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제시카는 협회장과의 회담이 끝났음에도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한국에 온 이유는 사건의 진상을 직접 알아보기 위함이었으니까.
약 나흘 동안 한국에 머물며 올림포스 한국지부들을 방문하여 직접 조사에 나섰다.
이 일에는 기존에 지부들을 조사했던 권백호가 동행하여 도움을 주었다.
제시카는 협회장과 백호가 협력해준 덕분에 길드 본부에서보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워 글래디에이터 소속이었던 헌터들 중 무고한 자들은 올림포스 중앙 본부 소속으로 옮기겠습니다.”
제시카가 태양 마차 길드 한국지부장, 최민식을 보며 말했다.
올림포스 중앙 본부.
제시카가 한국에 오기 전에 만든 올림포스 내부의 새로운 세력이었다.
그들은 아테나의 가호를 받은 이들, 즉 제시카의 직속 헌터들이었다.
워 글래디에이터 소속이었던 헌터들은 아테나의 신전에서 새로 가호를 받을 예정이었다.
성좌의 가호를 바꾸는 것.
원래는 헌터와 성좌 간에 상성 문제가 있었지만.
임시이긴 해도 아테나는 올림포스 주신의 자리에 있는 성좌였다.
주신의 권한으로 휘하 성좌의 가호를 받은 병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시카 님.”
최민식은 올림포스 총 길드장이 직접 내린 지령에 토 달지 않고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워 글래디에이터는 어찌 되는 겁니까?”
궁금한 듯 최민식이 제시카에게 질문하자.
“이제부터 올림포스에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는 없습니다.”
제시카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에 오고 처용을 만난 후, 하루가 더 지났을 때.
-전쟁신의 가호를 모조리 수거할 것이다.
아테나가 직접 의지를 전해 왔었다.
제시카는 자신의 성좌가 전한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이제부터 전쟁신은 성좌로 활동할 수 없다.
헌터, 즉 병사를 양성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그들을 신전으로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헤리스에게서 따로 들은 말은 없었나요?”
“워 글래디에이터 소속이었던 헌터들을 잘 보살피라고 하셨습니다만…….”
제시카의 질문에 최민식이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다른 올림포스 길드가 도움을 요청하면 잘 도와달라는 말 빼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최민식의 대답을 들은 제시카는 옆에 있는 메리에게 빠르게 눈짓하고는 말을 이었다.
“최민식 지부장.”
“네.”
“혹시, 길드장이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은 명령을 내렸을 때는 메리를 통해 나에게 연락하세요.”
제시카의 말과 동시에 메리가 최민식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벽에 부착할 수 있는 날개 모양의 장신구.
통신용 아티팩트에 부착하면 메리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알겠습니다. 제시카 님.”
최민식은 많은 생각을 하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태양 마차 한국지부를 나온 제시카와 메리가 향한 곳은 헌터 협회였다.
“덕분에 수월하게 일을 마쳤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제시카의 감사 인사에 협회장 역시 감사를 전했다.
그녀는 약속대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정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덕분에 상당히 꼬일 뻔한 일들을 수월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피해를 받으신 분들은 저희가 따로 보상하겠습니다. 그리고.”
제시카는 협회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했다.
“한국의 두 번째 S급 헌터에게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날 왜 찾나?”
-스르르륵.
제시카의 뒤편 벽에 진 그림자 속에서 처용이 나타났다.
처용은 그저 그녀가 이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결과를 듣기 위해 잠시 온 것이었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제시카와 메리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참, 언제 봐도 귀신같은 능력이구먼.”
협회장의 옆에 자리한 백호가 처용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메리도 몰랐는데…….”
메리가 제시카와 처용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듯 말했다.
그녀는 혹시나 처용이 근처에 있나 싶어 오늘 아침부터 감각을 넓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네 감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원리를 알았으니까.”
처용은 메리의 감지 능력을 파악하고는 간단하게 파훼한 것이었다.
패시브 스킬 뒤통수의 눈, 자신을 추적하는 이를 자동으로 알려주는 능력.
‘추적하려는 마음이나 생각을 비우고 추적하면 된다.’
처용의 파훼법은 모순적이었지만,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시전자의 개성을 지워 자연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동화경.
처용은 비단 육체만을 자연에 동화하는 것이 아닌, 마음까지 자연에 가까워지도록 하여 생각을 비웠다.
나 자신이 자연 상태가 되어 마음까지 무(無)로 만드는 것.
자면서도 생각을 하며 꿈을 꾸는 것이 인간이었다.
절대로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몇 날 며칠 움직이지 않고 마나 명상을 하는, 선인의 수련을 받은 처용에게는 가능했다.
“원리를 안다고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겁니까?”
제시카가 황당한 표정을 급히 수습하며 말하자 처용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날 왜 찾았는데?”
처용이 본론을 묻자.
“청룡에 관한 올림포스 주신 회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시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회의실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주 중요한 주제였으니까.
“답은?”
처용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묻자.
“회의 결과는 ‘보류’입니다.”
“……그렇군.”
제시카의 말에 처용은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아직 여래와 아테나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아테나는 우선 시간을 끌 목적으로 올림포스 주신 회의를 소집한 것 같았다.
협회 사람들은 지금 이 분위기가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들이 당황스러워할 때.
“메리가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줄게.”
메리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회의 결과는 보류이지만, 다음 주신 회의 전까지 청룡을 찾는 건 전면 중지하기로 했어.”
메리의 말에 협회 사람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다음 주신 회의는?”
“별들의 의회 다음.”
처용의 질문에 메리가 검지로 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런가, 그럴 시기였나?”
“역시…… 이것도 알고 있구나?”
메리는 처용의 대답을 듣고 침음을 흘렸다.
별들의 의회는 매년 마다 한 번씩, 각 성운들의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평범한 인간은 물론 신관이라고 해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이번에 별들의 의회에서 다뤄질 주 주제는 바로 아레스의 신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악마가 성좌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은 처음 발생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아레스의 신관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아레스가 대악마와 손을 잡은 정황까지 밝혀졌다.
이번 별들의 의회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중요했다.
그리고 별들의 의회 다음날이 여래가 아테나를 찾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용케 시간을 벌었군?”
“이번 별들의 의회는 중요하니까.”
메리,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티케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포세이돈이 지랄 발광을 했을 텐데 말이야.”
처용은 올림포스 주신 회의를 상상하며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하-.”
잠시 처용을 못마땅하게 본 메리가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처용의 예상대로 포세이돈은 주신 회의에서 나온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테나가 별들의 의회를 언급하며 충분하게 설명을 했지만…….
그는 듣지도 않고 자리를 박차 나가버렸다.
당연히 처용의 성좌, 여래와 만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아테나의 윗세대인 선천적 신격들은 혈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기피하거나 치를 떨었으니까.
“통제가 안 되나 봐?”
“끄응…….”
처용이 웃음을 지으며 던진 말에 메리가 답답한 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바다의 대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테니까.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오션 엠퍼러 길드를 감시할 생각입니다.”
제시카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고작 그거로는 안될 텐데?”
처용이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
제시카는 처용의 대답에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오션 엠퍼러 길드는 총 길드장인 자신의 말보다 성좌인 포세이돈의 말을 우선시할 것이다.
“포세이돈이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순간.”
처용이 제시카와 메리, 그녀 안에 있는 티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나는 그의 신전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메리,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티케가 경악하며 대답했다.
그때.
“하아아-.”
답답한 감정을 쏟아내듯 아주 깊은 한숨을 몰아낸 제시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시카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가루로 만들든 폭파시켜 버리든, 저는 더 이상 수습하지 않을 겁니다.”
진심이라는 듯 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제시카?”
메리와 그녀 안에 있던 티케가 동시에 당황했다.
“애초에 하지 말라고 잘 설명을 해 줘도 바보짓을 하는 놈들을 더는 감싸주고 싶지 않습니다.”
제시카가 말한 ‘바보짓을 하는 놈들’ 중에는 올림포스 길드원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성좌인 아테나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다른 성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명하네.”
처용이 제시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보다 더 위험한 것이 멍청한 아군이니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이번에……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제시카 역시 진심이라는 듯 말했다.
“제시카…….”
메리는 제시카를 측은하게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세상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산하 길드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제시카의 노력을 흩어버리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제시카의 입장에서 충분히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한국까지 와서 사고를 수습하는 이유가 산하 길드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이었으니까.
“티케.”
“으, 응?”
처용의 말에 메리, 그녀 안에 있던 티케가 반응하며 의문을 표했다.
“당신이 정말 아테나를 돕는 성좌라면, 내 말을 잘 생각해 보고 그녀에게 전하십시오.”
처용은 메리 안에 있는 티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세계보다 형제들을 우선시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
“그 형제들이 정말 세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너, 그 말은…….”
처용의 말에 티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되묻듯 말을 흐렸다.
그러자.
“과연 아레스 하나일까!?”
처용이 메리의 물음에 강하게 말했다.
“대악마와 손을 잡은 머저리 같은 성좌가 과연 아레스 하나일까? 올림포스에만 있을까!”
“…….”
“…….”
제시카와 메리는 처용과 처음 만난 날, 치킨집에서 그가 전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천교를 조심해라.
왜 처용이 그런 말을 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처용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제시카가 말했다.
“메리.”
제시카가 메리를 부르자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듯 협회장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최민식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통신용 아티팩트였다.
“혹시라도, 데이비드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려 한다면 먼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림포스 길드장님.”
웃음을 지은 협회장이 진심으로 제시카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동안 제시카를 쭉 관찰한 협회장이 개인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녀는 다른 고위직 헌터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었다.
헌터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과 정의감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고 옳은 길을 가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협회장이 제시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좋은 거 하나 알려주지.”
처용이 제시카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올바른 선택의 대가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지금까지 제시카의 행동을 관찰한 처용은 그녀를 통해 한 가지 변수를 만들 생각이었다.
“네?”
제시카가 처용의 말에 의문을 품을 때.
-신성력으로 마나 명상을 유지해 봐.
처용이 제시카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 지금 뭐라고?”
전음을 들은 제시카가 처용에게 의문을 표할 때.
“힌트는 줬다.”
이 말을 끝으로.
-스르륵.
처용이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제시카는 처용이 사라진 곳을 잠시 응시하다가.
‘신성력, 그리고 마나 명상……, 설마?’
무언가를 깨달은 듯 머리가 번뜩였다.
자신이 예상한 것이 맞다면 그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제시카는 처용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고유의 ‘신력’을 깨우치는 것에 성공한다면.
올림포스를 제대로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가문’까지 바로잡을 수 있었다.
악마들에 대한 정보에 더불어 신력에 대한 힌트까지.
그녀는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으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