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처용이 입을 열었다.
“전쟁 당시, 보살님은 후방에서 부상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처용이 회귀 전 있었던 일들을 조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방을 지키던 세력 중 하나가 천교였습니다.”
그 당시 옥황상제는 자진해서 후방을 지키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전방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을 때.
“부상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악마들이 공격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악마들이 저항군의 눈을 피해 후방을 급습했다.
그곳을 지키던 두 대신, 옥황상제와 보살이 권능을 발휘하여 잘 막아내나 싶은 순간!
“옥황상제가 뒤에서 보살님을 급습했습니다.”
새하얀 번개를 머금은 옥황상제의 오른팔이 보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뒤늦게 후방에 도착한 처용이 그 광경을 마주했었다.
“그 개새끼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처용의 말이 끝나자.
[이런!]
[그랬던 건가…….]
미륵이 탄식을 내뱉었고 여래가 눈을 감으며 말을 흐렸다.
[도대체…… 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보살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이건…… 내 실수이기도 하군.]
잠시 보살을 응시한 여래가 입을 열었다.
[신계를 뒤집어엎을 때 천교만큼은 없애버렸어야 했거늘…….]
여래의 푸른 눈동자가 엄동설한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감히, 조약을 어긴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처용은 자신 못지않게 분노하는 여래를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으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스승님.”
[그래, 너에게도 알려주는 것이 좋겠지.]
여래가 과거를 생각하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비록 전부를 이야기할 순 없지만-.]
[으이구! 이 답답이들 진짜.]
카투라가 돌연 여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리고.
[차라리 내가 ‘보여’주련다, 그냥.]
손을 앞으로 뻗으며 신력을 뿜기 시작했다.
[태초의 제약은-]
여래가 카투라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나는 버려진 자식이잖아? 망할 아버지가 만든 제약에 포함되지 않거든.]
카투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신법재판소 안에서 있었던 일만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렇군…… 고맙다.]
여래가 카투라의 말을 알아듣고는 감사를 전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카투라 님께서 도와주신 것 같군요.”
[그래, 답답하게 끊어서 듣는 것보단 현장을 보여주는 게 나으니까.]
카투라가 말함과 동시에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신력이 처용을 중심으로 물방울처럼 감쌌다.
[그럼 다녀와.]
미소를 지은 카투라가 처용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과거를 볼 시간이야, 미래에서 온 수호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물방울이 짙은 푸른색으로 변하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우우웅!
태룡전이 옅게 울림과 동시에 카투라의 앞에 시스템의 창이 나타났다.
[불필요한 행동을-.]
그것을 본 카투라는.
[요즘 인간들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들 말하더라고?]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시스템 창을 노려보고 말을 이었다.
[엿이나 까먹어, 망할 아버지.]
***
카투라의 신력으로 인해 시야가 암전되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슈우우.
마치, 물이 걷어지듯 듯 짙푸른 신력이 사라지며 시야가 돌아왔다.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자 이 장소가 어디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긴…… 신법재판소?”
단, 좌석이 비어있지 않고 성좌들이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그때, 처용이 있는 방향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마치 자연을 형상화한 듯한 녹음빛 머리카락과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화관.
하얀색과 분홍색이 섞인 선녀 옷.
“보살님!”
처용이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스르르.
보살은 처용이 보이지 않는 듯 처용을 지나쳐갔다.
아니, 처용을 통과했다.
마치 유령처럼…….
처용은 방금 상황으로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카투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엔 과거를 볼 시간이야, 미래에서 온 수호신.
그녀의 말대로라면 카투라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처용에게 과거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처용이 보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두 명의 노인이 보살의 앞을 막아섰다.
처용은 뒤에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노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길게 늘어진 흰 눈썹과 수염, 그리고 회색빛이 감도는 백발.
드높은 자존심을 드러내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뒷짐을 지고 있는 노인.
“옥황상제…….”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쥔 처용이 분노를 씹어뱉듯 원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당장 달려가서 저 면상을 짓뭉개고 머리와 몸통을 토막 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 환영일 뿐.
처용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오랜만에 뵙는군요. 천존 님.”
보살이 옥황상제보다 앞에 선 노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의 말에 처용 역시 앞에 선 노인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옥황상제보다 험한 인상을 가진 노인.
그는 천교의 전 주신이자 옥황상제의 형제인 천존(天尊)이었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나?”
천존은 보살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성운에 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보살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허허, 참으로 어리석군.”
대답을 들은 천존의 입에서 작은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천교로 온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거늘…… 참으로 답답하군.”
처용은 천존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저 개 같은 새끼가!’
고개를 들고 보살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 속에 번들거리는 감정은 ‘욕망’이었으니까.
“그대가 천교의 후궁이 되어준다면 내 신법재판장의 권한으로 이 모든 상황을 멈춰 보이겠소.”
천존의 말에 보살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때.
“어디서 선수를 치나!”
-파지직!
천존의 옆으로 번개가 치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윤기가 도는 금발 곱슬머리와 강인하고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닌 근육질의 남자.
무엇보다 그가 들고 있는 ‘번개’를 형상화한 것 같은 창.
‘아스트라페?’
처용이 그 창을 알아보고는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는 아테나의 아버지이자 올림포스 전 주신, 제우스였다.
“제우스.”
천존이 자신을 방해한 제우스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가.”
그 말에 제우스가 피식 웃고는.
“뭐라고 지껄이나? 상도덕도 없는 노인네가.”
귀를 후비며 걸걸한 욕설을 내뱉었다.
“뭐라!!”
천존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신력을 내뿜자.
“여기서 한 판 뜰까?”
제우스도 벼락처럼 몰아치는 거친 신력을 내뿜었다.
동시에 왼손을 뻗어 검은 낫을 소환했다.
오른손에는 아스트라페, 왼손에는 스퀴테를 쥔 제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내 아버지가 이걸로 할아버지의 성기를 잘라버렸지.”
천존에게 스퀴테를 겨눈 제우스가 말을 이었다.
“천 명의 후궁을 둔 천존의 성기가 잘리면 꽤 볼만하겠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결국, 천존 뒤로 빠져 있던 옥황상제마저 한 걸음 다가오며 신력을 내뿜었다.
그때.
“아예 여기서 끝장을 보시려는 겁니까?”
중후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제우스와 천존 사이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옅은 태양빛이 섞인 밝은 신력을 내뿜는 신.
그가 내뿜는 빛은 전체적으로 백색이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로도 보이는 신비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야훼-크타니드.”
천존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싸움을 중재한 신, 그는 빛의 신 야훼였다.
그러나.
‘크타니드!?’
처용이 천존의 말에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빛의 신의 이름이 야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크타니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시……?’
막 떠오른 짐작이 있었지만, 생각을 뒤로 넘기고 우선 상황을 지켜봤다.
“내 말을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보현!”
천존이 보살을 향해 경고 어린 음성을 내뱉고는 옥황상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제우스의 시선이 보살을 향하더니.
“괜찮소? 다치지는 않았소?”
재빠르게 다가와 보살의 손을 잡고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전 멀쩡합니다. 올림포스 주신.”
보살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잡힌 손을 빼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차가운 거 아니오? 난 그대를 걱정했는데.”
제우스의 말에 보살이 잠시 침묵하고는.
“……올림포스 주신께서도 이 상황을 만든 주범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제우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언제나 온화한 눈빛을 마주했었던 처용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제우스는 보살의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
“뭐, 그 말에 부정하지는 않겠소. 나 역시 진심으로 그대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짓고는.
“그래도, 기왕이면 날 선택해주길 바라오. 정말 잘해 줄 자신이 있으니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네가 대신이 되었다 해도, 하계 출신임은 변함이 없다.”
아직 자리에 남아있던 빛의 신이 보살을 향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 상황이 보살의 탓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하계종이면 하계종답게 조아리며 살아라! 여럿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빛의 신은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뒤를 돌아 나갔다.
“하아…….”
보살은 씁쓸함과 슬픈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우주의 인정을 받고 대신의 격에 올랐어도…….
인간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실이 답답했다.
솔직히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대신의 격에 올랐어도 이런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보살은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감히!!”
-스르릉!
화염의 절을 뽑아 들고 빛의 신의 뒷모습을 향해 검기를 날리며 격노를 내뿜었다.
-우우웅! 우웅!
분노를 가득 담아 날린 검기였지만, 이곳은 환영 속…….
검기는 그저 모든 것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다.
처용 역시 알고 있음에도 검기를 날린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보살의 앞에 나타난 대신급 성좌는 네 명이었지만.
주변에서 시선을 보낸 이들이 더 있었다.
그들 역시 각 성운에 속한 대신급 성좌들.
그리고 처용은 그들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쓸 만한 도구, 이용 가치가 있는 물건을 바라보는 눈빛.
처용은 그들이 갈망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수도 없이 마주했었던 눈빛들이었으니까.
“내 힘을 되찾는 대로!”
처용이 이를 아득바득 갈아대며 말했다.
“전부 대가를 치를 것이다!!”
보살은 처용에게 있어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보살이 당해서는 안 될 취급을 당했다.
특히 빛의 신…….
그 거만하고 오만한 신의 마지막 말이 처용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알아야 한다.’
처용이 분노를 천천히 갈무리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보살이 이런 취급을 당해야 했는지.
신법재판소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분노를 갈무리한 처용이 진정하고 집중하자.
“신법재판을 시작하겠다!”
가장 높은 단상에 선 신법재판장, 천존이 크게 외쳤다.
그러자 각 대신급 신격들이 중앙에 가까운 좌석에 자리했고.
각 성운에서 초대받은 자들이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다.
처용은 보살의 옆에 서며 이 상황을 지켜봤다.
그때.
-탕탕!
“죄인들을 끌어와라!”
천존이 금빛 용이 휘감긴 작은 망치를 내리치며 말하자 사슬에 묶인 여러 사람들이 끌려 왔다.
처용이 끌려오는 죄인 중 가장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
그의 얼굴을 확인한 처용의 표정에 놀람이 일렁였다.
이 환영 속에서 마주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얼굴이었으니까.
“……소룡?”
처용의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낡은 도복을 입은 짧은 머리와 두툼한 눈썹이 특징인 강인한 인상의 남자.
사슬에 묶인 채 강제로 끌려 왔음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 눈빛.
아무리 봐도 소룡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들도 자세히 관찰하자.
“……반야까지?”
모두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슬에 묶여 잡혀 온 이들 모두 태룡전의 금강역사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그들은 골렘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