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구출 작업 막바지에 방해를 받긴 했지만, 야스라의 도움으로 나름 수월하게 풀렸다.
게다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 시노비들은 야스라를 상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듯 보였다.
시노비들은 전원 A급 헌터, 게다가 리더로 보이는 가토는 야스라보다 레벨이 높은 헌터였다.
야스라가 아무리 S급 헌터, 신관이라고 해도 시노비들을 상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야스라가 시노비들을 모두 묶어 주고 있는 상황.
처용이 야스라를 상대하는 가토와 시노비들을 봤을 때.
그들은 겉으로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 보일 뿐, 사실은 대충 싸우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야스라에게서 시선을 돌린 처용은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위에서 바라본 가장 넓은 공동인 1층에서는.
-이 간악한 마인 놈들!
-집행자를 따라라!
-다 죽여!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날뛰는 몬스터와 마수들.
진형을 갖추며 마인들과 맞서는 교단의 헌터들.
이에 맞서 아지트를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마인들.
교단의 헌터들을 보조함과 동시에 날뛰는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커맨더의 안드로이드들.
상황을 지켜보던 처용은 돌연, 무언가를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불길한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진다?’
정확히는 집행자와 상급 마인들이 튀어나온 균열을 본 이후부터 불길한 느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상급 마인의 마기나 S급 마인, 집행자의 마기와는 달랐다.
조금 더 원초적이고 악의적인 느낌이 전해지는 마기.
마치, 상위 대악마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무언가 번뜩! 하고 떠오르는 생각에 처용의 눈이 일그러졌다.
마수 실험장에서 마수 실험이 아닌 무언가를 한 정황.
집행자에 이어 열 명이 넘는 상급 마인들.
조금 전, 집행자가 상급 마인들을 부를 때, ‘기둥을 맡은 녀석들’을 제외한 나머지라고 한 말.
처용의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때.
-쿠쿠구!
지하의 싸움이 격해지는 탓인지 마수 실험장 전체가 흔들렸다.
-쩌저적! 콰쾅! 와르르!!
1층과 지하층을 나누는 바닥 천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파편과 흙먼지가 가라앉자 2층 난간에서도 지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이 무너졌음에도 격렬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각각 성자와 커맨더, 집행자가 있는 탓인지, 무너지는 잔해로 인한 피해는 양측 다 없어 보였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이 더 강해졌다?’
드러난 지하 1층 중앙에 있는 균열.
그곳에서부터 시커먼 마기가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그때.
성자를 향해 맹공격을 퍼붓던 집행자가 잠시 물러났고.
세 명의 상급 마인이 균열에서 튀어나와 집행자 옆에 자리했다.
“끝났습니다. 집행자님.”
그 중, 중앙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 집행자를 향해 말했다.
처용은 로브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과 그녀의 마기를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마녀? 이곳에 있었던 건가?’
처용이 놀란 이유는 마녀가 이곳에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 때문이었다.
[이름 : 레나 르블랑]
[레벨 : 147]
[칭호 : A급 마인, 거대한 어둠의 가호]
[클래스 : 팬텀 위치]
[특징 : 강력한 악령의 힘을 받아들인 마녀.]
[흑마법과 악령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습니다.]
[스킬 : 악령소환, 확인 불가…….]
마녀는 이전 아지트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더 의문이 드는 점은.
‘팬텀 위치?’
바로 그녀의 클래스.
회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클래스였다.
본래 그녀는 S급 마인이 되기 전까지 ‘암흑 마녀’ 클래스에서 변하지 않았다.
S급 마인이 된 이후, 그녀의 이명과 같은 ‘학살의 마녀’ 클래스로 변한다.
변하지 않았어야 할 마녀의 클래스가 변한 상황.
심지어 최상위 악령인 ‘팬텀’의 이름을 단 상태로 변했다.
처용이 마녀를 노려보며 당황하고 있을 때.
“역시…… 이런 사달이 괜히 일어났을 리가 없지.”
마녀가 고개를 들어 처용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 한처용.”
처용은 마녀가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며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이다. 마녀.”
숙적을 향해 작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성지가 완성되고 자신을 드러낸 이상, 어차피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마녀가 자신에 대해 안다고 놀랄 이유는 없었다.
마인들, 특히 마녀가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 상황은 충분히 예상했다.
추가로.
‘내가 널 아는 만큼, 네가 나에 대해 알까?’
처용이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자신 역시 지하로 향해 전투에 합류할 준비를 했다.
어차피 주요 목표인 이종족 대피는 모두 끝마친 상황.
이곳에서 성자와 커맨더를 도와 강력한 마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처용을 노려보고 있던 마녀가 돌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마치, 처용 따위는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그 모습을 본 처용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를 때.
“……께서-.”
마녀가 집행자를 향해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뭐!?”
집행자가 크게 당황하더니.
“당장 모두 물러나라! 지금 당장!”
손을 휘저으며 휘하 마인들과 함께 뒤로 크게 물러났다.
동시에.
-우우웅!!
지하 2층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갑자기 진해졌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성자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급히 명령을 내렸다.
“디바인 생츄어리!”
동시에 교단의 헌터들을 보호하는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양측이 크게 물러난 순간!
-콰아아아아!!
지하 2층으로 이어지는 균열 속에서 검붉은 불꽃이 솟구쳤다.
“이……런!”
처용의 입에서 긴장감 어린 침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으니까.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불타는 마기.
지하 2층에서 상급 마인들이 모여 작업한 무언가.
집행자가 말했던 기둥을 맡은 녀석들.
“모두!”
처용은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뒤로 돌려 외쳤다.
“모두 도망쳐! 당장!!”
지금부터 일어날 재앙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절대로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젠장 늦었-!”
처용은 뒤에 있는 일행들이 대피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하고.
“화류태극권 - 반탄장!”
정면에서 덮쳐오는 화마를 방어했다.
-콰콰!! 화르르륵!!
강렬한 화마가 사방을 휩쓸어 버리며 폭발하듯 터졌고.
-쿠구구구!! 와르르!!
공동 전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폭삭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진이 잠시 멈추자.
-화르르륵!
강렬하게 퍼지던 화마가 무너진 공동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6미터 정도 크기인 근육질이 가득한 드레이크와 비슷한 모습.
용암처럼 일렁이며 타오르는 피부.
머리 위에 돋아난 거대한 두 개의 검은 뿔.
검은자위 위에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크아아아아-!!]
공동 중앙에 나타난 무언가가 날개를 크게 펴며 포효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디아블로!’
격렬한 화마와 함께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대악마.
심지어 삼천마 중 하나인 디아블로였다.
“도대체 어떻게?”
디아블로의 모습을 정확히 확인한 처용이 크게 당황했다.
회귀 전에는 시스템이 무너지기 전까지 디아블로를 포함한 삼천마는 지구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환 의식을 통해 나타난 대악마는 아무리 봐도 디아블로.
원래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용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디아블로를 응시할 때.
[시스템의 막이 일부분 찢어졌다.]
미륵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블로가 시스템의 막을 찢어냈다고요? 그건 불가능-.’
처용의 미륵의 목소리에 답하자.
[대악마를 강림시키는 의식…… 거기에 누군가가 개입했군.]
‘……배신자 중 하나, 아니.’
처용은 미륵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 곧장 알아차렸다.
‘천교에서 도와줬겠군요.’
지금 이 장소는 다름 아닌 중국, 천교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천교는 오래전부터 배신이 확정된 상황.
처용의 의심은 확신에 가까웠다.
동시에.
‘……온전하게 강림하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군요.’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디아블로는 보통 대악마가 아닌 삼천마,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아무리 천교의 도움을 받은 소환 의식에 이어 디아블로가 직접 차원의 틈을 찢었다고 해도.
그가 온전히 강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증거로, 본래 디아블로가 강림하면 주변이 전부 초토화된다.
디아블로가 소환될 때 강렬한 화마가 폭발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화마에 의한 피해가 적었다.’
처용이 기억하는 모습보다는 많이 약했다.
지금 디아블로는 화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
‘우선…….’
폐허가 되어버린 주변을 둘러본 처용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처용이 은밀하게 행동을 시작할 때.
“위대하신 대악마를 뵙습니다!”
집행자와 마인들이 빠르게 디아블로의 앞으로 다가와 부복했다.
[아아, 나의 신관인가?]
디아블로가 가장 앞에 선 집행자를 향해 말하자.
“이런 누추한 곳에 직접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집행자가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하 2층에서 행하던 소환 의식.
그곳에서 나타나야 할 대악마는 원래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본래 소환할 악마는 하위 서열의 대악마 중 하나였다.
하위 서열이라 해도 대악마이기에 소환 의식에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공들여 만든 악마 소환 의식은 완벽하지 않은 첫 실험에 불과했다.
많은 공을 들였다 해도, 시스템의 제약에 더해 완벽하지 않은 소환 의식이라 차질이 많은 상황.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위 대악마가 아닌, 삼천마가 직접 화신체로 강림했다.
[기다리느라 지루했다.]
디아블로가 자신의 신관, 집행자가 품은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내가 직접 차원의 틈을 찢었음에도, 고작 이 정도 힘만 가져올 수 있다니.]
디아블로가 손아귀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가 자신의 힘을 소모하면서까지 직접 강림한 이유는 벌 것 없었다.
싸움이 끝난 판데모니움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지루함을 느끼던 와중, 신관인 집행자를 통해 지상에서 일어난 싸움을 관찰했다.
게다가 마침 소환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
디아블로는 본래 지상으로 나가려던 대악마를 멀리 던져버리고 직접 소환 의식에 개입했다.
시스템의 힘이 자신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소환 의식에 의해 균열이 열린 상황.
디아블로는 자신의 힘을 소모해 벌어진 균열을 더 찢어냈다.
그럼에도 온전한 강림이 불가능했다.
결국, 자신의 힘을 대부분 봉인하고 화신체로서 강림하는 것이 성공했다.
[놈들의 도움까지 받았음에도 이게 고작인가?]
붉게 타오르는 디아블로의 시선이 하늘 위를 향했다.
그때.
“대…… 악마? 이건?”
디아블로를 바라보던 성자가 떨리는 음성을 토했다.
피부에 와닿을 정도의 불길함이 전해지는 마기.
그 마기에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동시에 눈앞이 일렁일 정도의 어지러움이 전해졌다.
성자인 자신이 악마를 보며 ‘공포’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악마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야훼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긴장감과 공포에 몸을 떠는 이는 성자만이 아니었다.
교단의 헌터들과 디아블로 앞에 부복한 마인들, 가까스로 살아남은 몬스터들과 마수들까지.
현장에 있는 모두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주하는 대상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힘.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디아블로가 가진 권능이었다.
디아블로의 시선이 공포에 떠는 성자를 향했다.
[아, 야훼의 신관인가?]
나지막하게 울리는 디아블로의 음성에 성자가 침을 삼켰다.
집행자와 마인들은 성자를 없앨 기회라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모두 물러나라.]
-쿠쿵!
디아블로가 오른손 손아귀에 거대한 양날 도끼를 소환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즐거움을 방해하는 놈은 직접 지옥에 처박아 주마.]
“편히 즐기소서!”
자신이 모시는 대악마의 성향을 잘 아는 집행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동시에.
“모두 물러나라! 전원! 다음 집결소로 집합해라!”
휘하 마인들을 모두 이끌고 재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을 포함한 마인들 모두가 죽을 것이다.
디아블로가 방해하지 말라 경고를 전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대악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음이 컸다.
그 옆에 있으면, 아무리 S급 마인인 자신이라도 휘말려서 죽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마수 실험장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
곧 각지의 헌터들이 이곳으로 몰릴 거라 예상했다.
이런 현장에 더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그저 직접 강림한 디아블로가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길 바랄 뿐이었다.
길드들이 약해질수록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지니까.
‘성자만큼은 죽었으면 좋겠군.’
집행자가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성자를 생각하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왜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향해 적의를 태웠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삼천마의 화신체를 마주한 이상, 성자가 살아남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집행자는 곧 죽을 운명인 성자를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