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처용의 협박이 울려 퍼지자 투표를 선언해야 하는 스미스는.
“…….”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뇌하고 있었다.
방금 처용의 말로 여론이 찬성 쪽으로 돌아서는 듯 보였지만.
“……이이!”
“……이런.”
몇몇 사람들, 특히 왕저우와 추기경의 표정을 보니, 저들은 이런 분위기에서도 증인 출석에 반대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저 중앙에 있는 괴물(?)이 날뛰는 것은 자명한 일.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작은 희망을 가지고 커맨더를 슬쩍 바라봤지만.
“…….”
그 역시 증인 출석에 반대표를 던지려는 이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처용을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소말리아 사태에 버금가는 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커맨더는 추후 협상을 통해 멈출 수라도 있었다.
그는 애초에 선한 인물이었고 인간의 악의로 인해 폭주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한처용은 커맨더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성좌의 화신체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인간.
한처용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자였다.
그의 성좌는 그를 만류할 수 있겠지만.
[…….]
한처용의 성좌로 보이는 신은 계속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마치, 처용이 원하는 대로 날뛰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처용이 제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면……?
소말리아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스미스가 이마를 부여잡고 세차게 고민할 때.
“교단 소속 전원! 증인 출석에 찬성하십시오!”
성자가 휘하 길드원들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렇게 저 이단자에게 끌려다니기만 할 겁니까? 성자!”
추기경이 성자를 향해 윽박을 지르며 소리쳤다.
“그 불경한 놈들을 인류를 위한 이 자리에 절대로 끌어들일 수 없소!”
성자는 그런 추기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무엇이 중요한지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교리를 따지는 겁니까? 추기경!”
“교리보다 중요한 건 없소! 성자!”
그럼에도 추기경이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가려는 태도를 보이자.
“증인 출석과 교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추기경!”
결국, 성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명령입니다! 교단 전원! 증인 출석에 찬성합니다!”
성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추기경과 그를 따르는 교위 사제들을 보며 명령했다.
“교단의 왕처럼 군림하지 마시오! 성자!”
“당신의 고집 때문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정녕 모르는 겁니까!?”
추기경과 성자의 마찰이 커질 때.
[모두 찬성에 표를 던져라.]
야훼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하, 하지만 빛의 신이시여…….”
추기경이 당황한 듯 말했다.
설마 야훼가 직접 나서서 성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저희의 교리를 짓밟는 저 이단자의 요구를 마냥 들어줄 수는-!”
추기경이 포기하지 않고 야훼를 향해 간청하듯 말했다.
그는 야훼를 설득하고 처용과 빛의 신을 대치시킬 생각이었다.
아무리 처용이 강하다 해도 ‘대신’급의 성좌 앞에서는 물러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이야…… 그렇게 받들어 모시던 신의 말씀도 거부하고 교리를 지키겠다?”
추기경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야훼는 자신의 세력이 대악마와 엮이는 것만큼은 극도로 혐오하는 신.
물론, 그가 전원 찬성하라며 직접 명령을 내릴 줄은 몰랐지만, 처용에게는 좋은 상황이었다.
처용은 당황하는 추기경을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해주지, 귓구멍 파고 잘 들어.”
길드들을 쭉 둘러보며 진지하게 경고했다.
“이번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는 길드에게는 내가 친히 성전을 선포할거야.”
처용의 직설적인 경고가 울릴 때.
“적당히 하시오! 한처용 헌터!”
파라오 길드 쪽에서 누군가가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붉은색과 금색의,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
태양신 라의 신관이자 파라오 길드의 길드장, 라진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서 어찌 폭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오!”
[라진!]
라가 자신의 신관을 만류하려는 듯 말하려는 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태양신이시여.”
라진이 처용을 응시하며 자신의 성좌에게 말했다.
처용은 주변에서 불안한 눈빛을 받는 라진을 잠시 응시하고는.
“태양의 군주.”
그의 클래스를 언급하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여기가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 맞아.”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리 막 나가는 것이오!”
“‘미래’를 논하는 자리이니까!”
라진의 말에 처용이 ‘미래’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하게 대답했다.
“대악마와 협력하는 놈들과 인류의 미래를 논하면 그 미래가 참 잘도 굴러가겠다!”
“그래도, 이런 방법은 아니오. 잘못되었소!”
라진은 처용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만약 자신에게 저런 무력이 있었다면 절대 이런 방법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잘못되었으면 뭐 어떻게 해야 정답인데?”
처용이 라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악마들과 협력하는 놈들에게 부탁이라도 해 볼까? 제발 자수하고 회개하라고?”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이오!”
“확실하니까.”
라진의 말에 답한 처용의 시선이 왕저우에게로 향했다.
“그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까지 준비했는데…….”
처용의 시선이 천교에서 교단 쪽, 추기경에게로 돌아갔다.
“별 같잖은 이유로 증인 출석을 막는다? 반대하는 놈들이 정말 아무 목적도 없을까?”
“…….”
처용의 말에 라진이 침묵하고는 추기경과 왕저우를 짧게 번갈아 바라봤다.
그들은 아직도 서로 불안한 눈빛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궁금하면 그냥 지켜봐라. 내 말이 헛소린지, 아닌지를!”
추기경에게서 눈을 돌린 처용이 다시 라진을 마주하며 말했다.
라진은 처용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고는.
“파라오 길드 전원은 증인 출석에 찬성표를 던진다.”
휘하 길드원들을 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라진은 처용의 말대로 그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한처용은 그저 통제가 불가능한 괴물이자 폭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선봉장인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 라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라이트닝 워리어는 전원 찬성으로…….”
“우리 역시…….”
“저희 길드도…….”
각 길드의 길드장들이 모두 찬성할 것을 휘하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길드가 증인 출석을 찬성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이이!”
끝까지 반대표를 고수하던 추기경의 얼굴이 세차게 일그러졌다.
마찬가지로 증인 출석에 반대하려던 왕저우와 타친핑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때.
[천교의 속한 병사들은 전원 찬성에 표를 던져라.]
옥황상제가 1층의 이들을 바라보며 위엄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사, 상제.]
이랑진군이 불안감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 한번 보자구나.]
옥황상제는 그런 이랑진군을 무시하고 처용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작게 말을 이었다.
[저놈이 무엇을 증명할지를…….]
다른 길드들에 이어 천교까지 전원 찬성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처용은 찬성을 명령하는 옥황상제를 찰나의 순간 바라봤다.
그리고.
‘……저놈 설마?’
속으로 놀람을 삼키며 방금 든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혹시나?’ 하는 느낌에 불과했지만.
그가 회귀 전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에덴의 속한 모든 이들도 이번 안건에 찬성한다.]
주변의 분위기를 관찰하던 메타트론도 1층의 저스티스 길드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하늘의 서기관이시여.”
라리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두가 찬성으로 의견이 좁혀질 때.
“이이!”
추기경이 발악하듯 몸을 떨며 분노 섞인 침음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이단자에게 끌려가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네놈은 이 자리에서 꺼져라.]
야훼가 추기경을 노려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비, 빛의 신이시여…… 그게 무슨-!?”
당황한 추기경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는 놈은 필요 없다!]
야훼는 그런 추기경의 말을 자르며 강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속으로 미소를 감추었다.
‘야훼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추기경.’
오만하고 거만한 빛의 신.
그는 휘하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예외로 단 한 명, 그의 신관인 성자의 의견만큼은 듣는 편.
성자와 야훼가 평소 어떤 관계인지 어떤 분위기인지는 잘 몰랐지만.
회귀 전에도 야훼의 명령에 성자가 그를 여러 번 설득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유일하게 빛의 신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
추기경이 그런 성자와 대치하는 이상, 그가 이 자리에서 야훼를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빛의 신이시여.”
추기경이 분노를 감추고 야훼에게 고개를 숙이며 회의장을 나갔다.
회의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추기경의 표정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추기경은 누구보다도 교리에 열혈이 충성한 자신을 빛의 신이 내쳤다고 생각했다.
교리를 들먹여 자신의 이득만을 취한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동시에 이런 상황을 만든 처용에게 증오가 솟구쳤다.
‘놈은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신을 때려눕히는 처용에게는 어떤 수단도 먹히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놈의 주변을 노리는 수밖에!’
잔혹한 미소를 지은 추기경이 목에 걸린 새하얀 보석이 장식된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그들에게 협조를 구해 봐야겠군.’
추기경이 목걸이에 신성력을 주입하자.
-스르르.
새하얀 보석이 찰나의 순간 검은빛으로 일렁였다.
***
추기경이 야훼의 축객령을 받고 회의장을 나가자.
‘곧 터지겠군.’
처용은 추기경이 나간 자리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추기경이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훤하게 예상이 되었다.
‘나를 직접적으로 노릴 수는 없을 테니…….’
아마도 자신의 주변인을 노리지 않을까?
추기경의 비열한 성향으로 볼 때 거의 확실했다.
동시에 그가 절대로 혼자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처용이 추기경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증인 출석에 대한 안건이 빠르게 통과되었다.
“커맨더, 증인을 부르시죠.”
스미스가 커맨더를 향해 말하자.
-파지지직!
커맨더가 군단을 소환할 때 사용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이는 피해자 이종족들 중 유일한 하이 엘프였던 리카였다.
“예상보다 늦었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리카가 커맨더를 향해 말하자.
“일이 살짝 꼬일 뻔해서 말이야.”
커맨더가 리카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카가 나타나자.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가?]
세계수의 화신체가 몸을 일으켰다.
본래 그녀는 화신체 상태에서는 말을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했지만.
성지, 태룡사에 뿌리를 박고 또 하나의 거대한 육체를 가진 지금, 화신체의 능력이 상승한 상태였다.
몸을 일으킨 세계수가 리카를 데리고 회의장 중앙, 처용의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가장 오래된 자연신인가?]
[저 하계종은 저 자연신의 아이들이었군.]
몇몇 성좌들이 세계수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자연신은 신수, 신목 등 자연 생명체가 정수를 쌓아 신격을 얻은 이들을 뜻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들 역시 후천적 신격으로 분류되었다.
세계수는 그런 자연신들 중 가장 오래된 존재로 알려진 신이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자연신이라 해도 후천적 신격.
그런 그녀를 향한 존중은 선천적 신격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세계수는 그런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고.
[지금부터 이 아이가 겪은 일을 내가 직접 보여줄 거야.]
다른 신격들을 향해 본론을 이야기했다.
세계수는 자신의 권능 중 하나인 ‘뿌리의 기억’에 대해 설명했다.
엘프들 중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진화한 하이 엘프와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는 권능이었다.
이전 테시아가 명상에 들어 세계수와 소통한 것도 같은 권능이었다.
세계수가 말을 끝내자.
“준비는 끝났습니다.”
커맨더가 세계수, 리카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의 옆에는 작은 인공위성과 비슷한 기계장치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커맨더가 전장의 상황을 살피거나 첩보활동을 할 때 활용하는 옵저버였다.
세계수가 커맨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작하겠다.]
리카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권능을 발동했다.
동시에 세계수가 뻗은 뿌리 하나가 커맨더의 옵저버에 닿았다.
-삐리리.
옵저버가 마치 무언가의 신호를 받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지이잉!
안테나에 빛이 일렁이며 허공에 어떤 영상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너, 너 뭐야!
-크흐흐, 하이 엘프인가? 게다가 어린 개체! 이거 횡재했군.
옵저버가 출력하는 영상은 세계수가 권능을 통해 보고 있는 리카의 기억이었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당황하는 리카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공격하는 검은 가면의 남자.
-네년을 잡아가면 보수가 더 많아지겠어. 하하하!
손아귀에서 새하얀 번개를 내뿜는 그는 이랑진군의 신관, 왕저우였다.
리카는 나름 잘 버티는 듯 보였지만 그녀는 아직 하이 엘프로 진화한지 얼마 안 되었었다.
왕저우에게 점차 밀린 그녀가 도주하려는 때.
-촤라라라라!
뒤에서 새하얀 사슬이 그녀를 급습했다.
-넌!?
기습을 당한 리카의 시야에 눈에 초점이 사라진 성녀의 모습이 잡혔고.
-쿠쿵!
그녀의 시야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동시에.
-이건 내가 잡은 거다!
-감히! 나한테 소리치는 것이냐? 하계종!
-이런 성좌님이셨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가 울렸다.
그때.
-하이 엘프라니! 이런 희소한 개체를 잡을 줄이야!
엎어진 리카의 시야에 검은 로브를 쓴 마인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
“A급 마인이군.”
처용이 그를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붙잡힌 리카를 바라보며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 마인.
그는 마수 실험을 총괄하던 소장이라 불리는 마인이었다.
-보수는 아주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왕저우 씨.
소장이 왕저우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당장 약을 내놓아라! 악마의 하수인!
-여기 있습니다.
성녀, 아니 그녀의 몸을 조종하는 라구엘에게 판테라움을 넘기는 모습까지 드러났다.
-안 그래도 커맨더…… 그 같잖은 반도인 새끼가 설쳐대는 꼴이 보기 싫었는데.
-으윽!
왕저우가 리카의 머리를 짓밟으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네년이 망가진 모습을 보면 그 새끼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크크. 크하하하!
잔혹한 왕저우의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리카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이윽고.
-지이이…….
옵저버가 영상 출력을 마쳤다.
리카가 겪었던 모든 일이 드러나자.
“이, 이!”
사람들, 성좌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왕저우가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