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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170화 (170/726)

#170화

처용과 커맨더가 제시카를 따라가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오랜만이군. 전 성수의 기사 한연화.”

교단의 헌터들을 이끄는 누군가가 연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성역의 사제들보다 더 화려한 로브를 입은 60대로 보이는 남자.

“빅터 추기경.”

연화는 적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사에 대한 예의도 없나? 건방진 년.”

빅터 추기경이라 불리는 교단의 고위직 헌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너 같은 새끼를 상사로 뒀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한텐 치욕이었어.”

연화가 빅터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을 내뱉었다.

“무, 뭐라!?”

예상하지 못한 연화의 반응에 빅터가 당황했다.

본래 교단에서 생활할 때의 연화는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주어진 일에 토 달지 않고 묵묵히 열심히 하는 사람.

간단하게 말해서 부려먹고 다루기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더 이상 빛의 신에게 미련 따위 없어.”

연화는 교단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격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교단의 헌터들과 빅터 추기경이 간과한 사실.

연화는 교단에서 당한, 특히 눈앞의 추기경에게 당한 일을 아직도 많이 참고 있다는 것.

그리고.

“왜? 그 잘난 빛의 신이 날 다시 데려오라고 독촉하기라도 했나?”

그녀는 처용의 누나, 처용과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것.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받는 상황에서는 처용과 비슷한 성격이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연화가 추기경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

-나 해전무신이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성좌인 해전무신이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만한 빛의 병사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감사합니다.’

연화는 해전무신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기경을 노려봤다.

“S급 헌터가 되었다고 하늘이 높은 줄 모르는구나, 한연화!”

연화의 날선 반응에 빅터가 인상을 쓰며 고함을 질렀고.

그 뒤에 자리한 교단의 헌터들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교단으로 복귀해라. 한연화!”

빅터가 연화를 압박하듯 윽박을 지르며 말했다.

“버려진 네년을 거두는 빛의 자비에 감사를-!”

그때.

“지랄하네, 미친 새끼들이!”

더 참다못한 이진호가 연화의 앞으로 나서며 빅터와 마주했다.

“사람이 물건이야? 먼저 쫓아내 놓고 자비? 교단이 이 정도로 생각 없는 병신들이었나?”

그간 성지에 체류하며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이진호였다.

그 역시 연화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연화에게 시비를 거는 교단의 추기경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말조심해라. 이진호!”

“감히 교단을 모욕하다니!”

이진호가 개입하자 빅터의 뒤에 자리한 교단의 헌터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시비 걸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라.”

-파지직!

백호가 옅은 전류를 방출하며 이진호 옆에 섰다.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이진호에 이어 백호 그리고.

-철컥!

연화의 옆에 서서 아티팩트의 노리쇠를 장전하는 샬럿까지.

처용과 같이 온 일행들이 모두 연화의 옆에 서며 교단과 대치했다.

무려 170레벨이 넘는 헌터 둘에 이어 다른 이들까지 합세하자.

“이런…….”

“추기경 님.”

교단의 헌터들이 기세에 밀려 침음을 내고 추기경을 불렀다.

추기경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감히! 빛의 신의 자비를 거부하는가? 한연화!”

이 상황에서 추기경이 선택할 방법은 빛의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뿐.

그러나.

“먼저 날 버린 건 빛의 신이다.”

연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뿐더러.

“머저리들.”

그녀는 이제 빛의 신을 우러러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빛의 신을 증오하고도 남는 입장이었다.

“감히 빛을 모욕하다니!”

WHU 사무국 내부의 모든 시선이 모이기 시작하고 교단과 연화 간 대치가 계속될 때.

“우리를 먼저 건들지 말라고.”

처용이 개입하며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성자가 말하지 않았나 봐? 추기경.”

“넌!?”

추기경은 다가오는 남자 옆에 있는 커맨더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한처용…….”

“성자의 명령조차 안 듣는 거 보면, 야훼의 병사들은 어지간히도 멍청한가 봐?”

처용은 추기경과 교단의 반응은 무시하고 비웃음을 섞어 할 말을 계속했다.

“감히! 빛의 신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

“어이, 머저리들.”

추기경의 말을 자른 처용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쾅!

처용이 아공간에서 차륜 도끼를 꺼내 보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 그건!?”

“대악마의!”

추기경과 함께 있는 몇몇 헌터들이 차륜 도끼를 알아봤다.

그들은 디아블로가 나타났을 때, 성자와 같이 있었던 헌터들이었다.

“지금 당장 대가리 돌리고 꺼지지 않으면…….”

처용은 추기경을 향해 말하면서.

-화르륵!

차륜 도끼에 화염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네놈들을 지옥 속에 처박아 버릴 거야.”

-화르르르!

도끼날에 붙은 화염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자.

“으…….”

“그런…….”

교단의 헌터들, 특히 디아블로와 마주했었던 이들이 크게 물러났다.

처용이 다루는 화염을 보고 디아블로가 상기된 것.

“감히! 악마의 힘을 다루다니!”

그 모습을 본 추기경이 신성력을 뿜으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아,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철컥!

커맨더가 처용의 옆으로 다가와 권총 아티팩트를 꺼내 장전했다.

“여기서 한판 뜰래? 아니면 그냥 조용히 꺼질래?”

장전한 아트팩트를 추기경의 머리에 겨눈 커맨더가 말을 이었다.

“선택해라. 빅터 추기경.”

“이! 이! 이단자 놈들이!”

사무국 내부에서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위험한 대치가 계속될 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번쩍!

대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빛이 모이더니, 백발의 남성이 나타났다.

“빅터 추기경!”

난입한 성자가 빅터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성자의 분노 섞인 말에도 빅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빛의 계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성자.”

그 역시 ‘신의 명령’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니까.

“저는 그 어떠한 계시도 받지 못했습니다.”

성자가 빅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하자.

“……사실입니다. 성자.”

빅터는 성자의 말에 작은 두루마리 같은 것을 내밀며 속으로 웃었다.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물론, 자신이 추기경의 권한으로 빛의 신을 영접하여 받아낸 계시이긴 했지만…….

신의 명령은 신의 명령, 제아무리 성자라 해도 거부할 수 없다 생각했다.

안 그래도 제 아들보다 한참 어린 성자가 수장의 자리에서 설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이번 기회에 성자의 기세를 한풀 꺾어내나 싶었지만…….

“성자의 권한으로 계시를 거부하겠습니다.”

성자의 입에서 ‘신의 명령을 거부한다.’라는 말이 나오자.

“무, 무슨 소리를!?”

빅터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빛의 계시입니다! 감히 계시를-.”

“왜 이런 계시를 내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성자는 추기경의 말을 자르고 매섭게 다그치며 말했다.

“다른 성좌의 신관을 교단으로 복속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래 봐야 인간 출신의 하급 성좌입니다. 감히 빛의 교리에-.”

“추기경!”

추기경의 말을 자른 성자가 싸늘하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입니다. 물러나세요.”

예상하지 못한 성자의 반응에 추기경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

“후회하실 겁니다. 성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휘하 사제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처용은 그런 성자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냥 제 손에 죽게 두지 그랬습니까?”

빅터의 뒷모습을 살기를 담아 노려보며 말했다.

“…….”

성자가 침묵하자.

“하아. 성자.”

그 모습에 처용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저놈은 당신 목에다 칼을 꽂을 겁니다.”

답답한 마음에 대놓고 추기경이 배신할 거라 말했다.

아니…… 그는 이미 교단을 ‘배신한 상태’였다.

그 사실을 성자가 알고 있을지, 인지만이라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경고할 필요는 있었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순간…….’

처용은 기회가 있다면 빅터 추기경을 죽이고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찾아오기 전에 성자가 잘못된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는 야훼를 억제하고 교단을 통제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미안합니다.”

성자는 처용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사과부터 건넸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한연화 씨.”

연화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는 사과를 전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성자.”

연화는 아무 감정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성자의 말에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성자가 연화를 향해 작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

연화는 그런 성자의 말에 침묵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성자가 막아주지 않았기에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가 뒤늦게나마 연화를 위해 움직였다고는 해도, 결국은 바로잡지 못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성자를 향해 소리치듯 묻고 싶었다.

왜 그때 막아주지 못했냐고.

가장 청렴해야 할 교단이 지저분한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냐고.

성자로서 왜 이것들을 바로잡지 못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교단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성자가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전했다.

연화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기에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차마 쏟아낼 수 없었다.

성자에게 고개를 돌린 연화가 사무국을 나갔다.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진 일행들 역시 연화를 따라 사무국을 나갔다.

“만약, 내일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일행들을 따라 나가려던 커맨더가 뒤를 돌아 성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땐 저도 한처용 헌터를 말릴 수 없습니다. 아니, 말리지 않을 겁니다.”

커맨더는 성자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처용만이 아닌 자신 역시 화가 폭발할 테니까.

“후, 노력해 보겠습니다. 커맨더.”

성자는 힘이 빠진 듯,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커맨더가 나가자 성자가 눈을 뜨고는.

“당장 회의에 참석하는 교단의 모든 사제들을 소집하세요.”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위 사제 중 하나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성자님.”

사제가 성자의 말에 대답하고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성자 역시 굳은 표정으로 교단의 헌터들이 체류하는 숙직실로 향했다.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지만…….’

설마 추기경이 계시를 받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고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 것도 막아야 했다.

-더 잘 아시겠지만, 야훼는 손해를 보는 것을 죽도록 싫어합니다.

처용의 성지를 찾아갔을 때, 그가 했었던 말이었다.

그가 해준 조언 덕분에 빛의 신을 설득할 수는 있었다.

내일 있을 회의에서 빛의 신은 처용을 향해 공격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추기경을 포함한 교단의 강경파들이었다.

그들은 처용을 견제하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 결과가 처용을 적대하는 것만이 아닌, 커맨더까지 적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하아.”

답답한 한숨을 내쉰 성자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작금 일어난 상황을 멀리서 지켜본 이들 역시 발걸음을 돌렸다.

“올림포스 길드장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멀리서 처용을 지켜보던 파라오 길드의 길드장, 라진이 중얼거렸다.

“한국의 두 번째 S급 헌터는 커맨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사람이 아니었군.”

라진은 조금 전, 추기경을 향해 무력을 드러내던 처용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용이 보인 모습은 단순히 협박이 아니었다.

분명한 ‘살의’가 느껴졌다.

여차하면 추기경과 그를 따르는 사제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일 듯 보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판단하여 개입할까 했지만.

-우선 지켜보거라.

헬리오폴리스 성운의 주신, 태양신 라가 라진을 말렸다.

라진이 처용에 대해 생각할 때.

“무, 무서운 사람이에요.”

옆에 있던 죽음의 신관, 아일라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죽음의 신관만이 가진 고유 스킬, ‘영혼을 보는 눈’이 있었다.

말 그대로 대상의 영혼을 관찰하는 스킬.

아일라는 그 스킬을 사용해 영혼의 강함이나 악함, 선함 등의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기운은……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함이었다.

스킬을 발동하여 단 1초를 바라봤을 뿐이었지만, 그 결과 아직도 눈이 쓰라릴 만큼 아픔이 전해졌다.

무리하게 더 스킬을 유지했다면, 분명 타격을 받았으리라.

“서, 성좌하고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인간이 그런 기운을…….”

“신력을 개화한 사람이라고 태양신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아일라의 말에 라진이 진지하게 답했다.

성좌인 라 역시, 신관인 라진을 통해 처용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함부로 혈선의 신관을 적대하는 것은 좋지 않은 듯 보이는구나.

헬리오폴리스 성운의 주신이 진지하게 경고를 전했다.

‘혈선…… 한처용의 성좌 때문입니까?’

라진이 자신의 성좌를 향해 진지하게 묻자.

-맞다. 나도 지금 당장은 저 아이를 어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라가 라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흠…….”

성좌의 대답을 들은 라진이 침음을 흘렸다.

라에게서 듣기로 처용의 성좌는 한때 신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는 신이었다.

전부를 이야기 해주지는 않았지만, 성좌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듯 보였다.

“저승문 수호자께서도 그를 자극하지 말라고 하세요. 오라버니.”

죽음의 신관 아일라가 자신의 성좌의 이명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녀 역시 모시는 성좌에게서 경고를 전해 들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세계 헌터 회의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어.”

파라오 길드원들이 모인 곳으로 향하던 라진이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일로, 그리고 내일 있을 회의에 대비책으로 길드원들과 의논해야 할 말이 많았으니까.

비단 파라오 길드, 라진만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처용을 지켜봤었던 크고 작은 성운의 길드들이 모두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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