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커맨더가 복귀하고 언문이 무신전으로 돌아간 후, 사흘이 지났을 때.
“오랜만입니다.”
약속대로 성지에 제시카가 찾아왔다.
“예상보다 일찍 왔네요.”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반기자.
“더 빨리 오고 싶었습니다만, 그간 일이 좀 있었습니다…….”
제시카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세계 헌터 회의 이후 제시카만이 아니라, 올림포스 성운 자체가 나름 바쁘게 돌아갔으니까.
“겨우 마무리만 하고 오는 길입니다.”
제시카가 같이 온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지에 방문한 사람은 제시카만이 아니었다.
“경치가 끝내주는데?”
메리가 성지의 경치를 둘러보며 감탄을 지르고 있었고.
“확실히, 다른 성지들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디오니소스의 신관이자 넥타르 길드장인 메로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하고 있었다.
“넥타르 길드장이 왔다는 건……?”
처용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을 흐렸다.
본래는 제시카와 메리만 방문하기로 했었으니까.
그런데 처용이 공청석유를 건네며 포션 의뢰를 했었던 메로나가 같이 온 상황.
그렇다면?
“재료가 좋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포션이 빨리 만들어졌어요.”
메로나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계 헌터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연구에 매진한 결과였다.
“이따가 확인해 보죠, 물건이 괜찮으면 오늘 바로 드리겠습니다.”
처용은 의뢰 당시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듯 말하자.
“미라클 알케미스트의 이름을 걸고! 품질은 확실합니다!”
메로나가 자신의 클래스를 언급하며 말했다.
미라클 알케미스트, 기적의 연금술사.
메로나의 클래스이자 그녀를 지칭하는 이명이었다.
“아테나 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건가……?”
처용이 하늘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할 때.
-화아아!
허공이 빛무리가 뭉치더니 아테나가 나타났다.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성지구나.]
아테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을 표하듯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다른 성좌들도 함께 있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
천사의 날개가 달린 작은 챙모자.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두 마리의 뱀이 휘감기며 올라간 지팡이.
신물 케리케이온을 들고 있는, 옅은 곱슬기의 금발 머리를 한 남자.
메리의 성좌이자 올림포스의 전령신 헤르메스였다.
[반가워, 오버로드.]
헤르메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처용의 이명을 언급하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헤르메스 님.”
처용이 헤르메스의 인사를 받아주자.
[그 까탈스러운 전령신이 웬 친한 척?]
헤르메스 옆에 있던, 네잎클로버가 자라나 있는 화관을 쓴 여신.
티케가 불만을 섞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 원래 친절합니다. 티케.]
헤르메스가 티케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볍게 말했고.
[웃기고 있네.]
그 모습을 본 티케가 인상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두 성좌가 기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때.
[자자, 티격태격하러 여기에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한 성좌가 둘을 만류하며 말했다.
마치 잘 익은 포도나무처럼 녹색과 보라색으로 어우러진 웨이브 머리.
고대 그리스 양식의 단정한 로브를 입은 남자.
그는 메로나의 성좌이자 축제와 술의 신 디오니소스였다.
티케와 헤르메스를 만류한 디오니소스가 처용을 바라보더니.
[나도 만나서 반가워, 한처용.]
미소를 지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처용은 찰나의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환영합니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환영했다.
처용이 디오니소스를 보며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회귀 전, 대악마 측에 투항해 악신이 되었었던 성좌였으니까.
물론, 그가 회귀 전 올림포스를 배신하고 악신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겁 많고 심약한 성좌…….’
처용은 그를 보며 다른 배신자들을 볼 때처럼 격한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불쌍한 느낌을 먼저 받았다.
미쳐 날뛰는 포세이돈과 아레스의 패륜.
순혈자들과 안드라스의 선동으로 줄줄이 배신하는 신들.
신관인 메로나가 제니퍼에게 죽고 길드장이자 아테나의 신관인 제시카까지 살해당한 상황.
심지어 배신자들에 의해 올림포스의 대신들까지 하나둘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올림포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신이었다.
본래 그는 아테나를 돕던 신.
그러나 아르테미스에 의해 붙잡히고 결국, 살아남기 위해 악마들에게 투항했다.
투항을 하든 하지 않든 죽는 건 변함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같은 일이 반복될 경우는 없겠지.’
처용이 디오니소스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와는 다르게 내부에서 올림포스를 분열시키던 불화의 대악마, 안드라스는 소멸했다.
순혈자들의 핵심이었던 아레스와 아르테미스도 올림포스에서 퇴출당했다.
게다가 같은 편이면서도 올림포스를 어지럽히던 포세이돈 역시 소멸한 상황.
아테나가 올림포스를 굳건하게 지탱하는 한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먼저 배신할 것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비단 디오니소스만이 아닌, 회귀 전 그와 비슷한 행보를 밟았던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와 그의 신관인 메로나는 나름 유능한 이들이었다.
지금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처용이 디오니소스를 보며 생각할 때.
“미안, 내가 좀 늦었나?”
하늘에서 급강하하며 내려오던 커맨더가 처용 옆에 착지하며 말했다.
그는 일이 있어서 잠시 외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커맨더가 돌아오자.
-지이잉.
그의 옆에 전류가 모이듯 푸른 게이트가 열리더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다.
[이렇게 지상에 본신으로 강림해서 만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테나를 보며 말하자.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테나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확실히, 얼마 만에 본신으로 지상에 강림해보는 건지 모르겠네.]
[으음…… 우리 성지도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였으니 가실까요?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처용이 성지에 초대받은 이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태룡담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고여 만들어진 못 중 가장 큰 연못.
일행들은 그 중앙에 자리한 목탑 형태의 정자로 향했다.
목탑 형태의 정자로 들어서자.
“오셨습니까?”
성지에 거주하는 이종족 중 하나.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뱀의 형태를 가진 라미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일행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마수 실험장에서 구출된 이종족 중 하나였다.
“가장 안쪽에 계십니다.”
라미아의 말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이종족들이 직원으로 있는 건가요?”
따라오던 제시카가 궁금한 듯 처용에게 물었다.
조금 전 보았던 이종족인 라미아.
그녀의 모습이 마치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처럼 느껴졌으니까.
“성지에 머무르는 대가로 취직을 시킨 겁니다.”
처용은 제시카에게 성지에 머무르는 이종족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말해주었다.
헌터 협회에 의해 신분을 보증받은 이종족들은 그들만의 다양한 개성을 살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뱀파이어들처럼 협회와 헌터들을 돕는 일도 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업무는 바로 이종족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산품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예시로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거미의 형상을 한 아라크네.
아라크네의 실타래는 다른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그 외 눈의 일족인 설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백년빙옥(百年氷玉).
조금 전 보았던 라미아만이 키울 수 있는 약초인 청삼(靑蔘) 등.
다른 길드는 얼마 보유하지도 못한 물품들을 이곳 성지에서는 생산이 가능했다.
“흠…….”
처용의 말을 들은 제시카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메리와 메로나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처용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시카에게 이종족들의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
처용은 올림포스를 통해서 이종족들의 특산품들을 일부 거래할 생각이었다.
가장 첫 번째로 물품을 공급받는 올림포스는 전력이 강화되고 처용은 자본과 다른 이득을 얻는다.
올림포스 역시 물량이 얼마 없는 이종족의 물품을 다른 길드와 거래하여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올림포스를 운영하는 제시카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시카의 반응을 살피던 처용은 아테나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
그녀는 조금 전 라미아를 본 탓인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
처용이 성지에 근무하는 라미아의 모습을 아테나에게 보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를 거기서 빨리 끄집어낼수록 당신에게도 좋을 겁니다. 아테나.’
처용이 아테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할 때.
“다 왔네요.”
처용이 복도 끝에 자리한 여닫이문을 보며 말했고 문을 열어젖히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그러자.
“어…… 1층의 복도 끝을 향해 나아갔는데, 왜……?”
메로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왜 옥상이죠?”
일행들이 목탑 형태의 정자 1층 내부로 쭉 걸어 들어와 입장한 장소.
그곳은 주변의 운치가 훤히 보이는 탑의 꼭대기 층이었다.
“여긴 평범한 성지가 아닙니다.”
메로나의 의문에 대충 대답한 처용은 미리 와 있었던 이들을 향해 나아갔다.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스승님.”
[고생했다. 제자야.]
처용의 말에 미리 와 있었던 여래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목탑의 가장 위층에는 여래만이 아닌, 성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신격들이 모여 있었다.
간단한 다과들이 올려져 있는,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넓은 원탁.
초대받은 이들이 모두 자리하자.
“나쁘지 않죠?”
처용이 아테나를 향해 말했다.
[다른 성지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하기는 처음이구나.]
아테나가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향했다.
[역시 당신들도 이곳에 함께 하고 있었군요.]
아테나의 시선을 받은 이는 바로 인간형의 카투라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붉은 도마뱀, 크루마였다.
[안녕, 제우스의 딸?]
카투라가 집게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반가움을 전했고.
[흥.]
크루마는 쌀쌀맞은 태도로 머리를 돌렸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신들에게 유감은 없습니다. 하지만……]
태초의 마수들을 본 아테나가 말을 흐리고는.
[다른 성운들이 다짜고짜 적대할 수도 있습니다. 신법의 대신.]
여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들을 살려야만 악마들의 거대한 음모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테나의 질문에 여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거대한 음모요?]
여래의 대답에 아테나가 의문을 표하자.
[맞아, 여래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녀석도 죽었을 거야. 아니.]
카투라가 아테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놈에게 잡아먹혔을 거야.]
[잡아…… 먹힌다?]
아테나가 카투라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의문을 비치는 건 아테나만이 아닌, 초대받은 이들 전부가 마찬가지였다.
그때.
“이전 한국에 찾아왔을 때, 제게 질문한 적이 있었죠.”
처용이 제시카와 메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판데모니움의 중심에 있는 자에 대해서…….”
“……종말 그 자체라고 말했었죠.”
제시카가 기억이 난다는 듯 대답했다.
[놈이 우리 형제들 중 하나를 이미 잡아먹은 상태야.]
카투라가 말하자.
[무슨 짓을!]
아테나가 놀란 반응을 보이며 대답했다.
[무슨 목적으로 태초의 마수인 당신들을?]
“놈들의 정확한 목적은 모릅니다. 하지만.”
아테나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마 알아낸 사실은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가 태초의 마수들을 흡수하고 힘을 키운다는 것.”
[대악마보다도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
처용의 말에 아테나가 그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수라는 병기를 만드는 데 태초의 마수의 사체가 쓰인다는 것입니다.”
[네가 산 채로 넘겨주었던 그 괴물 말이냐?]
“맞습니다.”
[하아…….]
아테나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는 얼마나 위험한 놈인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처용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위험한 정도가 아닙니다.”
아테나의 질문에 처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놈은 삼천마를 포함한 판데모니움의 모든 악마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자입니다.”
처용의 입에서 어두운 대답이 흘러나오자.
[……!]
[……!]
아테나에 이어 초대받은 성좌들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그런 존재가 태초의 마수들을 잡아먹고 더욱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처용은 이쯤 아테나에게 본론 중 하나를 이야기했다.
“태초의 마수 수색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로 인맥이 넓고 인재가 많은 올림포스 성운도 태초의 마수 수색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처용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한 아테나는.
[헤르메스.]
옆에 자리한 헤르메스를 불렀다.
그러자.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외골수인 헤라클레스도 단번에 알 수 있을 거야.]
헤르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노력해보마.]
“감사합니다. 아테나 님.”
처용이 아테나의 말에 감사를 전하자.
[네게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도움은 충분히 줄 수 있다.]
아테나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