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하루 뒤.
커맨더는 약속대로 곧장 찾아왔다.
처용은 하루 성지에서 체류했던 커맨더의 동료들과 같이 마키나에 탑승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처용이 커맨더를 향해 정확한 목적지를 물었다.
“엘프들의 영역 깊은 곳,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그렇군요.”
커맨더의 말에 처용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에 대해 알고 있나 보네?”
“대충 알기만 하는 정도입니다.”
커맨더의 물음에 처용이 대충 안다고만 대답했지만.
처용은 세계수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의 성지이자 그들에게 있어 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세계수 엘그드라실.
회귀 전, 처용은 세계수의 의지와 직접 대화를 나눠보기도 하며 엘프들과 친한 것 이상으로 세계수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악의 종주를 막지 못하고 세계수가 파괴될 때는 엘프들 못지않게 비참함을 느꼈었다.
처용이 세계수에 대해 생각할 때.
“다친 이종족들 모두가 세계수의 가지 아래에 있거든.”
커맨더가 처용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다친 이종족들이 세계수에 있는 이유.
세계수는 그들의 상태가 더 악화하지 않도록 보듬어주고 있었다.
커맨더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함선 중앙에 있는 지도 패널을 바라보았다.
-승인되었습니다.
함선의 알람이 울리자.
“……됐다. 그럼 바로 간다!”
알람을 확인한 커맨더가 지도 패널을 향해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지도가 점차 커지며 확대되더니 거대한 나무를 비추었다.
“차원 도약을 시작한다!”
커맨더가 나무를 바라보며 왼손을 들어 올리고 스킬을 발동했다.
-키이잉!
그의 손 위에 시곗바늘이 빠르게 움직이는 회중시계가 나타났다.
“5! 4……!”
빠르게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을 바라보며 커맨더가 외치자 함선 내부의 모두가 난간이나 벽을 잡았다.
처용 역시 그들을 따라 난간을 강하게 잡고 몸을 고정시켰다.
“1!”
커맨더가 마지막 숫자를 외친 순간.
-위-우우웅!
함선 전체가 아주 작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이 오그라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피이잉!
전혀 다른 장소에 밝은 빛무리가 번지며 커맨더의 성지, 마키나가 나타났다.
“오?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 굴러다녔는데, 후배는 멀쩡하네?”
“하하.”
커맨더의 말에 처용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회귀 전, 마키나의 기능 중 하나인 차원 도약을 처음 경험했을 때는 처용도 그의 말처럼 굴러다녔었다.
때문에 나름대로 몸을 고정시키고 대비를 한 것이었다.
“후배가 준 지맥석 덕분에 차원 도약을 연속으로 써도 여유가 생겼거든.”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커맨더.”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커맨더의 말에 대답하고는.
“덕분에 빠르게 왔네요.”
함선 중앙의 지도 패널을 보며 말했다.
“후배 덕분이지, 그럼 다들 가자고.”
커맨더가 승강기로 사람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외부가 투명하여 밖을 볼 수 있는 함선의 승강기.
“오!”
“역시, 볼 때마다 운치가 있다니까.”
그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높이 1킬로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
엘프들의 신이자 세계수인 엘그드라실의 본체였다.
세계수의 가지와 땅을 뚫고 튀어나온 뿌리를 베이스로 엘프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 도시.
이 장소가 엘프들의 성지였다.
“아름답네요.”
처용 역시 아래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표했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다시 볼 줄이야…….’
동시에 회귀 전, 이 경치가 폐허가 되어가던 모습이 기억났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처용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윽고 승강기가 지상에 착지하자.
“어서 오세요. 커맨더.”
커맨더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금빛이 감도는 백금발 머리에 엘프치고는 유독 긴 귀.
새하얀 속눈썹 밑에 반짝이는 녹색과 금빛이 일렁이는 눈동자.
처용과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큰 키의 여성.
“안녕하세요. 테시아 님.”
커맨더가 눈앞의 엘프 여성, 테시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처용 역시 눈앞에 마중을 나온 하이 엘프를 보며 속으로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다.
[엘-테시아]
[등급 : A+급 하이 엘프]
[특징 : 세계수의 인정과 세례를 받고 진화한 엘프.]
[확인 불가.]
[스킬 : 확인 불가.]
테시아는 엘프들의 여왕을 보좌하는 소수의 하이 엘프 장로 중 하나였다.
회귀 전에는 세계수와 함께 엘프 여왕이 사망한 뒤, 남은 엘프들을 이끌었던 전사이자 동료였다.
“낯선 분이 계시네요.”
테시아가 처용의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한처용이라고 합니다.”
처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테시아의 눈동자가 처용을 응시했다.
처용을 비춘 테시아의 눈동자에 잠시 당혹감이 일렁였다.
빠르게 표정을 감춘 테시아는.
“당신이 자매들을 치료해주실 분이로군요.”
처용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프의 본능이 저를 기피 하는가 봅니다?”
처용은 찰나의 순간 당혹감을 보인 테시아의 눈빛을 파악하고는 넌지시 말했다.
“그게…….”
테시아가 당황하는 듯한 분위기로 말을 흐렸다.
엘프들은 예민한 감각을 가진 종족.
특히, 하이 엘프들은 눈에 비치는 상대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상의 선악적 성향과 감정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예시로 커맨더를 바라보면 마치 단단한 강철 같은, 푸른색과 은색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서 선에 가까운 중립적 성향과 들뜬 기대감이 전해졌다.
그러나 처용에게서는…….
너무나도 강렬하고 많은 기운이 전해졌다.
단단하고 우직한, 마치 변하지 않는 거대한 태산을 마주한 듯한 금빛 기운.
그리고 그 겉에는 무엇이든 파괴하고 짓밟아 버릴 것 같은 난폭한 느낌의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동시에 신성한 신수만이 가질 수 있는 청명한 기운도 전해졌다.
심지어 모든 속성의 마나의 기운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계속 변화하며 빛을 내는 오로라와 같았다.
문제는 그런 그의 성향.
처용의 성향은 선과 중립, 악이 서로 뒤엉켜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선이었던 성향이 악으로 변해 있고.
또 한 번 깜빡이면 중립으로 변해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이 엘프 테시아조차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처용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는 선인인가? 아님 악인인가? 아니면 대부분의 인간처럼 중립적인 성향인가?
테시아가 끙끙거릴 때.
‘신력을 품고 있는 인간은 처음 보나 봅니다?’
처용에게서 전음이 전해졌다.
“네?”
테시아가 처용의 전음에 의문을 표하자.
-우우웅!
처용이 신력을 약간 끌어올렸다.
테시아는 처용의 잠시 내보인 기운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신격의 힘, 세계수에 흐르는 기운과 같은 신력.
하이 엘프로서 세계수의 힘을 받은 테시아기에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커맨더가 데려오신 분은 평범하신 분이 아니었군요.”
처용을 응시하던 테시아가 미소를 짓고는 커맨더를 바라보며 놀람을 표했다.
“이번엔…… 꼭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커맨더가 희망을 품은 눈빛으로 테시아에게 말했다.
그때.
-쿠우웅!
세계수로부터 옅은 진동이 퍼져 나왔다.
동시에.
“네? 아, 알겠습니다!”
놀란 듯 보이는 테시아가 무언가 메시지를 받았는지 세계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세계수님이 의지를 전하셨나 보네요?”
커맨더 역시 놀란 듯 세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 세계수님께서 서둘러 오라고 하시네요.”
테시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들 저를 따라오시죠.”
테시아의 인도의 따라 지상에 착지한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이 세계수의 중심을 향해 이동하자.
-인간이다.
-……가까이 가지 마.
-커맨더가 또 왔어.
엘프들이 멀찍이 구경하며 속닥거렸다.
다른 종족인 방문자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고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양한 관심을 받으며 이동하자 곧장 세계수의 중심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랜만이네요. 커맨더.”
그곳에서 일행들을 기다리던 엘프가 커맨더를 향해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여왕님.”
커맨더가 눈앞의 여성, 엘프 여왕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엘프 여왕은 테시아처럼 백금발에 금빛이 감도는 녹색 눈동자를 지녔지만.
테시아보다 더 차분한 분위기의 연륜을 보이고 있었다.
“참 신비하고…… 복잡한 기운을 가진 손님이 방문했네요.”
엘프 여왕이 처용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처용이라고 합니다.”
처용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가 말한 그 친구입니다.”
커맨더가 덧붙여 말하자.
“후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수께서도 닦달하신 것이겠지요.”
엘프 여왕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손님들을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엘프 여왕이 말하자.
-쿠구구!
세계수의 뿌리가 양옆으로 갈라지듯 열리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시죠.”
엘프 여왕이 앞장서고 테시아가 그녀를 따라갔다.
커맨더는 그녀를 따라가기 전 뒤의 일행들을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지, 다녀 와.”
이진호가 커맨더의 말을 미리 알아채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커맨더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프 여왕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뒤를 처용과 이종국이 따랐다.
일행들이 갈라진 세계수의 뿌리, 빛을 향해 들어가자.
-화아아!
밝은 빛이 시야를 잠시 가린 후, 세계수의 내부가 펼쳐졌다.
마치 나무로 만들어진 동굴과 같은 모습.
그리고 반딧불과 같은 불빛과 발광하는 꽃잎들이 내부를 밝혀주고 있었다.
“볼 때마다…… 아름답군요.”
이종국이 세계수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처용 역시 그의 말에 긍정했다.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광경이기에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쭉 나아가자 나뭇가지로 막힌 막다른 벽이 나타났다.
엘프 여왕이 벽을 향해 손을 뻗자.
-쩌저적!
가지들이 저절로 움직이며 좌우로 비켜섰고 내부가 드러났다.
“후.”
커맨더가 내부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는 마치 병동의 환자처럼 누워있는 사람들이 일정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환자들의 손목과 발목에는 형광색으로 빛나는 나뭇가지들이 옅게 휘감겨 있었다.
세계수가 환자들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제공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환자들은 엘프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동물적 특징을 가진 수인족, 오크, 드워프, 요정족 등.
“라미아에 인어까지…….”
내부를 둘러본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엘프나 다른 이종족들은 약한 개체를 노리면 충분히 인간들이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이종족 중에는 신수 못지않은 강함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처용의 시선이 한 이종족을 향했다.
하반신은 물고기고 상반신은 인간인 바다의 이종족 인어.
“세이렌까지 당했었던 건가?”
처용이 바라보는 인어는 산호와 같은 뿔과 푸른 깃털의 날개를 가진 인어였다.
인어들의 상위종족인 세이렌.
엘프로 비교하자면 하이 엘프와 같은 이들이었다.
“하이 엘프 중에서도 피해자가 있어…….”
커맨더가 고개를 숙이며 참담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처용이 다시금 둘러보자 환자들 중 백금발의 하이 엘프를 찾을 수 있었다.
보통 일반적인 엘프의 머리색은 갈색과 녹색, 옅은 금색이었다.
반면에 백금발은 하이 엘프만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특징이었다.
그런 백금발의 하이 엘프, 연아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소녀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내가 지켜주지 못했어…….”
커맨더가 엘프 소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처용 역시 커맨더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엘프 여왕이 처용을 보며 물었다.
그녀 뒤에 있던 테시아 역시 같은 질문을 속으로 던진 듯 처용을 보고 있었다.
“잠시 살펴보죠.”
처용은 커맨더가 말한 하이 엘프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의 앞에 앉은 처용은 오른손 손가락을 들어 환자의 명치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신력을 작게 뽑아내 환자의 내부에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동시에 환자를 향해 통찰의 눈을 발동했다.
[엘-리카]
[등급 : A급 하이 엘프]
[특징 : 세계수의 인정과 세례를 받고 진화한 엘프.]
[현재 마기에 의한 디버프를 받고 있습니다.]
-정신 붕괴.
-옭아매는 어둠.
.
.
[스킬 : 정령 소환, 자연의 화살…….]
환자, 리카라는 이름을 가진 하이 엘프의 정보가 처용의 눈앞에 보였다.
동시에 그녀의 몸을 점점 좀먹는 ‘마기’가 느껴졌다.
그 마기가 처용의 신력에 반응하고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장난을 친 대악마가 누구인지 알겠군요.”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 처용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악마? 마인들이 소말리아 범죄자들을 도왔다는 건 알았지만…….”
커맨더가 처용의 말에 놀란 듯 말을 흐리며 대답하자.
“환자들에게 걸린 저주…… 대악마의 작품입니다.”
처용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더러운 기운에 이를 갈며 말했다.
타인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감정을 부수는 대악마.
“아스모데우스…….”
판데모니움 서열 32위, 색욕악신(色慾惡神) 아스모데우스.
처용의 입에서 상위 대악마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