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수련탑을 나온 처용은 우선 성지의 중턱 쪽, 수련탑과 안식전 사이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향했다.
각각 현대식 빌딩과 성역의 전각이 나란히 있는 모습.
처용은 우선 전각의 앞으로 다가갔다.
[의료(醫療)전]
의료전은 세계수가 성지에 자리 잡았을 때 만들어진 전각이었다.
내부에 기거하는 이들은 재생 속도와 회복 속도가 높아지고 저주 같은 디버프도 서서히 사라진다.
말 그대로 치료와 회복에 특화된 전각이었다.
처용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 오셨군요.”
의료전 안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이종국이 처용을 반겼다.
“새로운 병원은 마음에 드시나요. 원장님?”
처용이 이종국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그를 향해 ‘원장’이라고 불렀다.
성지의 전각인 의료전과 그 옆에 세워진 현대식 병원 건물.
이는 처용이 협회장에게 건의하여, 협회에서 새로 추진하는 사업의 결과물이었다.
이종국의 꿈이기도 했던, 현대식 의료 기술과 헌터들이 사용하는 스킬의 조화.
협회장은 처용이 제시한 아이디어가 추후 미래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제가 과연 자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처용 헌터.”
이종국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자신은 의사면허조차 박탈된 사람이었으니까.
“저와 이 성지의 신들께서 당신을 ‘의사’로 인정했습니다.”
처용은 그런 이종국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강하게 말했다.
“감히, 성지를 향해 항의하러 오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 마음 놓고 활동하셔도 됩니다.”
처용이 협회 측으로 항의를 했던 멍청이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이종국을 곱게 보지 않는 의사 협회에서 협회장에게 항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만이 있으면 한처용 헌터에게 직접 찾아가 말하십시오.
협회장은 단 한 마디로 그들의 불만을 정리해 버렸다.
처용은 이미 세계에서 떠들썩할 정도로 잘 알려진 상태였다.
성좌의 화신체조차 힘으로 진압해버리는 헌터.
처용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자신을 방해하는 이는 성좌라 할지라도 힘으로 치워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의사의 권위를 내세우며 항의할 순 없었다.
처용이 그 말에 따를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협회장은.
-한처용 헌터가 무슨 짓을 하든 저희는 그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도 않을 테고요.
세계의사협회를 향해 진심으로 경고를 전달했다.
처용을 함부로 방해한다면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
이렇게까지 경고를 받은 이상 세계의사협회는 이종국의 견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그를 더 심하게 견제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종국이 커맨더와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커맨더는 S급 헌터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커맨더보다도 더 유명한, 아니 더 악명이 높은 처용이 이종국의 뒤를 봐주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 사람들도 여기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종국이 처용의 말에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계의사협회에 의해 제지를 받은 이는 이종국만이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권력 놀음을 한다며 항의하던 이종국의 동료 의사들.
이종국에게 도움을 받았던 헌터들과 그의 지인들.
그리고 이종국처럼 가호를 받아 각성한 의사들.
이들 모두 세계의사협회에 의해 면허를 박탈당하거나 제지를 받은 이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성지에서 근무하는 이들이니만큼.
피해자 중에서도 태민과 이종국에 의해 엄중히 선별된 이들이었다.
“기회를 주신 만큼 확실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이종국이 처용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하하, 기대하겠습니다.”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의료전을 빠져나왔다.
의료전의 관리인에는 이종국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현대 의료 기술과 헌터들의 스킬을 조화하는 연구 역시 추후 미래에 많은 도움이 된다 생각했다.
의료전을 나온 처용은 바로 수련탑으로 향했다.
‘더 늦기 전에 약속을 지켜야겠지.’
회귀 전, 처용에게 조화경의 힘을 깨닫게 도와준 화가.
그와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성지의 수련탑 안으로 들어가자 커맨더와 백호를 제외한 이들이 모두 자리해 있었다.
커맨더와 백호, 협회장은 아직도 세계 헌터 회의를 이끌고 있었으니까.
방해될 만한 요소를 처용이 전부 정리해 준 덕분에, 커맨더는 회의를 순조롭게 이끌고 있었다.
처용은 마침 수련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금발 머리의 여성.
힐러이자 저격수인 샬럿에게 다가갔다.
“으음?”
처용이 다가오자 샬럿이 의문 섞인 음성을 흘렸다.
그가 먼저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처용은 그녀에게 볼일이 있었다.
샬럿이 바로 연옥에서 은혜를 입었던 화가의 부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샬럿 씨.”
“아, 네. 한처용 헌터.”
처용의 말에 샬럿이 의문을 담아 대답했다.
근처에 있던 이들 역시 작은 의문을 표하는 분위기였다.
처용은 아공간을 열어 샬럿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녀에게 건넨 것은 1미터가 조금 안 되는 크기의 그림 액자였다.
그 액자 안에 그려져 있는 두 명의 인물.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심하게 파마가 진 머리의 노인.
그런 그가 안아 올리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금발의 어린 소녀.
소녀가 손에 꼭 쥐고 있는 해바라기와 주변 환경을 형형색색 꾸며주고 있는 꽃밭.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과 해바라기를 꼭 쥐고 환하게 웃는 소녀.
마치,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녀를 보는 듯한 그림이었다.
“이야! 그림이야?”
이진호를 시작으로 그림을 본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 이 그림…….”
“잠깐! 이거 움직이는데?”
그림을 구경하던 윤아와 연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 말대로 그림은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듯 그림 속 인물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 꽃밭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속성 마나를 뭉쳐 그린 그림이니까.”
처용이 두 소녀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한 번 이들의 눈앞에서 시범을 보인 적도 있는 기술이었다.
액자 판을 처용이 직접 제작한 후.
그 위에 보석 가루들과 속성 마나들을 뭉치고 바르며 제작한 그림이었다.
시간이 날 때, 생각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마지막에는 그림 속에 백염부까지 부여했다.
자급자족의 힘을 지닌 백염이 그림에 깃든 이상, 이 그림은 반영구적으로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소녀…….”
이진호가 그림 속, 환하게 웃는 소녀를 응시하고는.
“……샬럿?”
몇 년을 함께 한 파티원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말했다.
마치 샬럿의 어린 모습을 상상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모두가 그림을 보며 감탄과 의문을 가질 때.
“…….”
그림을 받은 당사자인 샬럿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림을 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처용을 향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을 던졌다.
“제가 미스터 밥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용은 샬럿의 질문에 작은 미소를 짓고는 회귀 전 인연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한 가지 미련이 있네, 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내가 떠나버렸거든…….
연옥에 있을 당시 그가 슬픈 눈을 일렁이며 했었던 말이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나? 친구.
처용은 그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었다.
그러나 연옥에서 돌아온 처용은 그의 부탁을 이루어 줄 수 없었다.
미스터 밥이 이야기한 그의 손녀, 샬럿 로스.
커맨더의 파티원이기도 했었던 그녀는 이미 제니퍼 로스차일드에게 살해당한 이후였다.
원거리에서 아군을 저격하던 제니퍼를 저지하려다가 당한 것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기 전에…… 그년의 신관도 죽여 버려야 한다.’
처용은 은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든 제니퍼 로스차일드를 떠올렸다.
악신 아르테미스의 명령에 따라 온갖 잔혹한 짓들을 저지르던 배신자.
지금쯤 마인들과 함께 하고 있을 그녀도 추기경과 마찬가지로 기회가 보이는 즉시 죽어 버려야 했다.
처용이 제니퍼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하지만…… 할아버지는 20년 전에…… 어떻게?”
샬럿이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건 거의 20년이 되어갔으니까.
처용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자신과 비슷한 20대의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언제 어떻게 조부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처용이 어떻게 이 그림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그림은 할아버지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었으니까.
처용은 샬럿의 의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제가 악마들과 싸우다가 함정에 빠져 사후세계에 떨어졌을 때, 조부님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회귀 전 상황과 연옥을 그럴듯하게 꾸며 말했다.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말할 수 없다는 처용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샬럿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곳에 머무르며 처용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다른 헌터들이 지구에서 몬스터들과 싸울 때.
처용은 판데모니움이라는 세계에서 악마들과 싸워 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그때 있었던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샬럿이 떨리는 목소리를 바로잡으며 처용에게 감사를 전했다.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볼일을 마친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때.
“저…… 여기가 원래 사찰이었던 곳이죠?”
그림을 품에 안은 샬럿이 처용을 향해 물었다.
“신을 모시는 성지이니, 지금도 사찰이 맞습니다.”
처용이 샬럿의 말에 답하자.
“이걸 여기에 맡기고 싶어요.”
샬럿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처용에게 건넸다.
그녀가 건넨 것은 화가들이 사용하는 그림 도구 세트였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셨던 거에요.”
샬럿은 자신이 항상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던 물건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할아버지의 염원…… 그리고 저의 소망을 이루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물건, 잘 보관하겠습니다.”
처용은 샬럿이 건넨 그림 도구 세트를 받았다.
수련탑을 나온 처용은 샬럿이 건넨 물건을 들고 산신각으로 향했다.
그녀에게서 그림 도구 세트를 받은 순간 이 장소가 떠올랐다.
산신각은 종종 고인의 염원이 담긴 물건을 산신들의 석상에 올리기도 하던 장소였으니까.
산신각 내부에서 석상들을 둘러본 처용은 가장 안쪽에 있는 황룡의 조각상으로 향했다.
처용은 황룡 조각상 앞에 그림 도구 세트를 내려놓고는.
“명환부-감싸는 빛.”
물건이 상하지 않도록 그 위에 결계를 덧씌웠다.
동시에.
‘연옥을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당신의 소망, 꼭 이루길 바라겠습니다.’
회귀 전, 자신을 도와준 은인을 향해 속으로 작은 기도를 올렸다.
처용이 뒤를 돌아 산신각을 나간 순간.
-우웅.
황룡 조각상 앞에 놓인 그림 도구 세트가 찰나의 순간 금빛으로 일렁였다.
***
일주일이 넘게 걸린 세계 헌터 회의가 모두 끝나자.
“어휴, 드디어 끝났네.”
커맨더가 성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후배가 분위기를 잡아 준 덕분에 결과가 나름 성공적이었어.”
세계 헌터 회의의 결과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항상 방해를 일삼던 추기경이 야훼에게 축객령을 당했다.
거기에 성좌 중 배신자가 나온 천교 역시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분위기.
커맨더는 처용이 만들어준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선, 이 성지에 이종족들이 거주하는 것에 반박하거나 반대하는 이는 없었어.”
“WHU의 꼰대들도 가만히 있던가요?”
처용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WHU 총장 존 스미스는 헌터 출신답게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듯 보였지만.
WHU의 자금줄과 여러 인맥을 맺고 있는 고위 관료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니까.
심지어 그들은 교단의 강경파처럼 커맨더를 견제하던 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그 노인네들이 너를 엄청 신경 쓰고 있더라.”
커맨더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노망난 멍청이들이 네게 제재를 가해야 한다 지껄이는데…….”
“크크, 무슨 수로?”
처용이 커맨더의 말을 듣고 비웃음을 흘리자.
“하아, 내 말이…… 그 멍청이들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데.”
커맨더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너는 WHU 소속도 아닌데 말이야.”
모든 S급 헌터와 고레벨의 A급 헌터들은 WHU에 소속되어 있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화합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본래라면 처용 역시 WHU에서 가입 권유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세계 헌터 회의에서 처용이 대형 사고를 일으켜 버린 상황.
WHU 내부에서는 처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아직도 논의 중이었다.
분위기를 유심히 지켜본 커맨더는 WHU 고위 관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전에 강수를 두었다.
“여차하면 내가 WHU를 탈퇴하고 완전히 등을 돌려 버린다고 해 버렸거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급 헌터가 WHU를 탈퇴한다니?
당연히 WHU 고위 관료들은 난리가 났다.
헌터로서 책임감이 없다는 등, 이기적이라는 등 커맨더를 거칠게 비난했다.
그러나.
-대악마가 나타난 상황에서도 자기 이득과 고집만 내세우는 WHU와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커맨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생각 똑바로들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WHU를 탈퇴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아무리 이득에 눈이 멀었어도 커맨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커맨더가 WHU를 탈퇴하는 순간, 그의 파티원들을 시작으로 고레벨 헌터들이 줄줄이 나갈 것이다.
WHU를 구성하는 가장 큰 축은 바로 ‘강력한 헌터’들이었다.
그런 헌터들이 대거 빠져나간다?
그것은 WHU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커맨더가 WHU 탈퇴라는 강수를 두자.
“올림포스와 동방불패 길드가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제시카와 하오찬 역시 WHU의 행태를 지적하며 커맨더를 지지했다.
그들 역시 여차하면 길드 전체가 WHU를 나가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
“스미스 씨에겐 미안하지만, 뭐 두 손 들어야지 어쩌겠어.”
커맨더가 중간에서 고통받는 존 스미스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WHU가 방해할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말을 잇던 커맨더가 처용을 보며 잠시 말을 끊고는.
“너한테 이명(異名)이 생겼더라.”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명이요?”
처용이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눈앞에 있는 임유진 헌터.
그의 이명이 ‘퍼팩트 커맨더’였기에 그는 이름보다 커맨더라고 주로 불리곤 했다.
그런 커맨더처럼 처용에게도 이명이 생겼다.
“뭐라고 부르던가요?”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역천군주(逆天君主)…….”
커맨더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버로드(Overlord) 라고 부르더라.”
커맨더의 말을 들은 처용은.
“역시…… 그 이미지가 강했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음에 드네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