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처용이 동방불패 길드의 성지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
성역 태룡전 안의 안식전, 가장 위층.
[……만 년 전에 누님이 벗어놓은 허물을 줬다고요?]
그곳에서 카투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크루마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카투라가 크루마의 말에 대답하자.
[왜 준 겁니까?]
크루마가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여래랑 내기해서 졌어. 그래서 그냥 줬는데.]
[……그렇다고 그걸 냉큼 줘버려요? 게다가 누님의 피, ‘정수(淨水)’까지 나누어 줬다면서요?]
카투라의 말에 크루마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카투라가 준 것은 만 년 전, 카투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탈피한 허물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거대 성운의 신들조차도 가지지 못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크루마가 말하는 정수(淨水).
그것은 다름 아닌 심해의 공청석유를 의미했다.
행성 규모의 몸집을 자랑하는 카투라의 본체.
그 거대한 괴수 안에 흐르는 피 중 가장 정순한 피가 바로 심해의 공청석유였다.
[허물은 나한테 더 이상 필요 없잖아?]
카투라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요즘 인간들 말로는 헌혈? 차고 넘치는 게 피인데 그깟 먼지만 한 정도쯤이야.]
심해의 공청석유 역시 그녀의 본체 크기를 감안하면 처용에게 준 양은 티끌만 한 정도였다.
[정수는 몰라도 누님의 허물을 지금의 인간들이 다루지 못할 텐데요?]
크루마가 카투라에게 물었다.
그녀의 본체가 가장 강하고 외피가 단단했을 시절에 벗어 놓은 허물.
과연 그런 단단한 허물을 인간들이 다룰 수 있느냐?
크루마가 볼 때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성지에 있는 드워프가 잘만 쓰던데?]
카투라가 그런 크루마의 생각을 부정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크루마가 작은 놀람을 표하며 말하자.
[지상의 존재들이 옛날처럼 나약하지만은 않다는 뜻이겠지.]
카투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이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나름 투자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의 생존을 위한 투자라…….]
그런 카투라의 말에 크루마가 생각이 많아진 듯 말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여래랑 내기에서 져서 뭘 줘야 한다며?]
카투라가 그런 크루마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처용과 크루마가 처음으로 마주하기 전.
여래는 카투라 때처럼 크루마와도 작은 내기를 했었다.
3층에서 크루마가 준비한 시험을 처용이 단번에 통과할지, 못 할지가 바로 내기의 주제였다.
물론, 처용은 크루마가 준비한 시험을 단번에 통과했다.
그 결과 크루마는 처용을 위해 쓸 만한 물건을 하나 줘야 했다.
다만, 무엇을 줘야 하는지 아직 고민 중이었다.
처용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 중이었기에 주지 못한 것이지 절대로 잊은 것은 아니었다.
오만한 선천적 신격들과 같은 취급은 받기 싫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처용을 쭉 지켜본 결과 그에게는 여래와 다르게 나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누님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크루마는 방금 카투라에게 들었던, ‘생존을 위한 투자’라는 말에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녀 자신과 형제들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투자를 한 것이 맞았다.
[덕분에 결정할 수 있었어요.]
생각을 마친 크루마가 무언가를 다짐했다는 듯 말하고는.
-화르르륵!
전신이 불타오르더니 재가 되며 사라졌다.
그러고 잠시 뒤.
-화륵!
성지에 강림한 1미터 크기의 도마뱀, 크루마가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성지에 세워진 보물전 앞이었다.
그리고.
“후우, 어찌해야 하나……?”
보물전 앞에서 무언가를 고민하듯 한숨을 내쉬고 있는 드워프.
루돌프를 향해 다가갔다.
“흐음?”
루돌프가 다가오는 1미터 크기의 도마뱀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보통 이곳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인간과 이종족 같은 사람들, 혹은 개미들이 전부였다.
도마뱀 형태를 가진 존재는 지금껏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마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이곳에서 마주했었던 몇몇 성좌들, 특히 청룡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아니, 청룡보다 오래된, 설명할 수 없는 중후한 기운이 느껴졌다.
[네가 누님의 허물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지?]
다가온 크루마가 루돌프를 향해 말하자.
“그, 그럴 겁니다?”
‘허물’이라는 말에 루돌프가 얼떨결에 맞다고 대답했다.
루돌프가 무언가를 더 생각할 틈도 없이.
-화르륵!
크루마가 새하얀 화염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화염 속에서 거대하고 검은 실루엣이 점점 드러나더니.
-쿠궁!
검은 원뿔 형태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대략 20미터 정도 크기를 가진 검은 원뿔.
“어…….”
루돌프가 검은 원뿔을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이것도 다룰 수 있겠어?]
크루마의 말에 루돌프가 홀린 듯 거대한 검은 물체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이, 이건!?”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내질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거야? 아님 못 하는 거야?]
크루마가 그런 루돌프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재촉하며 말했다.
그때.
“무슨 일로 내려오신 겁니까?”
처용이 크루마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크루마는 이전 제시카와 아테나가 찾아왔을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성역인 태룡전에만 있었으니까.
[뭐긴, 약속을 지키러 왔지.]
“약속이요?”
처용이 크루마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되묻자.
-촤아아!
[이 녀석도 여래랑 내기해서 졌거든.]
크루마의 옆에 물이 솟구치며 인간형의 카투라가 나타났다.
“내기요?”
처용이 카투라에게 묻자.
[이 녀석도 내가 여래랑 한 것과 같은 내기를 했거든.]
카투라가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아. 그런데 설마 무식하게 자기 뿔을 잘라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네.]
한숨을 쉬며 크루마가 가져온 검은 원뿔을 보며 말했다.
“뿔?”
처용이 카투라의 말에 거대하고 검은 원뿔 형태의 물체를 바라봤다.
동시에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혹시…… 본체의 뿔입니까?”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전에 마주했었던 크루마의 본체인 불타오르는 거대한 드래곤.
그 드래곤의 머리에 나 있던 뿔과 비슷해 보였으니까.
[아마 맞을 거야.]
카투라가 처용의 말에 대답하자.
“하, 하하.”
처용이 다시금 뿔을 관찰하며 실소를 흘렸다.
[원래는 한쪽 전체를 자르려 했는데, 이게 잘 안 잘리더라고.]
도마뱀 형태의 크루마가 앞발로 머리 부분을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본래 크루마는 한쪽 뿔 전체를 자르려 했지만, 본인조차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본체의 육체가 생각보다 매우 단단했다는 것.
그런 본체의 육체 중 뿔은 가장 단단한 부분이었다.
그래도 여러 노력 끝에 뿔의 끝부분을 떼어낼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 뿔을 자르는 놈이 어딨어?]
[누님은 피하고 허물을 줬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뿔은 도로 자랍니다.]
카투라와 크루마가 티격태격 이야기를 나눌 때.
“……설명 좀 해주겠나?”
눈을 끔뻑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루돌프가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가 전에 말한 태초의 생명체라는 존재들이?”
루돌프가 카투라와 크루마가 하는 대화를 듣고 혹시? 하는 생각에 묻자.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태초의 마수…… 아니, 태초의 신수가 맞겠군요.”
처용은 루돌프에게 태초의 마수가 어떤 존재인지 대략 이야기해 주었다.
“허, 허허…….”
이야기를 들은 루돌프가 침음 섞인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이곳에는 나보다도 격이 높은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전 윤아의 성좌인 청룡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신격에 오른 드래곤보다도 격이 높은 존재가 눈앞에 있는 이들이었다.
루돌프가 복잡한 심정으로 멍한 표정을 드러낼 때.
[그래서, 이거 다룰 수 있어? 없어?]
크루마가 루돌프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 말에 잠시 침묵한 루돌프가 표정을 다잡고는.
“그걸 확인하기 전에 손을 잡아 봐도 괜찮겠습니까?”
크루마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하듯 말했다.
[손은 왜?]
“아까 질문해 주신 말씀을 확인하는 데 필요합니다.”
[좋아.]
크루마가 말함과 동시에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탁.
루돌프가 크루마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러자.
-화아아!
루돌프의 감각에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함과 태양 같은 강렬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쿠구구.
눈앞의 도마뱀이 아닌,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거대한 드래곤의 형태.
루돌프의 감각에 크루마의 본체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으, 으어!?”
크루마의 손을 놓은 루돌프가 뒤로 물러나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숨을 몰아쉰 루돌프는.
“……땅의 일족이 위대하신 존재들을 뵙습니다.”
침착함을 유지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됐고, 이거 다룰 수 있겠어?]
크루마가 앞발을 들고는 잘려나간 뿔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말에 루돌프가 뿔에 손을 대며 눈을 감고는 잠시 침묵했다.
짧은 시간 감정한 것만으로는 할 수 있다, 없다를 판단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장담할 수 없다. 더 자세히 봐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감았던 눈을 뜬 루돌프는.
“할 수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강하게 말했다.
[그거면 됐어.]
크루마는 그 대답에 굳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녀석을 도와주는 데 쓰는 거라면 뭘 해도 상관없어.]
처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맡겨주십시오.”
루돌프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화르륵.
크루마가 하얗게 불타오르며 사라졌다.
-쏴아아.
카투라 역시 물보라를 일으키며 크루마를 따라갔다.
두 태초의 마수가 사라졌을 때.
“엄청난 걸 받아 버렸네요.”
처용이 루돌프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거 정말 가공이 가능할까요?”
-탁! 탁!
크루마의 뿔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해낼 거다!”
루돌프가 처용의 질문에 강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장인으로서의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신들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태초의 마수의 뿔.
드워프 역사상 그 어떤 장인도 다뤄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다다돌프!”
고개를 돌린 루돌프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들 중 하나.
자신의 제자인 다다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넵.”
다다돌프가 루돌프의 부름에 대답하자.
“철의 성채에 돌아가서 장로들에게 내 말을 전해라.”
철의 성채는 드워프들이 모여 살아가는 장소였다.
“나는 오늘부로 은퇴할 테니, 알아서들 하라고.”
루돌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예에!?”
“지, 진심이오? 최고 장인.”
다다돌프를 포함한 다른 드워프들이 놀람을 섞어 되물었다.
“어차피 다른 장로 놈들은 내가 은퇴하기를 바랄 것 아니냐!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거다!”
루돌프가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처용이 확인차 다시 물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최고 장인인 루돌프가 성지에 머무는 것은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루돌프의 직위가 장로인 만큼, 그는 드워프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처용은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것인지 확인차 물은 것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다른 장로 놈들이 날 끌고 가겠다 해도 여기 남을 거다!”
루돌프가 다시 한 번 강하게 의지를 드러내며 말했다.
“……태룡사의 식구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처용이 그런 루돌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고 장인께서 머무시는 만큼,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죠. 하하.”
“지금까지 해줬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루돌프가 처용의 말에 진심이라는 듯 말했다.
좋은 시설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신의 성지.
게다가 철의 성체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음식들까지.
태룡사는 장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내 최고 장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걸 가공해 보이겠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뿔 조각, 블랙 미스리움을 넘어서는 자원.
이곳에 머무르면 이와 같은 경험해 보지 못한 자원들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앞선 이유들 보다도 이곳에 머무르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였다.
최고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으니까.
‘환영합니다. 그랜드 스미스.’
처용은 회귀 전, 동료였던 이가 완전히 합류한 것에 진심 어린 환영 인사를 건넸다.
***
태룡사에 루돌프가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정되고 하루 뒤.
“제시카!”
올림포스 성지의 길드장실 문이 열리며 메리가 들어왔다.
“이것 좀 봐.”
메리가 여러 정보가 적힌 서류들을 제시카 앞에 내려놓자.
“……이건?”
제시카가 빠르게 서류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라…….”
서류에 적힌 장소를 읽으며 읊조렸다.
“응, 조사한 바로는 모두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어.”
메리가 조사한 내용을 설명하며 말했다.
그녀가 조사한 결과 체르노빌에 있는 한 장소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과거 거대한 재앙이 일어났었던 장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였다.
“러시아 정부와 천교가 무언가 거래를 한 것 같아. 그리고…….”
메리가 그간 조사하여 모은 정보를 제시카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섀도우 헌터들도 체르노빌에서 활동하고 있었어.”
마인들에게 맞서는 정체불명의 세력.
섀도우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섀도우 헌터? 혹시 조커가?”
제시카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메리에게 묻자.
“조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메리가 자신이 없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인데…….”
원래 섀도우 헌터들은 국력이 약해지고 무법지대가 된 지역들이 주 활동 지역이었다.
무법지대들은 마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기 좋은 장소였으니까.
주로 미국 남부와 멕시코, 동남아 쪽 몇몇 국가들이 이에 해당되었다.
반면에 아시아와 동유럽 쪽은 섀도우 헌터들이 활동한 적이 없었다.
그런 섀도우 헌터들이 체르노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하게 그곳에 수상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모습을 드러낸 세력은 섀도우 헌터들과 마인들 만이 아니었다.
“천교에 러시아 정부, 그리고…….”
제시카가 서류를 확인하며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로스차일드 보수파 세력까지…….”
제니퍼를 떠올리며 읊조린 제시카가 잠시 침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역천군주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응.”
제시카와 메리가 처용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리고.
-스르르.
길드장실 앞 복도 근처에서 제시카와 메리를 누군가가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