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111화 (111/726)

#111화

혁수에게 허물을 전한 처용이 곧장 태룡전으로 돌아오자.

[왔느냐? 제자야.]

여래와 미륵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테나와의 대화는 어떠셨습니까?”

처용은 그가 왜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질문했다.

과연 여래와 만난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했다.

[확실히 다른 선천적 신격들과는 다르더구나.]

옅은 미소를 지은 여래가 신법재판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말했다.

[과거와는 다르게 ‘고정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과거? 아테나와 마주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여래의 말에서 의문을 느낀 처용이 물었다.

[내가 선천적 신격들과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알고 있느냐?]

“마찰이 있었다. 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처용은 회귀 전 여래가 이 주제를 꺼내는 것을 피했기에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하하, 겨우 마찰일 리가?]

처용의 말에 옆에 있던 미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 당시 네 스승의 손에 죽은 선천적 신격들이 몇이나 될까?]

미륵의 말을 들은 처용은 짧게 생각하듯 고민하더니.

“……놈들이 스승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처맞을 짓을 했겠지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 안에는 여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다.

“분명, 그 머저리들이 무슨 짓을 했으니 스승님이 화가 나셨던 것이 아닙니까?”

처용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대답한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래가 이유 없이 다른 신격들을 공격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하, 훌륭한 통찰(洞察)이구나.]

처용의 대답에 미륵이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십 년을 겪어봤으니까요.”

증오와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처용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병신(病神)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회귀 전, 그들의 멍청한 짓거리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봤었으니까.

무엇보다 여래 역시 자신처럼 인간에서 신격에 오른 자였다.

애초에 선천적 신격들이 그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천적 신격들이 여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이 분명했다.

혹은 그를 자극할만한 대형 사고를 쳤다거나…….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마친 처용은 여래를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만약, 스승님과 같은 상황이 저에게 일어났다면, 저는 더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처용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회귀 전에 일어난, 선천적 신격들 중 순혈자들의 배신.

자신은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그들에게 칼을 갈고 있었으니까.

[……고맙구나.]

처용의 말에 여래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너에게도 그 당시 일을 말해 주고는 싶지만.]

“눈앞의 문제가 우선인 것 같습니다.”

여래는 처용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고.

[청룡에 대한 아테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자야.]

아테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말해 주었다.

처용은 신법재판소 안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듣자.

“…….”

여래의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이윽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생각을 정리한 처용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처용의 말에 여래가 동의했다.

“천문과 언문은 어땠습니까?”

머릿속에 계획을 정리하던 처용이 여래에게 물었다.

무신전 소속 성좌인 천문의 신과 언문의 신.

-천문과 언문이 있었더라면…….

무신전의 수장, 태무신 운장이 회귀 전에 처용에게 한 말이었다.

그들은 지구가 무너지기 전, 배신한 성좌들의 암살 시도로 소멸했었다.

그로 인해 처용이 만나지 못한 이들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이들이더구나.]

여래가 운장 옆에 있던 천문과 언문을 생각하며 말했다.

[특히, 언문의 신은 해전무신과 같은 이곳, 한반도 출신이더구나.]

“그런가요?”

처용은 언문의 신이 한반도 출신인 줄은 몰랐기에 신기한 듯 말했다.

“궁금하네요.”

해전무신의 정체는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출신인 언문의 신은 과연 누구일지 궁금하면서도 기대되었다.

***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고등학교.

“제발…….”

연아가 반으로 접힌 종이를 꼭 쥐고 마치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조상부터 모시던 신들이 진짜 있다면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집안에서 모시는 신들을 언급한 후.

“제-에바-알!”

천천히 반으로 접힌 종이를 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안 주면 내가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라도 주마.

집에 돌아갔을 때, 오빠인 처용이 했었던 말.

반에서 2등 이상을 한다면 무려 천만 원을 준다는 약속이었다.

연아는 무려 천만 원이라는 상금이 걸리자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노래방, 게임 등.

주변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정말 진심전력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주변 친구들조차 자신을 미쳤다고 말했다.

이제 공부해 봐야 얼마나 가겠냐고.

정말 천만 원을 주겠냐고 그녀에게 멍청하다며 손가락질했다.

연아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말 하루하루 시간을 알뜰하게 투자하며 최선을 다했다.

천만 원이라는 상금도 상금이었지만.

한 번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었다.

“제발…….”

그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지금 이 종이 안에 있었다.

이윽고 반으로 접혔던 종이가 서서히 벌어졌고.

눈동자를 움직여 가장 중요한 반 등수를 훑었다.

그 결과는?

[한연아 / 반 등수 / 2/65]

놀랍게도 정확히 반에서 2등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탁!

“되-앴어!! 으하하하하!!”

의자를 박차고 책상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난 연아가 만세를 부르며 쾌재를 질렀다.

그 모습에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이 미친 사람을 보듯 황당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연아야.”

누군가가 연아를 불렀지만.

“내가 이겼어! 으하하하!!”

승리감에 도취한 연아는 잘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웃었다.

“천만 원이! 이제 내 손안에-.”

-탁. 탁.

“한. 연. 아?”

교실 단상에 있던 담임 선생님이 단상을 두들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부르자.

“아? 넵. 죄송합니다…….”

정신이 든 연아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승리의 기쁨이 가시지 않는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축하한다 연아야.”

연아의 담임 선생님은 그녀가 최근 공부에 열중한다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고3인데도 공부에 전혀 관심을 둔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성적 역시 바닥에 가까웠고…….

그러던 그녀가 천만 원의 상금이 걸려 있다며 돌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적표를 직접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시험도 아닌 무려 고3의 기말고사였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때문에, 연아의 답안지와 시험지를 모두 확인했었다.

그러나 부정행위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시험지에 가득한 고민과 풀이의 흔적을 봐서는 순수히 그녀의 노력이 맞았다.

“정말로 해낼 줄은…….”

담임 선생님은 제자의 인간승리(?)를 보며 옅게 웃었다.

기말고사 성적 결과가 모두 배분되자.

“모두 정말 고생했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쉬어라.”

담임 선생님이 학교 방침에 따라 일찍 하교를 선언했다.

기쁨에 겨워하는 학생들이 하교 준비를 할 때.

“축하해.”

차분하고 바른 인상의 소녀가 연아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정말로 해냈네? 다행이야.”

“윤아야. 네가 안 도와줬으면, 아마 못 했을걸?”

연아는 자신을 축하해주는 동급생,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은혜는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갚을게! 전교 1등!”

그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윤아의 어깨를 잡으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전교 1등인 윤아.

연아는 혼자서는 성적을 올리기 힘들다고 판단해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다.

윤아는 연아의 간곡함과 필사적인 부탁에 얼떨결에 수락했고.

같이 공부하며 과외 비슷하게 도움을 주었다.

솔직히 불가능할 줄 알았지만……,

연아는 보란 듯이 성공해 버렸다.

“오빠 새끼한테 천만 원 받아오면, 백만 원은 너 줄게!”

애초에 윤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천만 원은 받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거, 안 줘도 되니까. 괜찮아.”

윤아는 자신에게 백만 원을 주겠다는 연아에게 당황하며 말했다.

“흐, 대기업 딸이라 돈 많다 이거야?”

연아가 윤아를 놀리듯 말하자.

“대기업 아니라니까?”

연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윤아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윤아의 부모님이 이름 있는 기업을 이끄는 기업인은 맞았다.

같이 공부를 하며 친분이 깊어진 둘이기에 연아는 이를 놀리듯 말한 것뿐이었다.

“아무튼! 정말 고마워, 아픈 데도 날 도와주고.”

연아가 윤아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였다.

처음 공부를 도와달라 부탁할 때는 몰랐었다.

그러나 같이 공부를 하면서 그녀가 악몽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전철역 사고 후에 겪는, 일종의 후유증과 비슷했다.

“아픈 거 아니라니까. 병원에서도 이상이 없다고 했고.”

윤아는 정말 괜찮은 듯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번 주말에는 집에 가는 거야?”

“응, 오빠 새끼한테 천만 원 받아와야지! 흐흐흐.”

윤아의 말에 연아가 악당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너도 이번에 우리 집에 와 볼래? 사찰이긴 하지만, 있을 건 다 있어. 근처에 시내도 있고.”

“응? 아냐, 이번 주말에는 기숙사 나가기 전에 짐 정리를 미리 해야 해서.”

“어쩔 수 없네. 다음에 보자!”

윤아에게 인사한 연아가 뒤돌아 나가자.

-탁탁.

“후-.”

책들을 정리하고 가방에 넣은 윤아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연아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요즘 들어서 악몽이 심해지고 있었다.

어둠이 뭉쳐져 만들어진 듯, 시커먼 사람들과 괴물들에게 쫓기는 악몽.

-위험하다.

악몽의 시작은 두 개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며 위험하다고,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부터였다.

그 목소리의 경고가 끝나는 순간.

-잡아라!

-크르르!

-크아학!

사방에서 괴물들이 나타나며 죽일 듯이 자신을 쫓아왔다.

가까스로 괴물들을 피해 달아났지만.

-잡았다.

그 괴물들을 조종하는 듯 보이는 시커먼 인영이 자신을 붙잡았다.

그 검은 사람에게 살해당하려는 순간.

-커헉!

누군가가 그 검은 사람을 죽였고 그가 쓰러지면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울지 마라.

자신을 구해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무표정의 남자가 그 말을 전하는 순간.

눈이 떠지며 식은땀이 흐른 채 악몽에서 벗어났다.

잠자리에 들거나, 피곤해서 깜빡 졸았다거나 할 때마다 꾸는 악몽.

그 악몽 속, 마지막에 구해준 그 남자는 전철역에서 자신을 도와준 헌터였다.

아무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 냉혹하고 잔인한 듯 보였지만.

죽어가는 자신의 엄마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악몽을 어느 정도 꾸었을 때는 헌터 협회를 찾아갈까도 생각했었다.

전철역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는 말을 핑계로 그를 만난다면.

무언가 이 악몽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학업 시험을 앞에 두고 악몽에 신경 쓸 수는 없다 생각했다.

‘시험도 끝났으니 한 번 찾아가서 물어나 볼까?’

단순히 그를 만난다고 악몽이 끝나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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