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108화 (108/726)

#108화

별들의 의회장.

각 성운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날.

그곳은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콜로세움 형태의 장소였다.

연에 한번 주기적으로 갖는 성운 간의 회담이긴 했지만.

서로 간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거나 중요한 일, 혹은 위기가 생겼을 때 모이기도 했다.

지금의 경우는 전자와 후자 모두 해당되는 날이었다.

“간만에 보는군.”

“하하, 오랜만이오!”

각기 다른 성운들의 성좌들이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안부를 묻는 분위기가 있는 한편.

“천교는 요즘 병사들이 줄어든다지요?”

“사고가 터진 올림포스만 하겠는가?”

성좌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등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그때.

-끼이이이.

열 개의 콜로세움 입구 중 한 곳이 열리며 적은 인원들이 들어왔다.

그 중, 중앙에 있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

살짝 웃는 듯한 인자한 인상에 정갈하게 다듬어진 수염.

마치 농부가 입을 법한 하얀 삼베 옷과 상투를 튼 머리에 밀짚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

그가 일행들과 함께 빈 자리를 차지하자 그들에게 다른 성좌들의 시선이 몰렸다.

“허허.”

그 시선을 받은 밀짚모자를 쓴 성좌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들께서 이리 관심들을 보이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언문…….”

그를 알아본 선천적 신격 중 하나가 그의 신명을 부르며 경계했다.

밀짚모자에 하얀 삼베 옷을 입은 성좌.

그는 무신전의 성좌 중 하나인 언문(言文)의 신이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였다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언문의 모습을 여러 성좌들이 경계심을 섞어 바라보고 있었다.

언문이 공개적인 자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쯧, 복장하고는…….”

올림포스 측 성좌 중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화려한 옷을 입은 금발의 미남.

“중요한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옷이 그게 뭔가?”

올림포스 측 태양신 아폴론이었다.

“거지의 신이었나?”

그가 비웃음과 조롱을 섞어 말하자.

“허허, 나는 이 옷이 좋기에 입은 것인데, 뭐 문제라도 있소?”

언문이 팔짱을 끼고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문제가 있지! 성좌들의 중대사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그런 하찮은 복장을 하다니!”

아폴론의 말에 몇몇 성좌들이 동의하며 수군거렸다.

“그것도 생전에 왕이었다는 놈이 농노나 입을 법한 그런 천박하고 하찮은-.”

“난 이제 왕이 아니오만? 그리고 농민들이 하찮다?”

언문의 신이 아폴론의 말을 자르고 한쪽 눈썹을 크게 올리며 말했다.

“농민들을 모욕하는 것이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잘 모르나 보오?”

언문이 아폴론의 말에 진심으로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그런 천박한 놈들을!”

아폴론에게서 진심 어린 혐오가 느껴지는 말이 나왔다.

과거,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제우스에게서 목장을 청소하는 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분노와 짜증이 가득 담긴 상태에서 농민들의 일을 벌로 받았기 때문인지 그들을 혐오했다.

“천박?”

아폴론의 대답에 언문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그럼 내 물어보겠소이다. 그대들의 성운에는 대지와 농업의 여신님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소.”

올림포스의 대신 중에는 땅과 농업의 여신이 있었다.

“농민들이 천박하다면, 그들을 보살피는 농업의 대신님도 천박하다는 것이오!?”

“……그럴 리가!”

언문의 일갈이 섞인 말에 잠시 당황한 아폴론이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한순간 당황스러움을 보인 시점에서 그는 이미 언문과의 기 싸움에 밀린 것이었다.

“내 선천적 신격이 이리도 무식할 줄은 몰랐소이다!”

역으로 언문이 아폴론을 몰아붙이듯 말할 때.

“한반도의 인간은 예의를 갖춰라!”

누군가가 언문을 향해 명령하듯 소리쳤다.

나이가 아주 많은 듯 보이는 인상에 새하얀 눈썹과 수염이 길게 늘어진 노인.

그가 위엄을 과시하듯 말하자, 언문이 자신을 향해 소리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 반갑소오?”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삐딱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태상노군?”

동시에 노인, 태상노군을 향해 아주 짧은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태상노군은 건들거리는 태도를 보인 언문을 보며 눈썹을 크게 일그러트렸다.

“감히! 네 뿌리인 환인의 성운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가!”

한반도의 시조로 여겨지는 환인.

먼 과거 그는 태상노군의 성운인 천교 출신이었다.

“……그럼 극진히 예의를 담아 한마디 하지요.”

언문은 태상노군의 노성에 자세를 바로 하고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지랄하고.”

살짝 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자빠졌네~, 허허허허!!”

그의 입에서 마치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환인? 허허허! 그분을 이단이라며 내쳤던 천교가 무슨 자격으로 그리 말하는지 모르겠소이다? 허허허!”

언문이 크게 웃으며 비웃자 태상노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놈!”

“네 뿌리이니 예를 표해라~ 그러면 어이쿠! 너~무 무섭군요?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오?”

태상노군의 말을 자른 언문이 한껏 비웃음을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허허허!”

분노에 몸을 떠는 태상노군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언문이 조롱을 계속하자.

“네 이놈!!”

격노한 표정을 지은 태상노군이 자리를 박차 일어났다.

“거참, 노인네가 목청도 좋소?”

언문은 분노한 태상노군을 향해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지랄하다 염병(染病)이 와서 쓰러질 수도 있소만?”

씨익 웃으며 언문이 도발을 계속했다.

결국.

“천벌을 받거라! 이 하찮은 것!”

-콰콰! 콰르릉!

천교의 상위 신격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인 새하얀 번개.

태상노군이 언문에게 ‘천벌(天罰)’을 쏘아 보냈다.

언문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담은 천벌을 마주하고도 태연해 보였다.

그에게 천벌이 당도하기 직전!

-쿠르르릉!

언문의 옆에서 푸른 번개가 쏘아졌고 천벌과 충돌하여 서로 상쇄되었다.

“별들의 의회에서 함부로 무력을 드러내는 이가 어디서 예를 논하는 것인가?”

언문의 옆에 앉아 있던 성좌가 태상노군을 향해 낡은 부채를 겨누며 말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수염과 마치 선비처럼 정갈한 복장을 한 남자.

“감사합니다. 천문.”

언문이 옆자리에 앉은 성좌, 천문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언문.”

-탁!

천문은 언문의 감사에 부채를 탁 피며 옅은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러자.

“천문! 네 이놈!”

그 여유로운 모습에 더욱 열이 받았는지.

“이랑진군!”

태상노군이 휘하 성좌들을 향해 명령하듯 외쳤다.

“천교의 사자들은 당장 저 하계종들을 내 앞에 끌고 와라!”

노성 섞인 태상노군의 말에 그의 옆에 있던 검은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은 성좌.

이랑진군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오른쪽 주먹을 뻗으며 무력을 드러낼 때.

-탕!

누군가가 이랑진군의 주먹을 한 손으로 잡으며 막아섰다.

“여, 흑견(黑犬).”

이랑진군을 막아선 이가 즐거운 듯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한판 붙어 볼까?”

얼굴에 가득한 빳빳하고 거친 수염.

의회장 내부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우람한 덩치.

등 뒤에 물결처럼 팔자로 휘어진 창을 매단 성좌.

“강완(强腕)…….”

이랑진군이 자신을 가로막은 성좌, 강완의 무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천교의 성좌들과 신병(神兵)들이 이랑진군을 도우려 강완의 무신을 공격하려 했다.

그때.

“멈춰라.”

언문의 입에서 강하고 굵은 음성이 울렸다.

그러자.

“이 무슨!?”

“이건!?”

천교 측 성좌와 신병들이 당황하며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태상노군을 포함한 다수의 성좌들이 놀란 듯 언문을 바라봤다.

-우우웅.

언문이 펼친 낡은 책 위에서 그가 말한 ‘멈춰라’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장수들의 일기토에 끼어들다니, 천교의 구성원들은 정말 예의가 없는 것이 맞나 보오?”

권능을 사용한 언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내 문신(文神)이라 하여 허수아비인 줄 알았소이까? 허허허.”

“이 하계종 놈이 같잖은 재주를!”

태상노군이 언문의 권능을 지워버리기 위해 신력을 피우고.

동시에 강완의 무신과 이랑진군의 주먹이 서로 충돌하려는 순간!

“모두 그만하시오!”

올림포스 측,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여성이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콰쾅!

강완의 무신과 이랑진군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어 둘을 막아섰다.

서로 충돌하려는 두 주먹을 양팔을 뻗어 잡아채고 버티는 남자.

마치 투구처럼, 머리 위에 씌워진 사자의 머리와 그 아래로 이어진 가죽 갑옷.

강완의 무신 못지않은 우람한 덩치와 근육.

야생의 느낌이 물씬 나는, 머리 뒤로 길게 이어진 거친 산발 머리.

“너는……!”

“여, 헤라클래스. 여전히 힘이 좋구만?”

이랑진군과 강완의 무신이 자신들을 가로막은 성좌. 헤라클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이곳에 싸우러들 왔습니까!”

올림포스 측에서 다시 고함이 울렸다.

웨이브가 진 기다란 금발 머리를 한 여신.

드레스나 아름다운 복장인 다른 여신들과 다르게 그녀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개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중재한 성좌는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 아테나였다.

“당장 싸움을 멈추시오!”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태상노군이 아테나에게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그는 아테나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는 신 중 하나였다.

비록 그녀가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이라고 해도 제우스가 아닌 그의 딸은 자격조차 없다 여겼으니까.

그때.

-탁!

천교 측 신병들과 성좌들을 막던 언문이 들고 있던 책을 탁 접었다.

그러자 제자리에 멈춰 있던 이들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소란을 일으켜 미안합니다. 올림포스 주신.”

언문은 아테나를 향해 정중한 목소리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를 건넸다.

동시에 강완의 무신도 뒤로 물러나 언문의 옆에 자리했다.

태상노군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뭐…….”

어쩌라고?

뒷말을 삼킨 언문이 마치 그를 놀리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이!”

그 모습에 태상노군의 화가 다시 치솟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 미천한 하계종들도.

그들을 당장 자신의 앞에 꿇리지 못하는 이 상황도.

제우스도 아닌 그의 딸이 자신에게 명령하듯 말하는 것도.

하계종들이 그녀를 ‘주신’이라고 말하며 인정한 것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올림포스 주신으로서 말합니다. 당장 멈추시오. 태상노군.”

아테나가 분노를 드러내는 태상노군에게 다시 한번 말하자.

“정식 승계도 받지 못한 년이 어디서 주신의 이름을 쓰는 것이냐!”

태상노군이 아테나에게 일갈했다.

그 순간.

“……아스트라페.”

아테나가 조용히 읊조렸고.

-쾅!!

그녀의 옆에 황금빛을 내뿜는 창 한 자루가 나타났다.

마치 번개처럼 날카롭게 각이 진 창날.

그 아래, 창날과 창대 사이를 감싼 여덟 장의 천사 날개.

올림포스의 상징이자 주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화의 무구.

“다시 한번 말해 봐라. 태상노군.”

아스트라페를 쥔 아테나가 태상노군을 향해 창끝을 겨누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교를 대표하는 당신이 꺼낸 그 말은 옥황상제가 내게 한 말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아테나의 목소리는 일정하고 잔잔한 듯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위엄 어린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니오. 내 실언했소.”

결국, 아테나가 가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한 태상노군이 표정을 구기며 자리에 앉았다.

“상대를 좀 봐 가면서 깝쳤어야지, 멍청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쯧쯧쯧…….”

언문은 자존심을 높이려다 망신당한 성좌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외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오. 올림포스 주신.”

“멈춰 주어서 감사합니다. 언문의 신.”

아테나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다른 성좌들과 달리 깔끔하게 사과하는 언문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놀라운 권능을 가지고 계셨군요.”

아테나가 언문이 사용했던 권능을 다시 상기하며 놀라운 듯 말했다.

신병들은 몰라도 성좌들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권능이었으니까.

“올림포스 주신께서 칭찬해 주시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허허.”

언문은 짧게 웃으며 아테나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진정들 되신 것 같으니 슬슬 본론을 말해도 되겠습니다.”

콜로세움에 자리한 성좌들을 한 번 쭉 둘러본 아테나가 입을 열었다.

“우선, 악신들에게 협력하는 성좌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의논해 보겠습니다.”

분위기를 잡은 아테나가 별들의 의회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

평소처럼 전철역을 둘러본 처용이 태룡전에 돌아오자.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제자야.]

여래가 처용에게 궁금한 듯 질문했다.

“무엇을…… 아?”

처용은 여래의 말에 의문을 표하다가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신력의 힌트를 가르쳐 준 것 말씀이신가요?”

[그래, 다른 이도 아니고 올림포스 수장의 신관이지 않느냐?]

“음…….”

여래의 물음에 잠시 생각한 처용은.

“미련할 정도로 올곧고 정직한 사람은 답답할지 몰라도 싫어하진 않습니다.”

제시카를 관찰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여래에게 이야기했다.

“올림포스 총 길드장이자 로스차일드 가문에 소속된 사람에게 은혜를 입혀 둔 겁니다.”

지금까지 봐온 제시카라면 큰 도움을 준 처용에게 호의적으로 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통해 순혈자들의 세력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관의 성장은 성좌에게도 큰 힘이 된다.

제시카를 통해 아테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아테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이를 여러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고작 그 힌트만으로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처용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온몸에 신성력을 순환시키며 마나 명상을 하는 것.

신성력이 있는 신관만이 가능한 신력 수련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마, 엄~청 고생할 겁니다.”

처용이 제시카의 고생을 확신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