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크루마의 본체가 거주하는 레어에서 처용과 카투라가 빠져나오자.
[크루마를 위로해 줘서 정말 고마워.]
카투라가 처용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태초신을 욕한 게 위로가 되는 겁니까?”
처용은 카투라의 말에 짧게 침묵하고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적어도 크루마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거야.]
카투라가 자신의 형제를 생각하며 말했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마음이 많이 여린 녀석이거든.]
“……그렇군요.”
처용이 카투라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수의 격을 통해 그의 감정이 전해졌기에 작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크루마도…… 우리도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는 아니었어.]
카투라가 작게 웃으며 과거 태초의 마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태초의 마수들은 아버지인 태초신을 따라 뒤이어 만들어진 생명체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했었다.
그렇게 태초의 마수들은 태초신과 언제나 함께할 줄 알았으나.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너희는 이제 필요 없다.
태초신이 새로운 존재들을 창조하면서 태초의 마수들을 버렸다.
그 새로운 존재들은.
“선천적 신격들의 탄생이군요.”
최초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과정을 직접 겪은 당사자인 카투라의 말에 처용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우리 다음으로 탄생한 우주의 관리자들이야.]
태초의 마수들과 함께 우주를 다니며 겪었던, 오류와 시행착오들을 보완해 만든 존재.
그것이 선천적 신격들이었다.
“웃기네요.”
카투라의 말을 들은 처용이 태초신의 행동을 비웃으며 말했다.
“오류 보완은 무슨, 불량품만 잔뜩 만들어 놓고.”
선천적 신격들을 ‘불량품’이라고 말하는 처용의 말에.
[하하하.]
카투라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아무것도 없는 혼돈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아버지라 해도 만만치 않았어.]
마치, 태초신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인간들의 표현으로 낡은 도구는 교체한다고 하잖아? 새로운 도구가 생겼으니 우리는 빠져야지.]
“방식도 잘못되었고 마음에 들지도 않습니다.”
처용은 카투라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태초신의 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뭐든지 도구 취급하는 태초신이 만들었으니, 선천적 신격들이 그따위일 수밖에…….”
인간들을 자신들만을 위한 도구,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선천적 신격들.
그런 그들의 성향은 모두 태초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크루마가 너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저를요?”
처용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크루마의 행동이나 말투로 봤을 때, 전혀 좋은 감정이 전해지지는 않았으니까.
[정말로 널 싫어했다면, 조금의 대화도 없이 공격만 했을 거야. 하하.]
“그렇군요.”
[아, 최근에 이거 많이 썼었지? 받아.]
-쏴아아아!
카투라가 손을 들어 올리자, 맑은 물이 뭉쳐 들더니, 처용 앞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그녀에게 받았던 공청석유였다.
“감사합니다.”
처용이 공청석유를 받자 카투라가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공청석유를 보물전에 보관한 처용이 태룡전으로 향하자.
[어떠했느냐? 제자야.]
여래가 처용을 반겼다.
“음…… 나쁘신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짧게 침묵한 처용이 크루마를 마주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계승자에게는 크게 공격적이지 않아 다행이군요.]
처용의 말에 보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계승자가 크루마와 만나는 동안 손님이 왔었습니다.]
“손님이요?”
보살의 말을 들은 처용의 머릿속에 몇몇 후보가 떠올랐다.
그러나.
[무신전에서 천문의 신과 언문의 신이 찾아왔더구나.]
미륵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들의 이름이 나왔다.
“천문의 신과 언문의 신…….”
처용이 미륵의 말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회귀 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인물들.
무신전의 수장이 자주 언급했었던 이들이니만큼, 운장이 신뢰하는 성좌들이었다.
그들이 배신자 쪽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판단했다.
“한 번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처용은 곧장 성지에 방문한 손님들을 확인하기 위해 게이트를 열고 사라졌다.
***
성지 태룡담 근처, 세계수가 자리한 곳 바로 옆에 있는 정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는 언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왜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이해가 됩니다. 해전무신.]
[이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언문.]
언문의 옆에 선 해전무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차와 다과를 놓고 바둑을 두고 싶군요.]
언문의 옆에 있던 천문이 부채를 피며 말했다.
[허허, 대신들께서 허락을 해 주셨으니, 운치(韻致)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요. 천문.]
천문의 말에 언문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우우웅!
황금빛 게이트가 열리며 처용이 나타났다.
[왔군.]
해전무신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안녕하세요. 장군님.”
처용이 해전무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낮선 두 인물을 바라봤다.
처용을 관찰하는 것은 천문과 언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친구가 대신들께서 선택한 이입니다.]
“한처용이라고 합니다.”
해전무신의 말에 처용이 천문과 언문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야기는 미리 들었지만, 놀랍구려.]
천문이 부채를 탁 접고 처용을 보며 놀람을 표했다.
[신격에 닿은 정도가 아닌, 완벽한 신화경(神化境)의 경지가 아닌가?]
처용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신관들의 기운인 신성력이 아니었다.
의지가 뚜렷하게 전해지는 선명한 신력이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명(孔明) 님.”
처용이 천문의 말에 감사를 전하며 그의 본명을 언급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줄이야.]
“제가 눈치가 좀 빠른 편입니다.”
처용이 천문의 본명을 알고 있는 이유는 회귀 전 운장이 했었던 말들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신전의 다른 성좌들도 종종 천문을 언급했었다.
생전의 운장과 강완 등 한 시대를 호령한 영웅들과 함께했던 책략가.
그것이 그의 정체였다.
그때.
[혹시, 나도 알고 있나?]
언문이 기대감이 일렁이는 듯한 표정으로 처용에게 물었다.
그러자.
[체통을 좀 지키십시오. 언문.]
천문이 언문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전 이제 왕이 아니니, 체통을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
언문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용은 그런 언문을 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대왕(大王) 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칭하는 명예로운 호칭 중 일부를 말했다.
한반도의 수많은 왕들 중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는 극소수였다.
그리고 언문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통찰의 눈 덕분이었다.
[■도]
[■급 : ■■…….]
[칭■ : 언■■신, 문자의 창시자…….]
[특■ : 과거■■…….]
[■■ : 언■■…….]
아직 높은 격을 지닌 이를 전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고 이전보다 많이 성장했기에,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스템의 문구 중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문자의 창시자’와 그의 이름 중 일부.
그리고 그가 언급한 ‘이제는 왕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자, 언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속으로는 놀람을 감추고 있었다.
설마 그의 정체가 가장 위대한 왕이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아주 총명한 친구로구만, 허허.]
언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용은 직접 손님들에게 성지를 안내해 주며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혹시, 무신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천문과 언문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
무신전에 무슨 문제라도 발생한 것은 아닐까? 싶어 질문했다.
[우리는 별일이 없지만, 천교에는 별일이 생겼지. 하하.]
처용의 질문에 언문이 마치 누군가를 놀리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모든 성운에게서 열렬한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 하하.]
“……이번에 디아블로가 나타난 장소가 천교의 영역이었으니까요.”
처용은 언문이 말한, 왜 천교가 열렬한 관심을 받는지에 대해 눈치채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무시무시한 대악마를 해치운 것이 자네라며?]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로…….”
언문의 말에 처용이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떠올려 봐도 정말 ‘운이 좋았다’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자네가 그 대악마를 막아낸 것은 사실이라네. 덕분에 큰 피해도 막을 수 있었고.]
언문이 처용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네. 자네는 남들이 못한 훌륭한 일을 한 것이니까.]
[동의합니다.]
해전무신이 언문의 말에 처용을 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역사 속 위대한 이들의 칭찬에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혹시 천교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습니까?”
처용이 언문에게 본론을 묻자.
[놈들이 대악마와 협력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잡아떼고 있으니 원. 쯧쯧…….]
언문이 고개를 젓고 혀를 차며 말했다.
“놈들이 쉽게 틈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교가 판데모니움과 협력한다는 사실도 염라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니까.]
“그렇군요. 그분께서…….”
처용은 언문이 말한 ‘염라’라는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하데스와 같은, 저승을 관리하는 신인 염라.
그는 무신전을 돕는 선천적 신격이었다.
회귀 전, 처용이 지옥에 떨어졌을 때에도 도움을 주었던 성좌.
그 당시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 버렸었지만…….
‘……잠깐!?’
염라에 대해 생각하던 처용이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
하지만.
‘아니야, 그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
태룡사에 언문과 천문이 방문하고 이틀 정도가 지났을 무렵.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자님.”
하얀 사제복을 입고 인천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교단의 한국 지부를 관리하는 대주교와 헌터들이 누군가를 정중하게 마중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주교님.”
대주교를 향해 인사하는 백발 머리의 젊은 남성은 성자였다.
그리고.
“같이 오신 분은?”
대주교가 성자의 옆에 있는 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은 망토에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는, 용병처럼 보이는 헌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수상했기에 물은 것이지만.
“제 지인입니다. 마침, 한국에 볼일이 있다 하여 같이 온 참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성자가 신원을 보증하자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대주교의 안내를 받아 성자와 가면을 쓴 헌터가 교단의 한국 지부로 향했다.
일행들이 이동하던 중.
“한번 와 보고 싶은 나라였는데…… 성자님 덕분에 와 보는군요.”
성자의 옆에서 도깨비 가면을 쓴 용병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아시다시피 그가 당신을 들여보내 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야스라 님.”
성자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용병, 무라키 야스라를 향해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은밀히 처용을 만나기 위해 방법을 찾던 도중, 성자를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성자님.”
야스라가 조용히 감사를 전했다.
이윽고 교단의 한국 지부에 도착했을 때.
“동행해서 즐거웠습니다.”
성자가 야스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야스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그리고.
“절대로 안 됩니다!”
교단의 한국 지부 응접실에서 대주교가 큰 목소리로 성자에게 말했다.
그는 홀로 처용의 성지를 찾아가겠다는 성자의 말에 크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 불경한 곳에 홀로 찾아가겠다니요!”
“말씀 조심하십시오. 신의 성지입니다.”
대주교의 말에 성자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무튼,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추기경님께서 신신당부를-!”
“제가 일일이 추기경의 허락을 받고 다녀야 하나 봅니다?”
성자가 대주교의 말을 자르며 조용히 말했다.
“누가 보면 추기경이 교단의 황제인 줄 알겠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성자님.”
대주교는 평소와는 다른 성자의 강단 있는 모습에 침을 삼켰다.
‘최근…… 대악마와 마주했다고는 들었지만, 그 때문인가?’
중국에서 나타난 대악마.
대주교는 성자가 최근 예민한 것이 그 대악마 때문이라 생각했다.
성자는 대주교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그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와 가까이 있는 이들 역시도.”
이곳 지부에 방문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한처용을 자극하지 말하는 것.
성자는 교단의 수장이니만큼, 교단 내부에서 처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방치한다면 사고가 일어나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으로 봤을 때, 처용은 자신을 향한 공격은 절대로 곱게 넘길 이가 아니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경계를 높여 강원도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성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 해도 신의 성지였다.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추기경이든 그 누구든, 심지어 교황 예하의 명령이 있다 해도.”
성자는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절대로 그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 명령이 내려온다면, 나에게 말씀하세요.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명령을 전한 성자는 지부를 나와 한국 헌터 협회로 향했다.
그 뒤를.
-사라락-.
은밀하게 흐르는 바람이 뒤따랐다.
그리고.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교단의 지부장실 건물 창문에서 성자를 바라보는 대주교가 누군가를 향해 보고하듯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