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성지에 방문했던 천문은 다시 무신전으로 돌아갔다.
반면에 언문은 당분간 성지에 체류하기로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협력 때문이었다.
무신전의 수장인 태무신이 태룡전의 대신들과 협력을 약속했었으니까.
언문은 곧 다가올 WHU의 세계 헌터 회의까지 성지에 있을 예정이었다.
처음 언문의 정체를 사람들이 알았을 때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곧 별일 아닌 듯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언문은 자신은 그저 성지에 방문한 손님일 뿐,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말했었으니까.
거기에 언문과 같은 역사 속 인물, 해전무신과 청룡이 종종 성지에 내려오기에 익숙해진 탓도 있었다.
그리고 언문은 지금.
“한글을 만드실 때…….”
[허허, 그 당시에는…….]
청룡의 신관, 윤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아는 모범생답게 무언가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윤아의 앞에 역사에 기록된 당사자가 나타났으니, 호기심이 폭발한 것.
언문은 그런 윤아의 질문들에 미소를 지으며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마치, 손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와 같은 분위기였다.
처용이 그런 언문과 윤아를 보며 생각에 잠길 때.
“처용 님, 성지 입구에 성자가 와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은 태민이 처용에게 다가와 말했다.
처용의 성지 아래, 넓은 강 위에 세워진 돌다리 앞에는 협회 사무소가 자리해 있었다.
외부에서 물건을 받을 때나, 직원이 성지 밖으로 나갈 때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성지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태민은 그곳에서 성자가 방문해 왔다는 연락을 받았고 처용에게 바로 전한 것이었다.
“언제 오나 했는데…… 제가 직접 가 보죠.”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산 아래로 내려가자 태민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허허, 저 친구는 곧장 환생하더니…….]
그런 태민의 뒷모습을 언문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열심히 일하는구만?]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분위기였다.
***
처용이 산 아래로 내려가자 눈에 띄는 백발 머리의 남성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한처용 헌터.”
성자가 다가오는 처용을 보며 인사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성자. 그런데…….”
처용은 성자의 인사를 받고는.
“혼자 오시라고 하지 않았나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미안합니다. 한처용 헌터.”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야스라가 가면을 벗으며 나타났다.
“제가 고집을 부려서 같이 온 겁니다.”
야스라가 처용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처용을 따라간 설녀들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까지 덧붙였다.
“으음…….”
처용은 잠시 고민하고는.
“따라오시죠.”
성자와 야스라를 성지로 인도했다.
야스라에게는 마수 실험장에서 도움 받은 것도 있었으니까.
“설녀들이 만든 거처로 이분을 안내해 주세요. 전 성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처용은 태민에게 야스라를 부탁하고 성자와 대면했다.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태룡담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 중 하나.
그곳에 세워진 정자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성자가 감탄을 섞어 말했다.
“빛의 신의 교리에 반하는 곳임에도 그리 말하는 겁니까?”
처용이 궁금한 듯 묻자.
“교리는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만들었지, 누군가를 배척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니까요.”
성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교단의 모두가 그리 생각할까요?”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성자에게 물었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으면 좋겠군요.”
짧게 침묵한 성자가 작은 슬픔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용은 그런 성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곳에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본론을 물었다.
성자는 처용의 질문에 속으로 말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침묵했다.
“……곧 WHU에서 세계 헌터 회의가 열립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저는…… 그곳에서 당신과 교단의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음.”
처용은 성자의 말에 잠시 생각하듯 침묵하고는.
“교단에서 나를, 이 성지를 노리는 놈들이 있군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처용의 말에 성자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종족들과 화합을 이루는 성지.
혈선이라 불리는 마신의 신관.
교단의 내부에서는 처용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교리에 집착하는 과격파들 사이에선 성전(聖戰)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의견은 모두 성자의 선에서 기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자라 해도, 교단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교단의 주신에게 있었다.
야훼 역시 이 성지를 곱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 성지를 욕심내고 있다는 것.
심지어 대악마와 싸울 당시, 야훼는 성자에게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를 명령했었다.
-저놈을 죽게 내버려 두고 도망쳐라!
당연히 성자는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커맨더와 처용을 도와 대악마를 막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테니까.
다행히 그 당시에는 진지하게 야훼를 설득하여 큰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막았다.
성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때.
“빅터 추기경.”
처용이 교단의 고위직 중 한 명을 말했다.
“……네?”
“그놈이 말을 안 듣지요?”
성자의 의문 섞인 말에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성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용이 딱 집어서 추기경을 말했을 때는 조금 당황했지만.
‘하긴, 애초에 교단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게…….’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제가 그놈한테 유감이 많습니다.”
“……알 것 같습니다.”
처용의 말에 성자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대악마와 싸울 때 보았었던, 전 성수의 기사.
이제는 다른 신의 신관이 되어 자신과 같은 S급 헌터가 된 사람.
그녀가 교단에서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명을 입증하지 못했기에 교단 재판에서 퇴출이 선고되었었다.
성자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조사해 봤지만…….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기에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 함정을 만든 것이 바로 빅터 추기경.
정황상 연화가 올라야 할 자리에 자신의 아들을 올리기 위해 함정을 판 것으로 추정되었다.
문제는…… 함정에 빠져 퇴출된 연화가 처용의 누이였다는 것.
처용이 충분히 원한을 가질 만한 이유였다.
성자가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할 때.
“전 당신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처용은 고뇌하는 성자를 보며 넌지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마치 교단의 상황과 그들이 처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 상대가 신이라 해도!”
“하아…… 그렇군요.”
성자는 처용의 마지막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빛의 신이 이 성지를 욕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대로 처용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성자가 눈을 감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성자.”
처용이 진지하게 성자를 불렀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듣고 야훼와 협상을 해 보십시오.”
야훼의 성격을 잘 아는 처용이 성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성자를 도와주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오만하고 욕심 많은 신 때문에 고생하는 그가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은혜를 갚는 셈이었다.
거기에 선하고 옳은 길을 가려 노력하는 사람인 성자와 싸우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교단의 교리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성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처용 헌터.”
처용의 말을 들은 성자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감사를 전했다.
“제가 감사를 받을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처용이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하하, 그럼 WHU에서 뵙겠습니다. 한처용 헌터.”
성자가 작은 웃음을 보이며 인사하고는 교단으로 돌아갔다.
***
세계 헌터 회의가 개최되기 하루 전.
“자 모두 갑시다!”
커맨더가 WHU 사무국으로 출발할 이들을 마키나로 이끌었다.
“좋네요. 며칠 전부터 비행기 티켓 끊고 준비하지 않아도 돼서.”
“하하, 이만한 전용기가 또 없지.”
처용의 말에 커맨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텔을 잡을 필요도 없어. 마키나에서 숙식하면 되니까. 그리고.”
커맨더가 이 함선에 탑승한 유일한 일반인, 협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전하기도 하고.”
“동의합니다.”
처용은 커맨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계 헌터 회의에는 초대받은 이들만이 아닌, WHU 소속원들도 함께 모인다.
각국에 자리한 헌터 협회 협회장들은 모두 WHU 소속.
한국 헌터 협회장인 황제일 역시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커맨더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
“당연하죠.”
처용이 작은 미소를 보이며 커맨더의 말에 대답했다.
“이번 회의의 목적 자체가 저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처용의 말에 커맨더가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도 대악마이지만, 그 대악마를 막아낸 처용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대악마를 막아낸 만큼, 처용을 좋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은…… 악의적일 정도로 처용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위험분자, 혈선의 신관 등.
여러 이유를 붙이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보았다.
“마음에 안 들어.”
커맨더는 처용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WHU에서 터무니없는 말들이 나온다면, 극단적인 수를 둘 생각이었다.
소말리아 때처럼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윽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WHU 사무국,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런 복잡한 절차 좀 없앴으면 좋겠는데…….”
지상으로 내려가는 승강기에 탄 커맨더가 중얼거렸다.
이번 회의가 개최될 WHU 사무국에서 참석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국에 커맨더 일행이 들어서자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주변에서 뭐라 떠들든 일행들은 사무국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참석 절차를 밟았다.
그때.
“요! 오랜만이네?”
밝고 명량한 여성의 목소리가 처용에게로 향했다.
밝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여성은 헤르메스의 신관, 메리였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커맨더. 한처용 헌터.”
메리의 옆에 있던 금발에 벽안을 지닌 여성, 제시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시카. 그리고…….”
커맨더가 제시카의 인사를 받고는.
“오랜만입니다.”
제시카, 메리와 같이 있었던 남성에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동방불패.”
커맨더가 악수를 청한 남성, 동방불패라 불린 남자가 그 손을 맞잡았다.
‘역시…… 이곳에 있었네.’
처용이 커맨더와 악수를 나누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의 3미터에 가까운 키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덩치.
황금색과 검은색이 섞인 스케일 메일 형태의 갑옷.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주 짧게 자른 머리와 강하고 굵은 인상.
등 뒤에 천으로 감싼 언월도를 매고 있는 남성.
그는 동방불패 길드장, 동방불패였다.
겉보기에는 협상이 통하지 않을 듯 강하고 무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꼭 그렇게 부르셨어야 합니까? 커맨더.”
그가 자신의 이명이 부끄럽다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커맨더에게 말했다.
“하하, 이젠 익숙할 때도 되었는데요. 하오찬 씨.”
커맨더가 동방불패, 하오찬의 말에 놀리듯 대답했다.
무신전의 수장, 태무신 운장의 신관인 하오찬.
동방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하여 동방불패(東方不敗)라고 불리는 남자.
그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처용 헌터.”
하오찬이 처용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악마와 맞서 싸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오찬의 악수를 받은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처용은 하오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회귀 전, 그 역시 지구 멸망에서 겨우 살아남아 저항군이 되었었던 헌터였으니까.
그는 운장이 선택한 신관답게 무를 숭상하고 정의로운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오찬과 처용이 인사를 끝냈을 때.
“장소를 옮기시죠. 커맨더.”
제시카가 커맨더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전해야 할 말들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시카의 말에 커맨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가죠.”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처용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