의 마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이번엔 처용이 역으로 물었다.
“스스로가 ‘가짜’라는 것을 자각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진심으로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악몽 속에 갇힌 다른 이들처럼 자신 역시 악몽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었다.
즉 학살의 마녀 입장에서는 본인이 진짜이고 처용과 마인들이 악몽 속의 가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악몽, 학살의 마녀 스스로가 본인이 가짜라는 것을 인정한 상황.
아무리 악몽으로 만들어진 존재라지만, 스스로가 가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보통 스스로가 가짜라는 게 명백한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을 부정한다.
처용이 입장을 바꾸어 생각을 해 봐도, 지금 눈앞에 있는 악몽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용의 말이 울리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짜’보단, 차라리 ‘가짜’가 나으니까? 그리고…….”
학살의 마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내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이젠 희망이 생겼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처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은 순간.
-쿠구구!
어두운 공간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상황을 두고 볼 리가 없지.”
악몽, 학살의 마녀가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순간.
-쩌저적!!
그녀가 펼친 공간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파창! 창!
일대에 걸렸던 공간 정지 권능까지 무너졌다.
악몽, 학살의 마녀가 발휘한 권능이 풀리자.
“이거, 이거, 많이 빡쳤나 본데?”
조커가 흔들리는 공간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으윽!?”
쓰러졌던 마녀가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나한테 무슨 말을-!”
마녀가 악몽을 향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세 번째 악몽에서 이변을 확인.]
돌연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기억 형상 개체 : 레나 르블랑의 이변을 확인.]
[제어 필요.]
-파지지직!
시스템의 말이 끝나자 학살의 마녀에게서 검은 전류가 튀었다.
“멍청한 시스템 같으니.”
악몽, 학살의 마녀가 시스템 창을 향해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애초부터 네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으면, 내가 만들어지는 걸 막았어야지!”
-푸화아아아!
악몽에게서 흘러나온 마기가 그녀를 옭아매던 전류를 풀어버렸다.
그러자.
[제어 불가.]
[다른 수단 필요.]
또다시 시스템의 알람이 울렸고.
-슈화아아아!
새까만 우주에서 어둠이 몰려들더니 한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뭉쳐진 어둠이 점점 어떤 형상으로 변했다.
“……바알?”
처용이 어둠이 뭉쳐져 만들어지는 형상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검은 털이 달린 가죽 망토와 창백한 얼굴빛에 칠해진 붉은 문양.
이마 윗부분에 솟아난 두 개의 거대한 검은 뿔.
검은자위 위로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까지.
눈앞에 새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는 아무리 봐도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바알이었다.
처용이 긴장감을 드러낼 때.
“죽어서 의지만 남은 주제에 뜻대로 안 되니까 열 받나, 크타니드? 아니…….”
악몽, 학살의 마녀가 바알 앞으로 걸어나며 말을 이었다.
“프로토(Proto).”
그녀의 말이 울린 순간.
-쿠구구!
[■■■…….]
[■■…….]
사방이 울려오며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시스템 창에 떠올랐다.
동시에.
-크아아아!
바알이 입을 크게 벌리며 학살의 마녀를 위협하듯 포효를 내질렀다.
“……재밌네.”
그 모습을 악몽, 학살의 마녀가 씨익 웃어 보이고는.
-쿠구구!!
거대한 마기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서 어쩌나,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은 새끼의 모습으로 나타나 줘서.”
-탁!
악몽, 학살의 마녀가 바알을 노려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캬아아아!
그녀의 가디언, 본 드래곤 나이트가 하늘 위에서 나타났고.
-쿠화아아아!!
바알을 향해 검은 브레스를 내뿜었다.
가디언이 바알을 향해 공격을 내뿜고 있을 때.
“나이트메어 던전 속을 직접 손대 본 적은 없지만…… 가능하겠군.”
악몽이 왼쪽 손을 뒤로 한 번 휘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쩌저적!
검은 우주 같은 공간의 일부가 깨지며 새하얀 균열이 드러났다.
“나머지는 네놈이 할 수 있겠지?”
“도와줘서 고마워, 무시무시한 마녀 Bro.”
조커가 씨익 웃으며 악몽, 학살의 마녀를 향해 감사를 전하듯 말하고는.
-푸화아아!
새하얀 균열을 향해 손을 뻗고 어둠을 내뿜었다.
-쩌저적!
조커가 내뿜은 어둠이 균열 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균열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고.
-파창! 차창!
유리가 깨지듯 균열이 깨지며 새하얀 공간이 드러났다.
“여기 있어 봐야 더 좋을 건 없으니, 나 먼저 실례하지. Bro들.”
조커가 새하얀 공간으로 몸을 집어 던지며 사라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마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커가 나타나 있고.
무시무시한 악몽은 더 이상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접해보는 시스템의 이상 현상에 이어, 이번에는 대악마 바알이 나타났다.
머릿속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할 때.
“도망쳐.”
악몽, 학살의 마녀가 과거의 자신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더는 악마 새끼들한테 이용당하지는 말고.”
“뭔 개소리야!”
마녀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하자.
“너는…… 나처럼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마라.”
악몽, 미래의 마녀가 작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지이잉!
마녀를 향해 검은 레이저를 쏘아 보냈다.
“커?”
새까만 광선에 맞은 마녀가 침음을 흘리며 뒤로 날아갔다.
마녀는 자신의 몸속으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내게 왜 이 권능이 생겼나 했더니 이날을 위해서였나?”
악몽, 학살의 마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마지막으로 새하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 역시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수호신.”
악몽이 아직 자리에 남아있는 처용을 향해 말하자.
“무슨 생각이냐?”
처용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아무리 봐도 악몽, 학살의 마녀가 취하는 행동은 모두를 도와주는 것이었으니까.
머릿속에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크크크…….”
학살의 마녀는 대답하지 않고 작은 미소를 흘리고는.
“너무 저 애를 미워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고개를 돌려 새하얀 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대상은 다름 아닌 과거의 자신이었다.
“너 못지않게 기괴한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길 나가는 즉시 죽여 버릴 거다.”
처용은 눈앞의 악몽이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눈치채고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마녀는 지구 멸망에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던 마인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악몽을 통해 전성기의 마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적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 적은 반드시 죽여야 했다.
눈앞의 악몽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용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그걸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몽, 학살의 마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바알을 마주하고는.
“네놈이 크타니드의 파편에 지배당할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처용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순간.
[흔들린 악몽이 재생됩니다.]
시스템이 울림과 동시에.
-쩌저적!
새하얀 균열이 일어났던 공간이 점점 메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푸화아아아!!
바알이 강렬한 어둠을 내뿜으며 사방을 휩쓸었다.
“그레이터 데몬 디펜시브.”
학살의 마녀가 전방에 거대한 방패를 세워 다가오는 어둠의 폭풍을 막아내고는.
“더 늦기 전에 가라!”
처용을 향해 명령하듯 외쳤다.
“젠장.”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처용이 혀를 차고는 뒤돌았다.
눈앞의 악몽, 학살의 마녀를 향해 너무나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쩌저적!
지금, 이 순간도 새하얀 틈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균열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처용이 새하얀 공간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마라. 이 망할 새끼야.”
뒤에서 들려오는 악몽의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쩌저적!
깨졌던 균열이 완전히 닫혔다.
그러자.
-크아아아!
바알이 학살의 마녀를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동시에.
-쿠구구!!
공간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고.
[악몽이 요동칩니다.]
[악몽이 일부 손실-]
[정상적인 활성화 불가-]
.
.
시스템의 알람이 무수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제로 네 번째 악몽을 시작합니다.]
“내가 두고 볼 것 같나?”
마지막 시스템 문구를 확인한 학살의 마녀가 바알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후 어떻게 될진 몰라도…… 지금은 온갖 방법으로 네놈을 방해해 주마!”
악몽, 학살의 마녀가 마기를 거세게 내뿜으며 외치고는 바알을 향해 달려들었다.
***
처용이 악몽에 갇혔을 무렵.
[흠…… 이거 좋지 않군요.]
태룡전에 찾아온 언문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 아이가 없다니.]
[꽤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듯 보입니다.]
여래가 언문의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희미하게나마 연결은 느껴지니 아직 무사합니다.]
[허, 그거 다행입니다.]
언문이 여래의 말에 진심으로 안심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계승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천교가 움직임을 보인다라?]
언문과 함께 태룡전을 찾아온 운장이 긴 수염을 쓸며 말했다.
운장과 언문이 태룡전을 찾아온 이유.
천교 측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제단이라…….]
미륵이 조금 전, 운장이 했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천교의 병사들과 성좌들이 각각 신계와 하계에 거대한 제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
그들은 그저 전통적인 큰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세상 그 어느 제례에 악마의 물건들이 쓰인단 말인가? 쯧쯧.]
미륵이 혀를 차며 말했다.
천교에서 건축하고 있는 거대한 제단.
그리고 거기에 사용될 여러 물건 중에는 판데모니움, 즉 악신들과 관련된 물건들이 다수 있었다.
물론, 정황만 포착했을 뿐, 아직 정확한 증거는 잡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수상했다.
[신계 쪽은 천문께서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지상의 제단은…….]
운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천계 즉 천교의 성역에서 건축 중인 거대한 제단은 천문이 알아보고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지상, 즉 천교의 성지에서 건축 중인 건물도 조사해야 했다.
그 적격자로 처용을 찾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운 상태.
[그 아이에게만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할 순 없어.]
이야기를 듣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입을 열었다.
[내 신관도 충분히 강해, 이번 일을 맡길 수 있어.]
[내 신관 역시.]
해전무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닌 그저 조사뿐이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여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어쩌면 지상보다도 신계가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운장을 향해 말했다.
[천교의 성좌들이 위험한 짓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함정을 판다거나…….]
여래는 그저 불안감이나 예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천문과 언문은…… 천교의 성좌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다름 아닌 처용이 해준 말 때문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금일 수도 있었으니까.
[천문 혼자 천계의 일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강인한 이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운장이 여래의 말에 대답하고는.
[흠…… 하지만 더 대비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겠군요.]
여래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추가적인 대비책을 생각하며 말했다.
이윽고 천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친 운장은.
[아쉽군요.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건만.]
작은 아쉬움을 토로하며 무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언문께서 여기에 남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와 함께 온 언문은 무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전무신이 언문을 향해 말하자.
[저는 애초에 소식을 전할 겸, 겸사겸사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왔지요. 허허.]
언문이 작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향이라 그런가 편하기도 하고 또…….]
잠시 말을 흐린 언문은.
[그냥 여기가 좋습니다. 허허.]
하고 싶었던 말을 감추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