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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128화 (128/726)

#128화

가장 높은 옥좌에 앉은 바알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하고는.

“나베리우스.”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예, 바알 님.”

낮은 좌석에 자리해 있던 악마 중 하나가 바알 앞으로 나타나 부복했다.

이마에 뿔이 돋아난 늑대의 머리.

짐승의 털이 아닌 검은 깃털이 자라나 있는 모습.

마치 늑대와 까마귀가 반반 섞인 듯한 형태.

그는 판데모니움 서열 24위이자 바알을 향해 충성하는 대악마 나베리우스였다.

“안드라스는 정체가 들통나 소멸한 듯 보입니다.”

나베리우스가 바알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고 있다는 듯 빠르게 보고를 올렸다.

“안드라스의 능력은 생각보다 하찮았나 보군.”

바알이 72개의 좌석을 밝히는 불꽃 중 꺼진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대악마 서열 63위 안드라스.

그는 힘의 서열이 낮다고는 해도 잠입과 이간질에 특화된 악마답게 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뒤흔들기 위해 그런 안드라스를 보낸 것이지만…….

“하위 서열은 하위 서열일 뿐이었던가?”

바알이 꺼진 불꽃의 빈 좌석을 노려보며 말하더니, 검은 손톱이 길게 자라난 검지를 내리그었다.

그러자.

-까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비어있는 63번째 좌석이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잠시 그것을 응시하고는.

“안드라스의 정체를 파악할 만한 성좌가 올림포스에 있었나?”

나베리우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의심이 가는 이는 임시 수장인 아테나와 성화를 쓰는 헤스티아입니다.”

바알의 질문을 받은 나베리우스가 빠르게 답하자.

“안드라스가 올림포스 놈들에게 발각될 확률이 낮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었나?”

고요한 분노가 섞인 바알의 음성이 나베리우스를 향했다.

“낮은 확률로 안드라스가 대신들에게 걸렸거나, 아니면 바알 님 말씀대로 그가 하찮은 것입니다.”

나베리우스는 바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혹은, 무모한 짓을 저지른 포세이돈으로 인해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포세이돈이 다른 성좌를 노리려 무리하다가 대신의 자격을 잃고 성운에서도 퇴출당했다는 소식.

악마들은 첩자로 있던 안드라스를 통해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가장 중요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는…….

안드라스가 뜬금없이 소멸해 버린 상황.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안드라스로 인해 현재 바알의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를 보좌하는 나베리우스도 마찬가지.

나베리우스가 바알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을 때.

“애초에.”

-화르르륵!

바알의 오른쪽에 자리한 좌석.

그곳에서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굵은 음성이 울렸다.

“하위 서열인 놈한테 기대를 거는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바알을 향해 건네는 목소리.

그 말을 들은 바알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옥좌.

그곳에 자리한 대악마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거대한 덩치의 붉은 드레이크와 비슷한 모습.

용암처럼 붉게 일렁이며 타오르는 피부.

머리에 돋아난 바알 못지않은 거대한 두 개의 뿔.

“안 그런가?”

그가 팔걸이에 턱을 괴며 바알을 향해 말하자.

“디아블로.”

바알이 자신을 향해 말한 대악마.

판데모니움 서열 3위이자, 같은 삼천마 중 하나인 디아블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곳은 악의 제전입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바알 앞에 부복한 나베리우스가 디아블로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크흐흐.”

그 모습을 본 디아블로가 비웃음을 흘리며 나베리우스를 응시했다.

“꼬우면 네놈이 삼천마의 자리에 앉지 그러냐.”

디아블로의 대답에 나베리우스의 인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디아블로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이 자리에 모인 악마들 중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대악마들의 서열 교체 혈전.

디아블로는 나베리우스에게 자신이 맘에 안 들면 혈전을 신청하라고 넌지시 말한 것이었다.

위험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분란을 일으키지 마라. 디아블로.”

바알의 왼쪽, 디아블로와 같은 높이에 자리한 옥좌에서 말이 들려왔다.

잿빛 피부와 새하얗게 흩날리고 있는 긴 머리카락.

바알, 디아블로와 같이 이마에 돋아난 거대한 두 개의 검은 뿔.

검은 불길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가진 미남 형태의 대악마.

“메피스토…….”

디아블로가 작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말을 건 대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의 왼쪽 옥좌에 자리한 대악마.

그는 판데모니움 서열 2위이자, 삼천마 중 하나인 메피스토였다.

“이곳에서의 규칙을 잊지 마라. 디아블로.”

메피스토가 디아블로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크크…… 규칙이라.”

디아블로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우리가 규칙을 말하는 것도 정말 웃긴 일인데 말이야.”

본래 판데모니움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악마들이 세력 싸움을 하는 세상이었다.

그중 가장 거대한 세 세력이 바로 바알과 디아블로, 메피스토가 군주로 있는 세력이었다.

그렇듯 각각 크고 작은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며 끊임없는 싸움을 이어가던 곳이 판데모니움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분의 말씀을 거역할 셈인가? 디아블로.”

바알이 디아블로를 향해 넌지시 말하자.

“……그럴 리가.”

디아블로가 못마땅한 듯 바알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자신이 삼천마 중 마지막 서열이 된 이유.

그것은 자신이 판데모니움에 나타난 ‘무언가’와 마지막까지 맞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반면, 바알은 거대한 힘을 가진 그를 마주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했다.

디아블로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알이 시선을 돌려 다시 나베리우스를 응시했다.

“나베리우스.”

“예, 바알 님!”

나베리우스는 바알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빈 대악마의 자리는 네가 알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돌아가라.”

명령을 받은 나베리우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분께서 직접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바알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울리며 말했다.

“성좌들의 세상을 짓밟아버리고 우리들의 세상을 구축할 것이다.”

***

올림포스 본부에서의 회의가 끝났다.

제시카는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성지에서의 하루 정도 휴식을 권했지만.

각각 바쁜 일정을 보내는 이들이었기에 모두 거절했다.

대부분 회의장을 나가자, 꽉 차 있었던 대회의장이 한산해졌다.

회의장 내부에 제시카와 메리, 그리고…….

“할 말이 뭔데.”

남아있는 처용이 메리와 제시카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신이 남은 이유는 메리가 전한 귓속말 때문이었다.

처용의 말에.

-탁!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아테나의 화신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우우웅.

주변의 배경이 흔들리더니, 마치 중세 귀족 저택의 응접실 같은 곳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임시 성역을 구현한 건가?’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아테나는 성지인 이 장소에서 주신의 권한으로 임시 성역을 구현한 듯 보였다.

주변 환경이 완전히 바뀌고.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일렁이는 화신체가 아닌 선명한 모습의 아테나가 처용에게 말했다.

“직접 강림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처용이 아테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자.

[이렇게 직접 마주해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아테나가 작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동시에.

[건방진 인간…….]

아테나의 옆에 나타난 티케가 처용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처용이 그런 티케를 보며 마치 놀리듯 어깨를 으쓱이자.

[난 지금 화신체가 아니라 거의 본신 상태인데?]

티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처용이 그런 티케를 가만히 응시하며 읊조리자.

[이…….]

티케가 잠시 멈칫했다.

아직도 처용이 대악마의 화신체를 산산이 부숴버리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으니까.

그때.

[쓸데없는 권위는 내세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처용의 옆자리에서 여래가 나타나며 말했다.

[내 제자한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여래의 모습을 본 티케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키지 마세요. 티케.]

아테나가 티케의 어깨를 잡으며 감싸주듯 말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테나가 여래를 향해 감사를 전했다.

[모두 제자가 한 일이지 제가 감사를 받을 일은 없는 것 같군요.]

[후후, 그런가요?]

여래의 대답에 아테나가 작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아테나의 신관, 제시카가 여래를 조심히 관찰했다.

다른 성좌들에게 듣기로는 처용의 성좌는 아주 무서운 신이라고 했었다.

조금 과장해서, 과거 신계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

그러나 직접 마주한 그는 신성한 분위기를 내뿜는 신선과 같은 모습이었다.

제시카가 여래를 관찰하고 있을 때.

“왜 따로 만나자고 한 겁니까?”

처용이 본론을 물었다.

그러자.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시카가 처용을 향해 부탁하듯 말했다.

“…….”

처용이 제시카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묵하자.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하진 않으마.]

아테나가 작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협력해 주지 않겠느냐?]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처용은 아테나의 말을 듣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선, 메리가 알아낸 정보를 이야기해 줄게.”

그러자 메리가 손바닥을 치며

“나와라. 상황판!”

자신의 스킬을 발동했다.

-스르르.

메리의 머리 위로 마나가 모이더니 적당한 크기의 화이트보드가 만들어졌다.

“제니퍼를 추적하다가 알아낸 사실이 있어.”

화이트보드에 손짓을 하며 메리가 설명을 시작하자.

-슥슥슥.

화이트보드에 여러 글자와 사진들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한 처용은.

“로스차일드에서 문제가 생겼나 보네?”

제시카와 메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메리가 살짝 놀란 듯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시카 역시 놀란 듯한 눈치였다.

“제니퍼의 뒤를 봐주는 세력에 로스차일드가 있는 건가?”

처용이 짐작하듯 넌지시 묻자.

“……맞습니다.”

제시카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로스차일드는 대부분 네가 장악하지 않았나?”

처용이 제시카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회귀 전, 처용은 로스차일드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 뿐.

이들에게 정확히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로스차일드는 지금,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시카가 작은 한숨을 쉬더니 가문의 사정을 설명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 파벌로 나뉜 상태였다.

제시카를 중심으로 모인 신진 개혁파 세력.

이들은 성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나아간다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었다.

반면에 가문의 어른들과 장로들이 주축으로 모인 보수파 세력.

이들은 지구의 패권은 성좌가 아닌 인간이 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끼지 않고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중립 세력.

로스차일드는 이렇게 나뉘어 있는 상황이었다.

“가주님은 휘하 몇몇 가문들과 중립을 지키고 계십니다.”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마치자.

“제니퍼를 돕는 건 보수파 세력인가?”

처용이 넌지시 물었고.

“맞습니다.”

제시카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사촌인 제니퍼는 보수파 핵심 인물의 자녀입니다.”

“큭, 지구의 패권을 쥐겠다는 양반들이 하는 꼬라지 하고는…….”

제시카의 말을 들은 처용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여러 이유와 원한이 엮이고 엮인 터라…… 가문 상황이 많이 복잡합니다.”

“거기에 마인들도 엮여 있나?”

처용이 제시카의 말을 들으며 짐작하듯 말하자.

“너무나도 잘 파악하시는군요.”

제시카가 놀람을 표하며 말했다.

“사냥꾼은 사냥감에 대해 잘 알아야 하니까.”

처용이 말을 마치자.

“메리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게.”

메리가 화이트보드에 보기 쉽게끔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숨어있는 배신자들을 찾은 곳은 모두 로스차일드와 연관이 있는 곳이었어.”

화이트보드에 잡힌 배신자들이 누구인지 사진이 나타나고 어디서 잡혔는지 지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배신자들을 잡다가 우연히 알아낸 사실인데, 마인들이 아시아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어.”

메리가 화이트보드에 한국이 포함된 아시아 지도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러시아, 중국, 일본, 심지어 한국까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아르테미스의 신관 역시 네 나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아테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네 말대로 천교 쪽을 알아봤는데,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어.]

티케 역시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천교 쪽은 제가 미륵님을 통해 운장에게 도움을 구해 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여래가 아테나와 티케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교가 중국과 러시아 쪽을 장악한 거대 세력이긴 했지만.

그들을 견제하는 세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교를 견제하는 대표 세력이 바로 무신전 성좌들의 병사들이 모여 만든 길드였다.

“로스차일드에 배신자들에 천교에 이어서 마인들까지…….”

처용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협력에 대한 대가는?”

처용이 제시카와 아테나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대가를 요구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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