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아쉽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조금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오찬이 처용 일행을 성지 안쪽, 회담 장소로 안내하며 말했다.
“왜요?”
윤아가 궁금한 듯 묻자, 하오찬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어제부터 이곳에 모인 사람들끼리 ‘화합’이 있었습니다.”
오늘 회담을 위해 각 성운과 길드에서 일찌감치 모인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한 화합이 있었다.
다만, 하오찬이 말한 ‘화합’은 말 그대로의 화합은 아니었다.
“……대련을 화합이라고 부르나요?”
하오찬의 말을 들은 윤아가 궁금한 듯 묻자.
“저희는 ‘투쟁의 증명’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오찬이 대략적으로 설명을 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항상 몬스터들과 싸우는 헌터들을 위해 무신전 성좌들이 만든 시스템이었다.
힘든 싸움을 겪고 살아남은 병사들일수록 더 강해지고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무신전 성좌들은 모두 각자의 힘든 싸움을 거치며 살아왔던 영웅들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투쟁의 증명으로 좋은 결과를 보이면 스킬이나 아티팩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건 좀 관심이 생기는데요?”
하오찬의 말에 윤아가 진심이라는 듯 말했다.
‘지금 이 시기부터 있었던 것이로군.’
처용이 하오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투쟁의 증명’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 투쟁의 증명을 통해 운장에게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었으니까.
“아무튼, 조금 아쉽습니다.”
하오찬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하자.
“그간 할 일이 많았거든요.”
“사고가 터지기도 했고…….”
커맨더와 진호가 답했다.
사실, 하루 정도 일찍 오려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준비할 일들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하오찬의 안내를 받고 성지 안쪽에 다다르자.
“와~.”
연아가 눈앞의 풍경을 보며 감탄을 질렀다.
“영화 속 세트장 같아요.”
윤아 역시 풍경을 감상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앙에 마치 연무장처럼 자리해 있는 넓고 큰 바위.
바위 외곽에 둥글게 자리한 좌석들.
그 주변에 배치된 옛 중국식 전통 건축물들과 성벽들.
마치, 규모가 큰 무협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였다.
‘투쟁의 장인가? 오랜만이네.’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많은 연무장 중에 굳이 투쟁의 장을 골랐다?’
이미 자리해 있는 몇몇 무신전 성좌들의 화신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있는 장소 ‘투쟁의 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하, 설마……?’
처용이 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때.
“당신이 역천군주?”
붉은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처용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창날 옆에 반달 모양의 창날이 부착되어있는 창.
방천극(方天戟)을 등 뒤에 짊어진, 연화와 비슷한 나이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여성.
마치 전장의 싸움꾼과 같은 붉은색의 분위기를 지닌 여성이 은은한 투기를 내며 다가왔다.
처용은 회귀 전, 안면이 있던 사람의 등장에 속으로 작은 반가움을 건넸다.
[이름 : 초하]
[레벨 : 161]
[칭호 : S급, 적무신의 신관]
[클래스 : 핏빛 선봉장]
[특징 : 전투가 계속될수록 점점 강해지는 클래스입니다.]
[스킬 : 적토마 소환, 전장의 지배자…….]
눈앞에 여성, 초하 역시 회귀 전, 지구 멸망에서 살아남아 저항군이 되었었던 이였다.
그리고 지금 시기의 그녀는 동방불패 길드에서 무려 세 번째로 강한 헌터였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그리고…….’
처용은 초하를 보며 속을 작은 미소를 짓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그녀의 성좌가 주변에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초하뿐 아니라 그녀의 성좌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초하.”
하오찬이 다가온 초하를 향해 작게 인상을 쓰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알아, 알아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초하가 하오찬을 향해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보게 되네요.”
초하가 처용을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하자.
“궁금증은 풀렸습니까?”
처용이 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자.
“……아니요.”
초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흐렸다.
“어제 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운 듯한 작은 한숨을 내쉰 초하가 뒤를 돌았다.
“다른 사람들도 강해 보이는데 아쉽네.”
중얼거리듯 말을 흐리며 초하가 돌아가자 하오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싸움광이 또 쓸데없는 관심을…….”
하오찬이 멀리 떨어진 초하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하자.
-다 들린다!
초하가 고개를 휙 돌며 외치고는 하오찬을 매섭게 노려봤다.
“하아, 기분 나쁘셨다면 대신 사과드립니다. 저래 보여도 나쁜 녀석은 아닌지라…….”
하오찬이 일행들을 향해 사과하듯 말했다.
“하하, 재밌는 사람이네요.”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말할 때.
“여!”
[오랜만이네. 오버로드.]
메리와 그녀의 성좌인 헤르메스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올림포스의 대표로 헤르메스님이 오신 거였군요.”
처용이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당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헤르메스와 메리를 뒤따라 온 대천사를 바라봤다.
[…….]
처용을 바라보는 대천사, 미카엘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신계에서 이번 일에 관심이 많나 봅니다?”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네 말대로야, 신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생각보다 크게 보고 있거든.]
헤르메스가 신계에 있었던 사정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무려 단 한 명의 인간이 하나의 성운을 향해 테러를 벌인 상황.
덕분에 처용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상승했고 이번 일이 어떻게 수습될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협상 자리에 각 성운의 대표가 한 명 이상씩 참석하게 되었다.
“저기 루이스랑 천둥의 신도 계셔.”
메리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다른 헌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토르의 신관, 루이스가 보였다.
토르 역시 몇몇 무신전 성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단 루이스뿐 아니라 각 성운을 대표해 온 성좌와 신관이 한 명 이상씩 와 있었다.
그들 모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번 사건의 중심인 처용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천교는 보이지 않는군요.”
주변을 둘러보던 처용이 보이지 않는 성운의 세력을 언급했다.
“아무래도 저희와의 관계도 그렇고 또 이번 일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오찬이 처용의 말에 대답했다.
‘너무 소극적인데?’
처용이 천교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천교와 무신전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나, 이번 일에 조용한 것이 조금 이상했다.
동시에 마인들이 잠잠한 만큼 그들과 협력하는 천교 역시 잠잠한 것인가 생각했다.
처용이 마인과 천교에 대해 생각할 때.
“잘 지내셨습니까? 스미스 씨.”
커맨더가 WHU 총장 스미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요즘 잘 지낼 수가 없습니다.”
스미스가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기 끝나면 재선 따위는 하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하하.”
스미스의 말에 커맨더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시간이 되었군.]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금빛의 용이 휘감긴 언월도를 쥔 긴 수염의 성좌.
무신전의 수장, 태무신 운장이 빈 좌석 중 하나에 앉았다.
운장이 나타나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무신전의 성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신의 검객 길드 헌터들과 이자나기 성운의 성좌들이 나타났다.
뒤이어 보이지 않았던 다른 성운의 성좌들도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아마테라스가 운장과 다른 성운의 성좌들, 처용을 번갈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일이 잘 안 풀렸나 보군. 크크.’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아마도 다른 성운의 성좌들과 비밀스럽게 이번 일에 대해 협상을 시도해 본 것 같았다.
아마테라스와 이자나기 성운의 성좌들 분위기를 봐서는 잘 안 풀린 듯 보였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네?]
어느새 강림한 것인지 커맨더의 뒤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화신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셨군요.”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오냐.]
미륵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왜 여래가 아닌 당신이 온 거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미륵을 향해 궁금한 듯 묻자.
[저 머저리들이 치려는 사고가 생각보다 크다고 보면 될 것이야.]
미륵이 이자나기 성운의 성좌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흐음? 관리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정도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언가 짐작한 것이 있는 듯,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무신전은 중재를 맡은 만큼, 이번 일에 크게 관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운장이 입을 열어 말하자 회의장 내부에 목소리가 울렸다.
[시작하게나.]
스미스를 바라보며 운장이 말하자.
“크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장 중앙으로 향한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최근 무슨 일이 발생했고 왜 WHU가 중재를 했는지 짧게 설명했다.
그리고.
“우선, 어째서 신의 검객 길드를 공격한 겁니까? 한처용 헌터.”
스미스가 처용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파악하기는 했지만, 당사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의 말이 끝나자.
“그럼 나와 내 가족들을 잡아다가 생체 실험을 벌이려 했는데 가만히 있을까?”
처용은 이자니기 성운 측을 향해 싸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생체 실험이요?”
“뭐, 다들 따로 조사들을 하셨을 테니 잘 아실 텐데요?”
스미스가 묻는 말에 처용이 주변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데미갓 프로젝트.”
처용이 대놓고 데미갓 프로젝트를 언급하자 이자나기 성운 측 사람들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대놓고 밝히니까 기분 나쁜가?”
“……이!”
요키라가 처용의 말에 이를 갈았다.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습니까?”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전 한국에서 추기경이 벌인 테러를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커맨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간의 상황을 정리하여 설명했다.
동시에.
-지이잉!
왼손에 장착된 패널을 조작하며 홀로그램을 띄웠다.
홀로그램 속에서는 배신자들이 한국에서 마인들과 함께 테러를 보이는 모습과.
-크하하하!
리치로 변해버린 추기경의 모습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고.
“추기경이 테러를 벌이는 동안, 성자가 신의 검객 길드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단을 배신한 고위 사제들의 목록과 그들이 사전에 모의한 증거들이 나열되었다.
“역천군주가 아니었으면…… 당했을 겁니다.”
성자가 커맨더의 말에 긍정하며 의견을 더했다.
“우린 성자를 공격한 게 아닌-!”
요키라가 반박하려 입을 열 때.
“네놈들이 벌인 일을 부정하려 하지 마라!”
성자의 옆에 있던 안드레아가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희들을 모두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아!”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안드레아 님.”
성자가 분노하는 안드레아를 만류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빛의 강림을 강제로 해제시켰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좌가 신관에게 강림하는 것을 강제로 해제시키는 게 가능합니까?”
스미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성자가 이자나기 성운 측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 성자, 게다가 성녀까지.”
커맨더가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윤아와 연아, 성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겁니까?”
“희생이라니! 무슨 증거로 그렇게 단정 짓는 거냐!”
요키라가 부정하듯 말하자.
-지잉!
커맨더가 미소를 지으며 홀로그램 문서 하나를 크게 띄웠다.
[데미갓 프로젝트.]
그가 보인 것은 야스라가 무라키 가의 비고에서 털어온 비밀문서였다.
“도대체…… 그걸 언제?”
가문의 비밀문서를 확인한 요키라가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성지 가장 깊은 곳에 있어야 할 실험 문서가 왜 커맨더의 손에 있는 것인가?
“아주 정의로운 누군가가 전달해 준 증거입니다.”
커맨더가 그런 요키라를 혐오스럽게 보며 말을 이었다.
“데미갓 프로젝트는 인공적으로 신격을 지닌 존재를 만드는 실험으로…….”
그 문서는 데미갓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 기록과 간의 실험.
그 실험에 적합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목록에는 커맨더가 언급한 이들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후보 목록에는 당연히.
“그래서 기를 쓰고 나를 잡으려 한 건가? 크크크.”
처용의 이름이 자리해 있었다.
“인공적으로 반신을 만드는데, 반신을 희생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
처용이 홀로그램 문서를 쭉 읽어보며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자, 눈앞에 가장 강력한 후보가 있는데 깽판을 쳐서라도 날 잡을 건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처용의 말에 요키라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야스라!”
짐작하기로는 저 문서를 커맨더에게 쥐여 줄 만한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결정적 증거가 커맨더의 손에 들어간 이상, 뭐라 반박하거나 발뺌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간을 끌기 위해 협상 자리에 응한 것이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때.
[데미갓 프로젝트, 모두 내가 지시한 거다.]
침묵하던 아마테라스가 입을 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