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과거의 일을 보고 온 처용이 태룡전으로 돌아오자.
[칫! 이딴 식으로 개입을 할 줄이야.]
카투라가 삐뚤어진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내뱉고는.
[어디까지 봤니?]
처용을 향해 물었다.
“……스승님께서 신법재판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부분까지 봤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카투라가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끊긴 기분입니다만……, 어떻게 된 거죠?”
시스템 메시지가 생각난 처용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물의 기억을 강제로 종료합니다.
분명, 강제로 종료한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나도 시스템이 개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미안.]
“시스템이 왜……?”
[나도 모르지, 네가 과거를 확인하는 걸 원치 않았다거나?]
“…….”
카투라의 말을 들은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묵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카투라와 성좌들을 향해 질문했다.
[간단하게 말해줄 순 있겠구나.]
여래가 처용에게 설명해 주었다.
[조화를 버리고 역천의 신이 된 내가 신계를 핏빛으로 휩쓸었다.]
신격을 잡아먹는 역천의 힘.
여래는 그 힘으로 성좌들을 죽여가며 거대한 힘을 축적했다.
그리고 그 힘을 한껏 활용해 신계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각 성운의 대신들이 모두 연합하여 나를 죽이려 했었다.]
물론, 성좌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강한 힘을 가진 성좌들이 뭉쳐 여래를 소멸시킬 작전을 짠 것이다.
여래는 대신들과의 전면전에서는 이길 수 없다 판단하고 그들을 피했다.
그 대신…….
[나는 대신들의 연합을 피해 그들의 성역을 습격했다.]
여래는 대신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들의 성역을 습격했다.
약한 성좌들과 신병들, 신계의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며 ‘역천’의 힘을 키우기로 한 것이다.
대신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이미 여래는 학살을 끝마친 이후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찬란한 성역이 모두 초토화되었다.
분노한 대신들이 모두 모여 여래에게 맞섰지만.
이미 여래의 역천은 힘을 모두 흡수하여 거대해진 상태였다.
[학살을 통해 힘을 모은 나는 대신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여래는 다수의 대신들과 정면으로 맞붙었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핏빛 가득한 싸움이 이어져갔다.
양측 모두가 크게 다치고 소멸 직전까지 다가간 순간.
[보살님과 미륵님이 다른 대신들과 함께 나타났지.]
성역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막기 위해 보살과 미륵이 나타났다.
그들의 뒤에는 이 사달과 관련이 없던 다른 대신들과 보살이 설득한 성좌들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나타난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태초신까지 대동하고서…….]
여래가 말한 ‘태초신’이라는 말에 처용이 집중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태초신께서 직접 나선 만큼, 싸움이 잠시 멈추었지.]
싸움을 잠시 중재한 태초신은 우선 여래에게 먼저 물었었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겠냐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처용이 궁금한 듯 여래에게 묻자 여래가 작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소멸한 금오도를 되돌리고 죽은 이들을 모두 살려준다면 멈추겠다고 했다.]
여래는 주먹을 거세게 쥐며 말했다.
당연히 여래의 말에 모든 성좌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감히 태초신한테 건방지다는 둥.
무례한 하계종을 당장 소멸시켜야 한다는 둥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태초신은.
-미안하구나.
여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들어 줄 수 없는 부탁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태초신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 대신.
-신법재판의 결과를 바꿀 순 있다.
태초신은 죽은 신법재판장, 천존이 내린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것으로 천년 간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영혼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연히 여래와 맞서던 대신들은 길길이 날뛰면서 항의했다.
특히, 원래 신법을 소유하고 있던 천교 측 성좌들은 여래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신법재판소를 남용했다.
태초신의 한 마디로 반발하던 성좌들이 입을 다물었다.
신법재판소는 성좌들 간의 원만한 협력과 약속을 위해 창조된 공간.
그 우주의 법칙이 적용되는 장소를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용한 것이 맞았으니까.
태초신이 중재에 나서고 있을 때, 보살 역시 여래에게 여기서 그만둘 것을 부탁했다.
더는 여래가 마신으로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신법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여래는 태초신의 말에 따라 신법의 이름을 얻었다.
동시에 지옥으로 떨어졌던 금오도의 영혼들을 구해내었다.
다만 모두를 구할 순 없었다…….
금오도를 완전히 소멸시키며 영혼마저 흩어진 이들도 있었으니까.
[내가 신법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맺어진 조약이 있었다.]
-화아아!
여래가 손을 들어 금빛으로 빛나는 두루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처용이 안을 볼 수 있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금은…… 깨져 버렸지만.]
두루마리 안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처용은 두루마리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미래에서…… 악신들과 전쟁할 당시에도 스승님께선 역천의 힘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여래를 향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약조 때문이었습니까?”
[맞다.]
처용의 말에 여래가 긍정했다.
“하지만, 신법의 조약이 깨졌는데-.”
[내가 역천을 봉인한 건 태초신과의 약조 때문이었다.]
신법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역천은 봉인한다.
이것이 태초신과 직접 맺은 약조였다.
[역천은 위험한 힘이니까.]
여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의 분노를 모두 갈무리한 여래는 태초신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가 경계할 만큼 ‘역천’의 힘은 위험했으니까.
그러나.
“하!”
여래의 말에 처용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스승님의 힘을 봉인한답니까?”
처용이 말하는 ‘그 자식’은 태초신을 향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 사달이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멍청한 태초신 놈(?) 때문이 아닙니까.”
태초신을 욕하는 처용의 말에.
[…….]
[…….]
성좌들이 멍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리고.
[큽, 아하하하!!]
카투라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망할 아버지가 인간한테 욕먹는 걸 볼 줄이야!]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군.]
미륵이 난감한 듯한 웃음을 짓고 얼굴을 쓸며 말했다.
[왜 태초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느냐?]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미륵이 물었다.
아무도 태초신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한 이가 없었으니까.
처용은 미륵의 말을 듣고는.
“처음부터 태초신이 나섰으면!”
일그러진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보살님이 상처를 받을 일도! 스승님이 신계에 피바람을 일으킬 일도 없었습니다!!”
처용은 신법재판소에서 마주한 선천적 신격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선천적 신격들의 대가리가 깡통인 이유가 태초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회귀 전부터 계속 궁금한 부분이었다.
선천적 신격들은 왜 오만한가?
그들은 왜 다른 이들을 하찮게 보는가?
인간을 보살펴야 할 이들이 왜 자신들만을 생각하는가?
왜 자신들의 이기심만을 위해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가?
선천적 신격들은 왜…… 인간보다도 못난 모습을 보이는가?
계속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의문이 조금 풀렸다.
“선천적 신격들의 아버지인 태초신이! 자식 교육을 똑바로 하지 않았고!”
처용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그 잘못 배운 태초신의 자식들이 순혈자들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오직 자기 욕망만을 채우는 선천적 신격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태초신이었다.
[하하! 정답이야!]
카투라가 웃음을 지으며 처용의 말에 대답했다.
[인간한테 이렇게 통쾌한 말을 들을 줄이야.]
카투라는 태초의 마수.
태초신의 실패작이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카투라는 자신을 실패작으로 낙인찍은 태초신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처용의 말이 너무나도 시원했다.
“태초신이면 뭐합니까?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처용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지금 처용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태초신의 업적(?) 중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배신자들을 만든 것도 태초신.
선천적 신격들이 멍청한 이유도 태초신.
회귀 전, 전쟁에서 도움이 되었을 여래의 ‘역천’을 봉인하고 못 쓰게 만든 것도 태초신.
그리고.
악의 종주, 조크-크타니드도 따지고 보면 태초신의 작품이었다.
이 중 절반 정도만 정상적이었어도 회귀 전 전쟁에서 참혹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똥(?)만 잔뜩 싸질러놓고…….”
분노를 곱씹으며 태초신을 욕하던 처용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보살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보살님.”
좀 전까지 처용이 태초신을 욕했기 때문인지 질문을 받은 보살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무엇이 궁금한가요? 계승자.]
그래도 처용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빛의 신……, 야훼가 유독 보살님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영 속 빛의 신은 유독 보살에게 심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회귀 전에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였었으니까.
[……잘 모르겠군요.]
보살이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훼-크타니드는 실패작이 아닌 성공작이야.]
카투라가 짜증이 일렁이는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성공작이요?”
처용이 반문하자.
[실패작인 우리랑은 다르게, 완벽하게 태어났거든.]
카투라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대체 그 실패작과 성공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처용이 카투라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르게…… 아버지 마음?]
“…….”
카투라의 말에 처용이 침묵하자 카투라가 작은 웃음을 보이고는.
[완벽하게 태어났으니까 오만한 거지. 심지어 지금은 태초신의 대리를 맡고 있으니까.]
“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거.”
카투라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용 역시 회귀 전 기억으로 빛의 신이 태초신의 대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태초신의 대리자이지 그가 딱히 하는 것은 없었다.
[야훼의 성격은 간단해, 말 듣는 놈은 좋아하고 말 안 듣는 놈은 싫어해.]
“보살님께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싫어하는 겁니까?”
처용이 짐작하듯 묻자.
[야훼도 자비의 대신을 자신의 성운에 끌어들이려 했으니까.]
카투라가 답해 준 말에 처용의 주먹이 거세게 쥐어졌다.
결론은……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카투라 님.”
[으응?]
처용이 부르자 카투라가 의문을 표했다.
“스스로를 실패작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실패작이 맞는걸?]
카투라가 작은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제가 볼 때 진짜 실패작은 야훼입니다. 아니 그는 망작(亡作)입니다.”
처용이 대답했다. 그가 볼 때 빛의 신은 그냥 망작이 아닌 개망작이었으니까.
“태초신이든 그 누구든 카투라 님을 실패작이라 말해도 제가 부정합니다.”
카투라를 똑바로 마주한 처용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훌륭한 신수(神獸)입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처용의 말에 카투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한테 위로를 받을 날이 올 줄이야.]
카투라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은 처용이 게이트를 열었다.
신법재판소 안에서 다짐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잠시 화풀이 좀 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화풀이?]
처용의 말에 여래가 궁금한 듯 묻자.
“빛의 신 동상…… 다섯 개만 무너뜨리고 오겠습니다.”
처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전혀 웃으며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환영 속에서 유독 보살을 적대했던 빛의 신.
처용은 그 모습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었다.
-우우웅!
게이트를 열고 처용이 빠져나온 곳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
이전 커맨더의 함선을 타고 미국에 왔을 때, 몰래 태룡전의 열쇠를 발동했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군.’
처용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빛의 신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교단을 자극하는 것.
성좌들에게는 화풀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처용의 계획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계획을 앞당겼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마침, 아레스의 신전 정화에 참여했던 성운들이 마인들을 잡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교단은 아직 큰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이 ‘마인들’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교단 역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우선…… 버지니아 주의 성당부터 시작해 볼까?’
그림자 속에 숨은 처용이 회귀 전 기억 속에 있는 성당들의 위치를 떠올리며 이동했다.
빛의 신을 모시는 성당들은 각각 지방의 지부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성당 앞에는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빛의 신의 동상이 자리해 있었다.
그건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성당을 방문하는 이들과 교단 소속 헌터들에게 축복을 주는 힘도 있었다.
처용은 그 동상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선물’을 남길 생각이었다.
빛의 신이 아주 좋아할 선물을…….
“철벽부-철가면.”
처용이 스스로의 얼굴에 철벽부를 붙이자.
-쩌저적.
강철이 처용의 얼굴을 감싸더니 이내 가면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전 아르테미스 던전에서 쓴 조커의 가면이 아니었다.
마치 검은 복면을 쓴 강도와 같은 모습.
그리고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이어져 있는 붉은 색상의 타오르는 듯한 문양.
가면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처용은 대 괴수용으로 만든 투박한 형태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철벽부-강철 가시.”
처용이 도끼에 철벽부를 부여해 형태를 바꾸었다.
도끼날에 마치 상어의 이빨과 같은 날카로운 가시들이 솟구쳤다.
투박한 형태였던 도끼가 아주 흉흉한 무기로 돌변했다.
처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끼에 검은 철 가루 같은 것들을 뿌렸다.
올림포스 성지에서 잡았던 안드라스의 화신체 파편이었다.
처용이 준비를 마치자 딱 좋게 첫 번째 성당에 도착했다.
목표는 빛의 신의 동상.
동상을 바라보는 처용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빛의 신의 성역을 직접 박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우드드득!
처용이 도끼를 거세게 쥐고 위로 치켜들었다.
동시에 암 속성과 화 속성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화르르륵!
흉악한 도끼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집행한다!”
처용이 크게 외치며 빛의 신의 동상을 도끼로 후려쳤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