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110화 (110/726)

#110화

초대받은 성좌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화아아!

순백색과 황금빛이 섞인 빛이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윽고.

“이곳은…….”

점점 시야에 드러나는 장소를 바라본 아테나가 중얼거렸다.

마치 관중석처럼 좌, 우측에 나열된 계단식 좌석.

중앙 끝에는 가장 높은 자가 있을 법한, 권위가 드러나는 옥좌와 같은 화려한 좌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좌석들에는 아무도 없이 비어있을 뿐이었다.

그 대신.

“왔군.”

이 장소의 중앙, 좌석에 앉은 모두가 볼 수 있는 넓고 낮은 원형의 제단.

이 공간의 중심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선과 같은 하얀 분위기를 가진 신, 여래가 아테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긴 수염에 도복을 입은 운장과, 검은 용포를 어깨에 걸치듯 두른 미륵이 함께 있었다.

“운장께서 계시는 것으로 봐서 우리가 잘못 온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 상황을 관찰하듯 옅은 웃음을 보인 언문이 중얼거렸다.

초대받은 성좌들이 모두 중앙에 다다르자.

“이곳은…… ‘신법재판소’로군요.”

아테나가 주변을 관찰하듯 둘러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당신이 ‘신법’을 가져간 것이 맞았군요. 혈선, 아니.”

아테나는 눈앞의 여래를 바라보며 긴장감을 담아 말을 이었다.

“역천(逆天)의 신.”

그녀는 여래가 신법이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의 신명을 불렀다.

역천의 신.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법칙을 부수는 성좌.

그리고, 인간 중에서 두 번째로 신격을 얻었던 자.

역천은 여래가 가진 본래의 신명이었다.

아테나의 입에서 나온 ‘혈선’과 ‘역천’이라는 말에 언문과 천문이 놀란 듯 여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가 어떤 존재이고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신법재판소.

연옥처럼, 태초신과 그를 보좌했던 신들이 창조한 공간 중 하나.

성좌들이 중대사를 논하며 그 일을 결정하는 장소이자 우주의 법칙이 적용되는 장소였다.

원래는 별들의 의회도 이곳에서 행해져야 했었다.

그러나.

“……맞다. 내가 너희들에게서 ‘빼앗은 곳’이지.”

여래의 말대로 그가 선천적 신격들에게서 이 장소를 강탈했기에 쓸 수 없었다.

애초에 여래가 ‘신법의 대신’의 자리에 오른 이유가 이 장소.

신법재판소를 선천적 신격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는 신법의 이름을 버리고 이 장소를 너희들에게 돌려주려 했었다.”

여래는 단 한 번도 ‘신법’이라는 이름도, 개인의 욕망으로 신법재판소를 원한 적도 없었다.

아주 먼 과거, 선천적 신격들이 저지른 만행만 아니었다면…….

“아직도 신법을 잡고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테나가 여래에게 궁금증과 진지함을 담아 질문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과거 여래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새하얀 옷과 머리카락을 성좌들의 피로 물들였었던 여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던 당신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겁니까!

마신(魔神)이 되어버린 그를 가로막았던 아테나가 했었던 말이었다.

-그 세상을 부순 것이 너희 선천적 신격들이지 않느냐!!

여래는 자신을 가로막았던 아테나와 다른 신격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일갈했었다.

-너희가 내 세계를 부순 만큼! 나 역시 너희들의 세계를 부수겠다!!

단 한 명의 반신을 막지 못한 결과, 신계에 불었던 피바람.

아테나가 과거의 일을 생각할 때.

“……돌려주려고 했었다.”

여래가 아테나의 눈빛을 서늘하게 받아치며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너희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면…….”

“…….”

“…….”

그 모습에 티케는 침을 삼키며 긴장했고.

아테나는 여래의 말을 바로 이해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악신들에게 협력하는 선천적 신격들.

더 정확히는 그들이 오직 자신의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 저지르는 짓들이었다.

과거처럼…….

“과거의 일은 여기까지 합시다.”

여래가 눈을 감으며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그 일을 다시 논하려고 대화를 하자고 한 겁니까? 올림포스 주신.”

“저도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아테나는 여래의 말에 대답하면서 이 장소에 있는 다른 성좌들을 응시했다.

“관리자님은 그렇다 쳐도.”

관리자, 미륵에 대해서는 아테나 역시 알고 있었다.

전 올림포스 주신이었던 제우스와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무신전의 수장께서는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의문을 담아 질문한 아테나의 시선이 무신전의 수장, 운장에게 향했다.

“난 관철의 대신님에게 부름을 받았소.”

운장이 아테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천문과 언문, 그리고 내 아우는 두 분에게 허락을 구했고.”

“……이곳에서 무엇을 논할지 아십니까?”

아테나가 운장을 향해 묻자.

“모르오. 다만, 우리 무신전만큼은 혐의가 전혀 없으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다 하시더군.”

운장은 미륵을 잠시 응시하며 대답했다.

“혐의요?”

아테나는 운장의 대답에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여래와 같이 있는 관리자.

그가 부른 무신전의 성좌들.

무신전은 혐의가 없다는 말.

그리고, 지금 모여 있는 이 장소까지.

“설마…….”

“하하, 제우스와는 다르게 총명하군.”

아테나의 생각을 읽은 듯 미륵이 그녀를 칭찬하며 웃었다.

그 모습에 아테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신법의 약조를-.”

“악신들과 협력하는 선천적 신격들 중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겠지.”

경악하는 아테나의 말에 대답한 미륵이 신법재판소의 가장 높은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우웅!

짧은 빛이 일렁이더니 그의 손에 두루마기가 생겨났다.

“내가 관리자의 권한으로 신법재판소의 기록을 직접 확인했다.”

미륵이 모두가 볼 수 있게 중앙에 두루마기를 펼치자.

[■■ ■■■…….]

[■■ ■■…….]

원래 글자들이 빼곡해야 할 두루마기 안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아테나가 두루마기에 직접 손을 대 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흠, 제우스의 딸은 범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 모습을 유심히 본 미륵이 여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리자인 미륵과 신법재판소를 소유한 신법의 대신 여래만이 아는 사실 중 하나.

신법의 약조를 어긴 자가 약조가 적힌 두루마기에 손을 대면 반응이 일어난다.

그러나 두루마기에 손을 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는 아테나에게서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이럴 능력도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여래의 말을 들은 아테나는 확실하게 부정하며 말을 이었다.

“무신전은 확실히 혐의가 없군요. 해당 사항 자체가 없었으니…….”

과거 여래가 선천적 신격들과 맺은 약조.

그 약조는 연옥의 시련이 생겨나기 훨씬 전에 있던 일이었다.

신법의 약조는 약조를 맺은 이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성좌들만의 맹약.

즉, 무신전의 성좌들은 약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약조에 관여할 수도, 약조를 어기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했다.

“청룡에 대해 논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여래가 아테나에게 말하며 훼손된 두루마기를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이 악신들의 끄나풀인지 아닌지를…….”

주워든 두루마기를 미륵에게 건넨 후 여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신전의 수장님을 부른 이유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나눌 대화의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장 님은 그렇다 치지만…….”

여래의 말에 아테나가 무신전의 다른 성좌들을 보며 말을 흐렸다.

“무신전 내부에서도 내가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 모습에 운장이 아테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올림포스 주신께서 믿는 티케와 헤르메스처럼.”

동시에 아테나의 옆에 있는 티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상황을 쭉 관찰한 아테나가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는 단순 여래와의 협상만을 위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청룡에 관한 대화가 목적이 아니었군요.”

아테나의 말에 여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하하, 확실히 바람둥이 애비와는 전혀 다르군.”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아테나가 마음에 든 미륵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중요한 문제이니 물어보지요. 청룡을 어찌할 생각입니까?”

여래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아테나를 향해 말했다.

그의 말에 아테나는 지금껏 고민해 왔던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청룡을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청룡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성운의 힘을 키우기 위해 같은 성좌를 죽이고 힘을 흡수한다?

정의의 이름을 가진 아테나는 그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제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대신.

그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성좌가 다른 올림포스 성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상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래가 잠시 측은함을 담아 아테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러나 빠르게 측은함을 지우고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포세이돈이 청룡을 공격한다면 올림포스의 주신으로서 어떻게 할 겁니까?”

“저는…….”

여래의 말에 고민하던 아테나는.

“저는 포세이돈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한편.

처용은 협회 재고관리 센터에서 혁수를 만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광물…… 아니, 뭐라고 했지?”

혁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처용이 가져온 것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태초의…… 생명체의 허물?”

카투라를 뭐라고 표현할지 잠시 고민한 처용은 적절하게 대답했다.

“이거, 가공이 가능할까요?”

처용이 혁수에게 질문했다.

카투라에게서 받은 허물.

그것도 단순한 허물이 아닌 그녀의 본체가 만 년 전에 벗었다는 허물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가공할지 고민하던 처용은 결국 혁수를 찾았다.

그 역시 허물의 가공 방법을 모를 가능성이 컸지만.

혼자서 고민하는 것 보다 주변의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것이 나으니까.

“하…….”

처용의 질문에 혁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하는 망치를 꺼냈다.

투박한 모양인 실용적인 형태의 대장장이 망치.

“자네 미스리움을 알고 있나?”

“드워프들만이 생산할 수 있는 광물이죠.”

“그렇다면, 블랙 미스리움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혁수는 자신의 망치를 처용에게 보여주며 질문했다.

“최강의 미스리움이죠.”

처용은 회귀 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드워프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광석인 미스리움.

블랙 미스리움은 드워프 중 최고 장인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강의 미스리움이었다.

“이 망치가 블랙 미스리움로 만들어진 망치야.”

혁수가 자신의 망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커맨더와 같이 세계를 돌아다녔을 때.

인연을 맺은 이종족들 중에는 드워프들도 있었다.

혁수의 대장장이 기술도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배운 것이었다.

그리고 커맨더에게 은혜를 입은 드워프가 선물로 준 것이 바로 혁수의 망치였다.

“잘 봐.”

망치를 들고 처용이 가져온 허물로 다가간 혁수는.

“흐랴압!”

기합을 내지르며 허물을 향해 망치를 내리쳤다.

-깡!!

아주 단단한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혁수가 내리쳤던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고.

“흠집도 안 났어! 무려 블랙 미스리움 망치로 내리쳤는데.”

망치를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주무르며 처용에게 말했다.

“하……, 당장 방법이 없겠네요.”

처용은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혹시 싶어서 그에게 보여주긴 했지만, 역시나 무리였다.

그러나.

“우리는 무리일지 몰라도.”

혁수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눈빛으로 허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가능할지도 몰라.”

“……드워프들이요?”

처용이 짐작하듯 혁수에게 물었다.

“그래, 특히 드워프들 중에서도 최고장인들, 그들이라면!”

엘프들이나 오크들처럼 드워프들이 있는 세계와 연결된 게이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잖아요?”

인류와 이종족 간에 맺어진 상호불가침조약.

처용은 이 조약을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드워프들에게 받은 징표가 있으니까. 갈 수 있어.”

혁수가 처용을 향해 진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것 좀 빌려주지 않겠나? 내가 직접 그들에게 보여주고 알아 오겠네.”

“더 드릴 수도 있습니다.”

처용은 그런 혁수를 향해 마주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가 드워프들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블랙 미스리움에 버금가는 재료……, 그들이 본다면 환장할 것이네. 하하하!”

혁수가 기대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워프들은 장인정신이 가득한 기술자들.

특히, 희귀하고 신비한 재료에 집착하는 이들이었다.

태초의 생명체의 허물.

처용이 이것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발견된 적이 없던 아주 희귀한 재료였다.

“오랜만에 직접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용은 혁수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그로 인해 드워프들과 인연이 생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만약 드워프 장인들이 이 허물을 가공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하! 나야말로 고맙네! 날 믿고 이런 걸 보여주고 맡겨 줘서.”

혁수 역시 처용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가 협회를 위해 정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있었지만.

자신을 신용하고 귀한 재료를 맡겨 준 것이 더욱 고마웠다.

“내 반드시 알아내 오겠네!”

허물을 바라보는 혁수의 눈빛에는 장인정신이 불타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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