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새하얀 병실 같은 공간인 닥터의 스킬, 백병원 안.
“상당히 무리했습니다. 리더.”
진찰을 마친 닥터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리더를 향해 말했다.
“당분간 왼팔은 쓰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닥터의 말에 리더가 잘려나갔었던, 지금은 깁스를 하고 있는 왼팔을 바라봤다.
솔저를 포함한 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난 닥터와 마녀.
리더의 팔은 마녀가 조종하는 악령에 의해 회수되었다.
처용에 의해 깔끔하게 절단된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 닥터가 곧장 붙일 수 있었다.
“…….”
닥터의 말에 리더가 왼팔을 조금 움직여 보고는.
“감쪽같이 저희를 속이셨군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닥터를 향해 말했다.
자신의 결전기, 백호의 뇌호와도 맞설 수 있는 그랜드 라이거.
그 결전기가 처용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졌었다.
그런데 비전투직인 닥터가 처용이 던진 흉측한 투창을 막아내었다.
절대 평범한 상급 마인이 발휘할 능력이 아니었다.
“왜 의회주께서 상급 마인인 척을 하고 계신 겁니까?”
생각을 마친 리더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비밀입니다.”
닥터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 리더의 확신을 인정했다.
“마녀도 알고 있습니까?”
“당신처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눈치챈 것 같더군요.”
“…….”
리더가 잠시 침묵하자.
“평소처럼 대하십시오. 이것 또한 임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닥터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좋습니다.”
“에블린은 어디에 있나?”
리더가 닥터에게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의 대한 안부를 물었다.
“다치지는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릴님이 붙어 있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요…….”
닥터가 의회주 중 하나, ‘릴’을 언급하며 말하자.
“에블린을 완벽하게 고쳐줄 방법이 있다고 하시더군.”
리더가 릴이 했었던 제안을 떠올리며 말했다.
“흐음……?”
닥터가 리더의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음을 흘렸다.
“에블린 양이 귀중한 상급 마인인 만큼, 이상한 짓은 하지 않겠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더가 믿음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이 아이를 살리고 싶니?
죽을 운명이었던 에블린을 살릴 수 있게 도와준 마인이 바로 릴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모시는 대악마가 에블린을 살려주었다.
“마저 안정을 취하시지요.”
닥터가 안부를 전하고는 리더의 병실을 나오자.
“리더는?”
병실 앞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마녀가 말했다.
“네가 팔을 회수해 준 덕분에 곧 나아질 거야.”
“다행이네.”
닥터의 말에 마녀가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마녀가 닥터를 향해 향후 방침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몸 사리면서 시키는 일을 해야겠지.”
닥터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곧 ‘대격변’도 일어날 테니까. 준비도 필요하고.”
마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병실 끝으로 나아갔다.
그런 닥터의 뒷모습을 마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병실 끝에 달한 닥터가 문을 소환해 밖으로 나가자, 상급 마인들과 의회주들이 모여 있던 대회의실이 나타났다.
“왔군.”
잭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하자, 다른 의회주들이 닥터를 바라봤다.
“덕분에 아주 바빴습니다. 잭.”
닥터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왜 제 경고를 무시한 겁니까?”
잭을 향해 핀잔하듯 말했다.
“설마 놈들이 이 정도로 굳건하게 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닥터의 말에 잭이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내 실수를 인정하지, 미안하네.”
“……뭐, 추기경이 멍청한 탓도 있었겠지요.”
잭이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자 닥터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닥터의 대비가 아니었으면 피해가 더 클 뻔했어.”
“인정하네.”
집행자의 말에 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니퍼 양은 호되게 당한 것 같습니다만?”
닥터가 비어 있는 자리 중 하나를 바라보며 말하자.
“쯧.”
잭이 닥터가 바라보는 빈자리를 응시하며 혀를 찼다.
“당장은 활동하기 힘들다고 하더군.”
“하아, 그렇군요.”
잭의 말에 닥터가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모두 미안하네. 이번만큼은 내 판단이 그릇되었네.”
잭이 다시 한번 의회주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듯 사과하자.
“아니, 동무의 잘못만은 아니오.”
솔저가 그런 잭을 변호하듯 말했다.
“그 남조선 간나 새끼들의 전력을 애초부터 잘못 판단했소.”
“……권백호가 두 번째 벽을 부수고 성장했다던가?”
“맞소.”
잭의 말에 솔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든 계산이 잘못되었었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권백호의 성장, 올림포스의 개입, 게다가…… 목표였던 두 에미나이까지…….”
“커맨더의 조카와 한처용의 동생이 S급 헌터, 게다가 에픽 클래스였을 줄이야.”
잭이 세상에 퍼진 기사 내용과 마인들의 보고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에픽 클래스 중에서도 상위급…… 군주 클래스에 버금갈 거라 보오.”
솔저가 진지하게 말했다.
추기경이 학교를 습격할 당시, 스마트폰과 스마트 워치를 통해 동영상을 촬영한 학생이 소수 있었다.
아주 짧게 찍히긴 했지만, 그 영상이 기사를 통해 퍼졌었다.
“날씨와 환경을 조작하는 능력, 그리고 물귀신이 따로 없는 꼬맹이까지.”
최상위 마인인 솔저는 짧은 영상임에도 그것을 통해 윤아와 연아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사전 조사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추기경의 계획은 처음부터 망한 셈이었소.”
“이종족들의 개입도 예상외였지.”
솔저의 말에 릴이 대답했다.
“그 버러지들의 정신을 분명 짓밟아 놨을 텐데…… 어떻게 고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야?”
릴이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말하자.
“한국 헌터들의 수준도 예상외였어.”
“C급 헌터로 파악되었던 이가 A급, 게다가 결전기까지 썼다고 하더군.”
다른 의회주들이 의문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의문을 표할 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소.”
솔저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상황은 단 한 명이 만들어냈다는 것이오.”
솔저의 말에 의회주 전부가 그 ‘한 명’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렸다.
“역천군주…….”
잭이 읊조리듯 말했다.
“조커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더한 놈이 튀어나와 버렸어.”
“우선, 대격변 전까지 몸을 사리는 게 좋겠습니다.”
닥터가 잭의 말에 의견을 냈다.
“신의 검객 쪽은 내가 계속 맡을 거야.”
릴이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문제는 없나?”
잭이 릴을 향해 말하자.
“나는 절대로 급하게 일을 하지 않아. 잭.”
릴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주 천천히,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잠식하는 타입이지.”
“……혹시 모르니, 내가 릴을 돕지.”
침묵하던 집행자가 릴과 잭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천군주가 이자나기 성운과 마찰을 일으킨 이상,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오우? 행동대장께서 웬일이래?”
릴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무한한 공포께서 내린 지령이다.”
집행자가 자신이 모시는 대악마 ‘디아블로’를 언급했다.
“알았네.”
대악마의 명령이라는 말에 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릇을 찾는 일은?”
잭이 닥터를 향해 그가 맡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자.
“이 난리통을 수습하느라…… 다시 시작해야죠.”
닥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잭이 닥터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적합자, 에너지, 야생 마수…… 전부 진척이 없나?”
“적합자 빼고는 단서를 잡았죠.”
닥터가 잭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잭이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일단, 역천군주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대격변을 준비하고 몸을 사립시다.”
최종 방침을 정리한 잭의 말에 의회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처용이 아지나기 성운의 성지에서 테러를 벌이고 이틀이 지났다.
WHU에서 제안한 협상 날짜.
처용은 몇몇 일행과 함께 커맨더의 마키나를 타고 상하이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올림포스의 성지를 방문할 때와는 다르게.
“와 신기해!”
“삼촌의 함선에 직접 타 보는 건 처음에요.”
연아와 윤아가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 동방불패 길드의 성지를 방문한다는 일에 동행하겠다고 떼를 쓴 결과였다.
물론, 커맨더가 우려를 표하긴 했지만.
-조기교육도 나쁘진 않겠죠. 이미 세상에 드러났으니까요.
처용과 연화를 포함한 몇몇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연아와 윤아가 세상에 드러났고 이명까지 받은 상태였다.
게다가 헌터로서 스스로의 힘까지 증명했다.
그런 아이들이 커맨더를 포함한 최상위 헌터들과 초기부터 같이 행동하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연아와 윤아가 함선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때.
“놈들이 순순히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커맨더가 이자나기 성운과 신의 검객 길드를 생각하며 말했다.
“순순히 협상할 놈들이었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습니다.”
처용이 커맨더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막 나갈 가능성도 높습니다. 성자에게 민심까지 빼앗겼으니…….”
분노한 처용이 일본의 시민들을 공격한 순간, 방어에 나섰던 성자.
그가 보인 이타심으로 인해 그간 정치로 다져둔 일본 정부와 무라키 가를 지지하는 민심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 것을 넘어서 무너지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향해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도저히 정치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신의 검객 길드와 이자나기 성운에 있어서는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하필 노려도 성자를 노리다니, 멍청한 놈들.”
처용이 이자나기 성운과 신의 검객 길드를 생각하며 말하자.
“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왜 하필 성자를……?”
커맨더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자를 희생시켜서 엄청난 힘을 손에 넣으면 세계를 지배할 줄 알았나 보죠.”
처용이 비웃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설마.”
“이젠 믿을 때도 되었지 않았나요? 그 설마가 사람 여럿 잡았는데.”
“하…… 이해할 수가 없네.”
커맨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이해할 가치도 없고요. 그 망할 놈들 사정 봐줄 필요도 없습니다.”
처용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비록 처용이 보복 테러를 일으켰다고 하나, 엄연히 따지면 처용과 커맨더, 성자 쪽은 피해자였다.
신의 검객 길드와 이자나기 성운이 마인들, 대악마들과 협력한 것은 사실이니까.
“이번에도 제 자존심들을 세운다? 그럼 정말로 다 박살을 내버릴 겁니다.”
“만약 놈들이 정말로 뻔뻔하게 나온다면 나도 돕지.”
처용의 말에 커맨더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윤아를 납치하려 했다.
그 역시 이번 일을 초래한 이들에게 분노한 상태였다.
이윽고 커맨더의 성지가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불패 길드장 하오찬이 커맨더와 처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동방불패.”
커맨더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네자.
“아, 네, 오랜만이군요…….”
하오찬은 아직도 자신의 이명이 부끄러운지 말을 흐리며 악수를 받았다.
“협상 장소로 성지를 빌려줄 줄은 몰랐군요.”
처용이 하오찬을 향해 말하자.
“태무신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오찬이 자신의 성좌를 언급하며 이야기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을 보고 싶은 듯했습니다.”
“……그렇군요.”
처용이 하오찬의 말에 무신전 성좌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흥미로운 투쟁의 냄새를 맡으신 건가?’
무려 인간이 하나의 성운을 상대로 벌인 테러.
무신전 성좌들은 무모한 투쟁을 벌이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보였다.
심지어 그 무모한 투쟁에서 여러 번 승리했으니 더더욱 관심이 커질 터.
“성자는 이미 와 있습니다. 가시죠.”
하오찬이 커맨더와 처용을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으로 이끌었다.
리무진이 어디론가 잠시 이동하자.
“위대한 무신을 섬기는 신관이 성지의 개방을 요청하옵니다.”
커맨더의 맞은편에 앉은 하오찬이 눈을 감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스르르.
리무진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환경이 안개에 휩싸이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아아!
안개가 확 걷어지며 새로운 환경이 드러났다.
리무진은 창과 칼 등 무기를 움켜쥔 석상들이 나열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도로 끝에 달하자, 고대 중국식 성문이 나타났다.
-끼이이.
리무진이 가까이 오자 성문이 열렸고 처용과 커맨더가 내렸다.
‘오랜만이군.’
처용이 동방불패 길드의 성지를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넓은 연무장들이 군데군데 자리한 중국식 황성과 같은 장소였다.
처용과 커맨더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랜만에 뵙는군요.”
미리 와 있었던 성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호네아는 별일 없습니까?”
“……너무 잘 먹고 다녀서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성자의 물음에 처용이 작은 웃음을 섞어 말했다.
성지에서 치료 중인 성녀.
그녀는 언제나 고된 훈련이 끝나면 밥부터 찾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먹거리에 한이 맺힌 듯 보였다.
성녀가 활기를 찾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병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요.”
처용의 말에 성자가 안심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이것도 돌려드려야겠죠.”
목에 걸린 목걸이를 처용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당분간 쓰십시오.”
처용은 성자가 아티팩트를 돌려주려는 것을 만류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그것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해답을 찾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성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무려 파마의 신력이 담긴 아티팩트.
처용은 성자가 이 아티팩트를 통해 자신만의 힘을 개척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귀 전, 성자가 발휘했었던 힘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럼…… 당분간 신세를 지겠습니다.”
성자가 잡았던 목걸이를 놓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