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성자가 돌아가고 이틀이 지났을 무렵.
“하아. 하아-.”
성지의 못 중 하나, 그 외곽에 정리된 산책길을 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빛에 반사될 정도로 새하얀 백발과 긴 속눈썹.
운동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묶어 내린 머리가 발걸음에 맞춰 말꼬리처럼 흔들리는 모습.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을 하는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은 다름 아닌 성녀였다.
그런 그녀 옆에는.
“세 바퀴 남았습니다.”
연화가 성녀의 속도를 맞추며 같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힘내요. 언니!”
“조금만, 더 힘내요!”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쉬고 있는 연아와 윤아가 성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녀의 사정을 듣고 자발적으로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그때.
“순조롭네.”
성녀의 상태를 보기 위해 찾아온 처용이 다가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 왔어?”
연아가 손을 휘저으며 대충 대답했고.
“그분들 일은 잘 끝나신 건가요?”
윤아는 처용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했었던 일을 언급하며 말했다.
“나는 방법만 알려줄 뿐, 나머지는 그들 몫이야.”
처용이 윤아의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 전 일을 생각했다.
성지에 찾아왔던 제시카는 처용과 여러 의논과 거래를 끝내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올림포스에서 새로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올림포스에서 엄중히 선별한 99레벨 헌터 다섯.
거기에 S급 헌터인 리차드와 그의 성좌인 헤라클레스였다.
리차드는 제시카와 같은 수련을 받기 위해.
99레벨 헌터들은 A급 도달하기 위해 처용의 성지를 찾았다.
이들은 신법의 대신, 여래가 만든 ‘신법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들이었다.
계약의 내용은 성지에서 보거나 배운 것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것.
비밀을 유출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하고 강력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성지에 찾아온 이들 모두 단 한 차례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서에 승인했다.
모두가 헌터로서 한 차례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와 간절함 때문이었다.
성좌인 헤라클레스 역시.
-나는, 아니 우리는! 믿음엔 믿음으로 보답한다!
여래가 내민 계약서에 망설임 없이 승인했다.
그들에게 수련법과 지도를 봐주는 대가로 처용이 아테나에게서 받은 것은.
-황금 올리브나무 중 가장 괜찮은 녀석을 한 그루 골라 주마.
올림포스 성역에 있는 황금 올리브나무 한 그루를 받았다.
성지의 정상, 태룡담에 자라나 있는 세계수.
그 세계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금빛의 이파리를 휘날리는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다.
‘아주 유용한 걸 받았어.’
처용이 성지에 심어진 올리브나무를 응시하며 말했다.
몇 백 미터로 자라나는 세계수만큼은 아니지만.
올리브나무 역시 30M 정도 높이로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저 나무 멋있긴 한데, 뭐가 좋은 거야?”
연아가 처용이 바라보는 올리브나무를 응시하며 말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라고 해야 할까?”
처용은 연아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테나에게서 받은 황금 올리브나무.
그 나무가 맺어내는 황금 올리브 열매.
그 열매 하나하나가 바로 영약과 다름이 없었다.
주변의 환경과 여러 요소에 따라 다르지만.
대게 레어 등급, 운이 좋다면 유니크 등급의 열매까지 맺어냈다.
지금 시기에 수십, 수백억에 거래되는 영약을 주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냥 복용하는 영약으로 써도 되고 이종국이 연구하고 있는 신약 개발에 써도 되었다.
아테나가 지불한 대가인 황금 올리브나무는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신성한 힘이 흐르는 성지에다 세계수까지 자리 잡은 장소였다.
거기에 세계수와 엘프들이 황금 올리브나무를 돌보는 이상, 절대로 나무가 시들 리는 없었다.
처용이 황금 올리브나무를 보며 생각할 때.
“왔어?”
성녀의 훈련이 끝난 듯 연화와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연화를 따라 완전히 지친 듯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성녀가 따라왔다.
“생각보다 할 만하죠?”
처용이 아공간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고는 지친 듯 숨을 몰아쉬는 성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성녀는 처용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받은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료를 가볍게 원샷한 그녀는.
“이제 밥, 치킨 먹으러 가죠!”
아주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식사할 때가 되었다며 외쳤다.
“…….”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냈다.
성녀의 말이 끝나자.
“네, 밥 먹으러 가요. 언니!”
연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원래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연화는 그런 성녀를 보며, 이전 교단에서 마주했었던 성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 성지에 방문하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의 신비한 이미지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하하.”
처용 역시 조금(?) 바뀐 듯한 성녀의 이미지를 보며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처음 성지에 찾아오고 기존에 먹던 음식과 다른 음식을 마주했을 때는.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그간 교육을 받은 탓인지 작은 죄책감이 드는 듯한 모습도 보였었다.
그러나 치킨을 한 입 무는 순간.
-맛있어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황홀한 맛과 식감에 감탄을 내질렀다.
그 이후 완전히 치킨의 맛에 빠져버린 상태였다.
‘이 정도일 줄은…….’
처용이 성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뭐, 바뀐 식단을 좋아해 줘서 다행이네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녀는 강제로 소식과 채식을 해온 사람이었다.
아무 간도 되어있지 않은 죽과 풀, 이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었다는 음식이 어릴 때 먹은 빵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성녀가 폭력적인 감칠맛을 자랑하는 음식을 입에 넣자.
마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헤헤, 빨리 가요.”
조금 전까지 지친 듯한 모습은 사라진 성녀가 재촉하듯 말하며 앞장서 나아갔다.
처용은 그런 성녀를 보며 왜인지 루나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뱀파이어 왕족답게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를 보였지만.
치킨을 마주할 때는 도도한 이미지는 내다 버리고 진심 어린 순순한 기쁨을 드러냈으니까.
모두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아, 귀찮아. 졸업식 가기 귀찮은데.”
연아가 귀찮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뿐인 졸업식이니 가야지.”
그런 연아의 말에 윤아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졸업식?”
처용이 연아와 윤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삼일 뒤, 이번 주 금요일이 학교 졸업식이에요.”
윤아가 처용의 말에 대답하자 처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학교로 가야겠네?”
처용이 무언가를 생각함과 동시에 진지하게 물었다.
“당연히 가야…….”
그 말에 윤아가 당연히 가야 한다고 대답하려 할 때.
“어!?”
갑자기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더니 비틀거렸다.
“어? 왜 그래?”
연아가 놀란 듯 윤아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윤아는 허공을 응시하며 마치 무언가를 보는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몇 초 정도 지나자.
“어, 으!”
윤아가 이마를 잡으며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뭘 봤어?”
윤아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그녀가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한 질문이었다.
“졸업식…… 졸업식 같았는데, 졸업식이 보였어요.”
윤아가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신룡의 예언.
방금 윤아가 보인 모습은 신룡만신이 가진 예언의 능력이었다.
정확히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가까운 미래를 보는 만큼 강력한 능력이었다.
“졸업식 중에 폭발이…… 학교가 난장판으로…… 사람들이 다쳤어요.”
예언을 본 윤아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처용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모르겠어요. 그때처럼 시커먼 형태로만 보여서…… 그리고.”
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저랑 연아를 공격했어요.”
“……!”
처용은 윤아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조금 전, 연아가 졸업식을 언급했을 때, 처용의 머릿속에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떠올랐었다.
졸업식을 참석하려면 성지에서 나가야 했으니까.
‘추기경…… 이걸 노린 건가?’
처용과 그 가족들의 이력은 협회장에 의해 모두 숨겨져 있었다.
주변 인물들, 대표적으로 커맨더와 그 가족들 역시 모두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한다 해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윤아의 경우 이전 포세이돈의 일 때문에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한국의 세 번째 S급 헌터로 외부에 공개가 되었으니까.
“어, 어떻게 하죠?”
윤아가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잠시 침음을 흘린 처용은.
‘아타, 사람들을 모아 줘.’
아타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선, 이 상황과 자신이 짐작한 부분을 알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
“예언?”
아타를 통해 처용이 전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커맨더가 윤아를 보며 물었다.
“네,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 줘요.”
윤아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예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설명했다.
“언제야?”
커맨더가 윤아의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금요일에 있는 졸업식 같았어요.”
“금요일이면…… 삼일 뒤, 설마!?”
윤아의 대답을 들은 커맨더가 눈을 크게 뜨고는.
“태양의 신관, 이 자식 혹시……?”
라의 성좌이자 파라오 길드의 길드장, 라진을 언급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처용이 분노한 듯 보이는 커맨더를 향해 물었다.
“파라오 길드에서 삼일 뒤에 던전 공략을 도와 달라 요청했거든.”
커맨더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가 홀로 막고 있었던 이계던전.
커맨더가 윤아의 일로 인해 내친 일을 태양의 군주와 파라오 길드가 대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 인근에 상당한 마나가 감지되는 A급 던전이 나타났다.
그에 파라오 길드는 한국 헌터 협회 측으로 커맨더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삼일 뒤, 라진과 파라오 길드의 정예들이 A급 던전을 빠르게 공략하는 동안.
이계던전을 커맨더에게 맡아 달라 요청한 것이었다.
커맨더는 자신의 일을 대신 맡아온 파라오 길드를 위해 이 일을 수락한 상태였다.
“설마, 이놈들도?”
윤아, 연아의 졸업식과 너무 절묘한 타이밍.
커맨더의 머릿속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들 때.
“아닐 겁니다.”
처용이 커맨더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부정했다.
“라의 신관은 마인들과 협력할 만한 이가 아닙니다. 라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고요.”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데?”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이 짠 판이겠지요.”
커맨더의 말에 처용이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추기경이구나.”
이 자리에 초대받은 여성.
올림포스의 정보를 담당하는 나이키 윙 길드장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처용에게 연락을 받고 올림포스 성지에서 곧장 태룡사로 온 것이었다.
올림포스, 정확히는 주신인 아테나와 맺은 협력 계약.
올림포스 성지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는 처용의 성지와 이어지는 게이트가 있었다.
서로 원만하고 비밀스러운 협력과 거래를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처용의 연락을 받은 메리가 곧장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추기경이 윤아 양의 스케줄을 파악했고 WHU에 연결된 라인을 통해 파라오 길드를 이용했다면?”
상황을 파악한 메리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이야기했다.
“스토리가 딱 들어맞는데?”
“역시, 올림포스의 정보를 담당하는 길드장 답네.”
“히히.”
메리가 처용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파라오 길드는 사정도 모르고 이용당하는 거다?”
이야기를 듣던 커맨더가 상황을 이해하고는 질문했다.
“커맨더 얼마 전에…….”
처용은 메리를 통해 전해 들었던 첩보를 커맨더에게 이야기했다.
추기경이 성자가 모르게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
그들이 노리는 대상이 성지에 머무르는 누군가라는 정보.
그러자.
“추기경…… 이 새끼가 감히……!”
이야기를 들은 커맨더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일렁였다.
“문제는…… 추기경을 돕는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메리가 그런 커맨더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마인들이나 천교…….”
메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커맨더의 표정이 더욱 거칠게 일그러졌다.
결국.
“죽여 버릴까?”
화가 폭발한 커맨더의 입에서 분노가 가득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커맨더는 이전의 일로 더는 가족들이 위협을 당하는 일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기 전에 그 조짐이 보인다면 반드시 막으리라 다짐했었으니까.
“예상 밖이네요. 커맨더가 ‘암살’을 이야기하실 줄은.”
처용이 그런 커맨더를 향해 묻자.
“두 번 다시는 가족이 위협을 받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커맨더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처용은 그런 커맨더를 잠시 응시하고는.
“제 예상입니다만, 놈들이 노리는 주 목표는 윤아가 아니라 ‘연아’일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윤아가 아니라 네 동생이라고?”
커맨더가 의문을 담아 물었고 다른 이들 역시 의문을 표했다.
“추기경이 증오를 품고 있는 대상은 저입니다.”
처용은 추기경의 입장을 생각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마도 윤아는 연아를 잡는 겸, 겸사겸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추기경의 입장에서 그가 이번 일을 꾸밀 때.
분명, 커맨더가 방해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확히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윤아와 연아를 잡아 무언가를 할 생각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죠.”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