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처용이 성지로 돌아오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여, 후배.”
커맨더가 반가운 미소를 짓고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커맨더.”
처용이 마주 미소를 지으며 커맨더를 환영했다.
“이야~! 정말……, 아름다운 성지인데?”
커맨더가 성지의 경치를 쭉 둘러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하하, 경치가 끝내주죠?”
“마키나를 탄 이후로는 다른 성지가 부럽지 않았는데, 여기는 부럽네.”
“마키나도 멋진 성지잖아요.”
처용이 하늘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태룡사의 하늘 위에는 커맨더의 성지, 마키나가 떠 있었다.
마키나에 처용의 시선이 닿을 때.
[기계 장치의 여신이 방문을 요청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음?”
처용이 시스템 창을 보며 잠시 생각하고는.
‘어찌할까요?’
성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하하, 막내 공주님이 성지를 구경하고 싶나 보구나.]
미륵의 웃음소리와 동시에 전음이 들려왔다.
‘막내요?’
처용이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미륵이 말하는 ‘막내’가 기계 장치의 여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으니까.
[기계 장치의 여신은 태초신이 탄생시킨 마지막 선천적 신격이다.]
미륵이 처용의 질문에 흔쾌히 답해 주었다.
[1세대 선천적 신격들 사이에서는 막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처용이 신기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귀 전에는 모르던 사실이었으니까.
[계승자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보살이 처용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처용이 대답하고는.
“수락한다.”
시스템을 향해 수락한다는 의사를 보냈다.
그러자.
-화아아!!
처용과 커맨더 옆에 빛무리가 뭉치더니, 누군가가 나타났다.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프릴 드레스에 잿빛으로 흩날리는 긴 머리.
오른손에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는 잿빛 양산을 들고 있는 여성.
이전 커맨더의 성지, 마키나 안에서 마주한 어린 소녀와는 다른, 더 성숙한 모습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한처용.]
본신으로 성지에 강림한 기계 장치의 여신이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기계 장치의 여신님.”
처용이 미소를 보이며 성지에 초대한 손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향해 인사했다.
[좋은 곳이야, 구경할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커맨더를 향해 말하고는 들뜬 걸음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
커맨더가 오랜만에 마주하는, 자신이 모시는 성좌의 본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님을 초대해 줘서 고마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커맨더의 성좌인데요.”
처용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고는.
“다른 분들도 성지를 구경하고 있으신가 보네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용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금발 여성.
커맨더의 파티원이자 힐러인 샬럿이 풍경을 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다른 커맨더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야. 하하.”
커맨더가 진심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저번에 이야기했던 거 기억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 커맨더가 처용에게 말했다.
커맨더의 말을 들은 처용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 바로 알아챘다.
“이종족 치료요?”
처용이 잊지 않았다는 듯 곧장 대답하자.
“맞아.”
커맨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준비는 전부 끝내 두었어, 그 까다로운 엘프 여왕님께도 허락을 받았으니까.”
커맨더는 올림포스 성지를 다녀간 이후 그간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힐러 클래스 헌터의 스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치료 계열의 권능.
처용이 보여준 권능으로 다친 이종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희망이 생겼으니까.
다만.
“하아…….”
커맨더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잠시 끊었다.
“뭔가 문제가 있군요?”
처용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그리고 회귀 전의 기억과 작금의 상황을 토대로 무슨 일인지 대강 눈치챘다.
“방해하는 새끼들이 있나요?”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방해…… 가 맞겠네.”
커맨더가 긍정하듯 대답했다.
“WHU에서 나를 주목하고 있어.”
세계 헌터 연합에서 커맨더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계던전을 막지 않고 무단으로 행동했다고 뭐라고 하더군.”
커맨더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지랄 염병을 하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꼰대 새끼들이.”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커맨더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커맨더가 처용의 말에 웃으며 말하자.
“말만이 아닌 진심입니다.”
처용이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당신은 WHU의 명령에 순종하는 병사가 아닙니다.”
커맨더가 처용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늙은이들도 후배는 통제할 수 없겠어.”
처용은 커맨더의 말에 비틀린 미소를 짓고는.
“저한테 목줄을 씌우려다가는 사지가 찢겨 나갈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커맨더 역시 처용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처용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려 대악마의 화신체를 갈가리 찢어버렸으니까.
“그래서 WHU의 늙다리들이 방해를 하는 겁니까?”
처용이 본론으로 돌아와 커맨더에게 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처용의 표정 속에는 짜증이 일렁이고 있었다.
기껏 교단과 다른 길드들을 자극하고 자신의 일들을 방해할 수 없도록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젠 WHU가 눈에 거슬리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종족들의 영역으로 출입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처용의 질문에 커맨더가 사정을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교단 측도 내가 움직일 때마다 태클을 걸고 있어.”
커맨더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들 중 하나인 교단.
그들은 커맨더가 이종족의 영역에 출입할 때마다 WHU에 불가침 조약을 들먹이며 항의하고 있었다.
커맨더는 다친 이종족들을 치료하기 위함이라고 매번 설명을 했다.
그러나 애초에 교단은 이종족들을 혐오하는 집단.
그들은 커맨더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저 맘이 들지 않기에 방해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들은 처용이 눈동자를 싸늘하게 식히며 읊조렸다.
‘바티칸의 절반을 부숴버려야 하나?’
처용이 뒷말을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커맨더는 처용의 살기가 감도는 눈빛을 보고 뒷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자네가 성왕(聖王)이면, 한처용 헌터는 패왕(霸王)이야.
이전 협회장을 찾아갔을 때, 그가 처용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를 함부로 자극했다간 소말리아 사태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진지하게 경고했다.
커맨더 역시 협회장의 말에 동의했다.
먼 과거 신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신이 처용의 성좌였다.
그런 성좌의 신관인 처용은 신력까지 가진 강력한 헌터였다.
게다가 거대 성운의 주신을 마주하고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당당함을 넘어서 주신의 면전에 대고 성좌의 신전을 부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극을 받고 폭주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자신이 일으킨 사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WHU든 교단이든 신경 쓰지 마시죠.”
처용이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딴 놈들한테 질질 끌려다닐 필요 없습니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요.”
“……하하, 뭔가 믿음직스럽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커맨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한처용 헌터.”
커맨더가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처용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가족인 윤아를 구해주고 도와준 것.
동료인 백호를 포함한 협회의 사람들을 도와준 것.
한국을 마인들의 마수에서 지켜준 것.
그리고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것까지.
그가 말한 ‘우리’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처용 역시 그 의미를 알아듣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이종족들을 치료만 하면 되는 겁니까?”
처용이 본론을 말하자.
“그 전에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커맨더가 처용에게 말하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그의 부름을 듣고 협회장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 이 분이로군요?”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가 처용을 보고 커맨더를 향해 말하자.
“맞습니다. 교수님.”
커맨더가 의사를 향해 ‘교수님’라 부르며 대답했다.
그리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처용 헌터.”
중년 의사가 처용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종국이라고 합니다.”
처용은 자신을 소개한 의사, 이종국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교수님.”
처용 역시 이종국을 향해 교수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전혀 몰랐지만…….
그는 의사로 너무나도 유명했던 헌터였다.
[이름 : 이종국]
[레벨 : 119]
[칭호 : A급 헌터, 창작하는 여신의 가호]
[클래스 : 하이테크 메딕]
[특징 : 뛰어난 회복 능력을 자랑하는 유니크 클래스 힐러입니다.]
[전장에서 아군을 보조하는 강력한 지원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 : 재생의 실, 하이 리커버리…….]
이종국 교수.
그는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한국에서 유명한 의사였다.
이종국은 각성하기 전, 평범한 의사일 때도 많은 사람들과 헌터들의 목숨을 구했었다.
게이트 사건이 터진 이후.
그런 그가 ‘힐러’로 각성까지 하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회귀 전, 악신들과 전쟁 당시에도 정말 많은 이들을 구한 의사가 바로 이종국이었다.
회귀 전의 처용도 이종국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하, 저는 이제 교수도, 의사도 아닙니다…….”
이종국이 처용의 말에 씁쓸함을 담아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시기의 이종국은 이제 의사도, 의과대학 교수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세계의사협회에서 그의 의사 자격을 박탈시킨 상태였다.
힐러의 스킬은 검증되지 않은 의술이다.
힐러의 스킬을 의술로 받아들일 수 없다 등.
세계의사협회에서 여러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이종국의 의사 면허를 취소시켰다.
물론, 정확한 실상은 따로 있었다.
세계의사협회는 ‘힐러’의 등장으로 인해 ‘의사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권력욕을 가진 이들에게 의사로서 힐러가 된 이종국은 눈엣가시였다.
이종국은 현대 의학과 힐러의 스킬을 합치는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 했었다.
그러나 권력에 목매는 어리석은 이들 때문에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용은 회귀 전, 이종국과도 나름 살갑게 지냈기 때문에 그의 인생사를 잘 알고 있었다.
“권력에 목매는 머저리들이야말로 의사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처용이 이종국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적어도 저에게는 교수님이 ‘진짜 의사’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한처용 헌터.”
이종국이 처용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커맨더 역시 이종국을 대하는 처용의 태도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은 이종족들을 치료하기 위해 나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야.”
“……그렇군요.”
처용은 커맨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시에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이 시기부터 같이 활동했던 건가?’
회귀 전, 이종국은 커맨더의 파티원이 아님에도 대부분 그와 같이 활동했었다.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건지 조금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오늘 풀렸다.
“그들을 치료하지는 못했지만요…….”
이종국이 커맨더의 말을 듣고 힘없이 대답하자.
“교수님께서 외상을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었을 겁니다.”
커맨더가 이종국에게 위로를 담아 말했다.
처용은 둘의 대화를 듣고 잠시 생각하고는.
“이종족들의 ‘정신’이 회복되지 않는 건가요?”
커맨더와 이종국을 향해 말했다.
이종국은 유니크 클래스 힐러이자 외상 치료의 권위자라고 불렸던 의사였다.
그가 장기간 직접 치료했다면 대부분의 상처는 아물었을 것이다.
회귀 전 이종국에게 치료를 받았었던 만큼,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그가 치료하지 못했다고 하니 의심이 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맞아.”
커맨더가 처용의 말이 맞다는 듯 대답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함선의 의료 기술과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모두 치료했어.”
“외상은 모두 치료했지만, 정신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종국이 커맨더의 말에 설명을 더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기’에 의한 손상이라 더 손대기가 어렵습니다.”
“마기요?”
처용이 이종국의 말에 눈썹을 크게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소말리아에 있었던 불법 실험 대부분은 마인과 연관이 있었으니까.”
커맨더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기의 잔여물이 몸속에 남아있어 함부로 건들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종국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저한테는 문제가 없겠네요.”
처용이 자신감을 보이며 말했다.
“자신감은 좋지만, 신중할 필요가-.”
“제 신력.”
걱정을 보이는 커맨더의 말을 자른 처용이 단 한 마디를 전했다.
그러자.
“……아!”
커맨더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처용의 신력은 마기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힘.
무려 대악마의 마기도 몰아낼 수 있는 파마의 신력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특화된 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태룡전 안에는 그 어떤 성좌보다도 ‘치료’에 특화된 성좌.
자비의 대신이 있었다.
“그분께 도움을 구해 보겠습니다.”
성지가 완성된 이상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