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성좌?”
처용이 메리를 응시하며 중얼거린 말과 동시에 방 안에 가득하던 신력이 사그라졌다.
공간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지자 협회장과 태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협회장과 태민을 보호하던 백호 역시 힘을 거두었다.
신성력을 갈무리한 제시카 역시 메리와 처용을 번갈아 보며 당황했다.
처용이 메리에게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 어머나?”
메리 역시 처용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리고는 당황한 음성을 내었다.
“성좌가 어떻게 하계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거지?”
처용이 의문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의 말에 협회장과 태민, 백호까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메리를 바라봤다.
“드, 들켰는데…….”
메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제시카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운 상황.
“……다시 묻지.”
-스르릉.
처용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공간에서 화염의 절을 꺼내 들었다.
“시스템의 제약을 무시하고 어떻게 하계로 내려온 거냐.”
성좌가 하계로 내려올 방법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말해.”
처용의 말에는 그저 신력만을 분출하여 자신의 격을 보일 때와는 다르게 살기가 묻어났다.
그러자 제시카가 팔을 들어 메리를 보호하듯 감싸며 일어섰다.
“자, 자네!”
“잠시만요. 처용 님!”
그 모습에 백호와 태민이 당황하며 처용을 불렀다.
“이 상황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처용은 화염의 절을 메리에게 겨누며 말했다.
“성좌가 하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악신들도 가능하다는 얘기니까.”
처용은 겉으로 살기를 보이며 강압적인 태도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처용이 회귀 전에도 보지 못한 경우였으니까.
그때.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어 상시 강림하는 형태로 활동할 수는 있다.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지만…….]
처용의 궁금증에 미륵이 답을 주었다.
[하지만, 흥미롭구나? 저 안에는 두 인격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저 몸의 주인과 신격이 공존한다고요?’
처용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강림은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를 짓누르고 신이 활동하는 개념이었으니까.
[그래.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관이면서 신인 상태? 흠……, 흥미롭구나.]
처용은 미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
“저, 저기이…….”
메리가 자신을 가로막은 제시카의 어깨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메리의 이야기부터 좀 듣지 않을래?”
“…….”
잠시 침묵한 처용이 살기를 거두고 화염의 절을 집어넣었다.
처용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미륵의 말 때문이었다.
“후-.”
위험한 상황이 지나간 듯 보이자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처용이 답을 요구하는 듯 메리를 바라보며 침묵하자.
“내가 성좌임을 알았으면 좀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는데.”
“…….”
메리가 옅게 웃음을 지으며 처용에게 말하자 처용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계속 응시했다.
“내가 이래 뵈도 대단한 성좌인-.”
“티케(Tyche).”
“……어, 어? 어엇?”
단번에 정체를 파악 당한 메리, 티케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떠본 것인데 맞았군.’
처용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후보들을 나열하고 가장 적당한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 아테나.
그녀를 돕는 신 중 가장 가까운 이는 헤르메스였지만, 그가 직접 하계에 내려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헤르메스와 같이 아테나를 돕는 신 중, 하계에 강림하여 그녀를 도와줄 만한 신은 몇 없었다.
그중에서도 아테나의 심복이면서 헤르메스와 가까운 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헤르메스의 신관 메리와 같은 몸을 공유하는 올림포스 성좌.
그녀는 행운과 번영의 여신 티케였다.
“신이 인간을 상대로 그리 당황하면 어떻게 합니까?”
“으으…….”
옅은 웃음을 지은 처용의 말에 메리가 분한 듯 주먹을 쥐며 침음성을 흘렸다.
“너,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인간이 신력까지-.”
“제 질문이 먼저입니다.”
메리의 말을 자른 처용이 경계심을 거두지 않은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 너무 무례한-.”
“제시카.”
제시카가 처용의 태도를 지적할 때 메리가 손을 들어 저지하고는.
-케리케이온.
처용에게 귓속말로 말해 주었다.
“이 이상은 말할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처용은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케리케이온은 헤르메스의 지팡이.
티케가 말한 것은 신관에게 내린 복제품, 성물이 아닌 진짜 케리케이온을 말한 것이었다.
지금의 메리 안에 있는 티케는 그 지팡이의 권능을 이용한 듯 보였다.
“당신이, 올림포스의 직통 전령이었군요.”
처용이 이해가 된다는 듯 말했다.
회귀 전, 그러니까 제시카가 길드장들에게 살해당하기 3년 전.
헤르메스의 신관 메리가 돌연 실종되었었다.
그 당시 제시카가 그녀를 찾는 데 몰두한 것을 보면, 자의에 의한 실종이 아니었다.
아마도…… 메리의 정체를 파악한 올림포스 신들이 신관들을 이용해 미리 살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너무 태도가 무례한 거 아냐? 나 성좌인데?”
“아까 말했다시피.”
처용은 메리의 말에 팔짱을 끼며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제가 인정한 신격들을 제외하고는 신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는 신을 모시는 신관이잖아.”
“신이라고 다 같은 신인 줄 아시나 본데…….”
한숨을 크게 내쉰 처용이 말을 이었다.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악신들은 제쳐두고 족보 꼬인 집안싸움만을 일삼는 당신들을 존중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처용의 말에는 경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성운 중 하나인 올림포스가 허망하게 망한 이유는 그놈의 집안싸움 때문이었으니까.
처용이 볼 때, 순혈자들이라는 집단이 생긴 것도 선천적 신격들이 자식 교육을 똑바로 하지 않아서였다.
괜히 악신 아레스가 패륜의 신이라고 불렸을까.
“지금 당신네들이 하는 짓거리는 차원 수복을 돕기는커녕 방해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겁니까!”
결국, 듣다 못한 제시카가 자리를 박차며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맞아, 악신들에 대해서도 네가 뭘 안다고-.”
메리 역시 표정을 굳히며 제시카의 의견에 동의할 때.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희들이다!!”
처용의 입에서 노성이 퍼져 나왔다.
“판데모니움의 악마병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놈들을 다스리는 대악마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회귀 전의 지옥과도 같은 싸움을 상기하며 경고하듯 말했다.
“대악마들이 거주하는 만마궁의 중앙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도!”
판데모니움의 중심.
그 안에 조용히 힘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악의 종주.
그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분노를 담아 한껏 소리를 내지른 처용은 진정하려는 듯 짧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테나의 전령이라면 똑똑히 전하십시오.”
분노를 거두고 진정한 듯 보이는 처용에게 메리가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들이 꾸물거리는 동안 악신들에 의해 세계의 균열은 점점 벌어질 것이고.”
“…….”
“하계의 중심이 되는 지구가 무너지는 순간, 신계도 끝장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우리도! 노력하고 있어!”
메리가 처용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자.
“크, 흐흐, 노력을 한다는 게 성운의 힘을 키우기 위해 지구를 돕는 다른 성좌를 잡아먹는 겁니까?”
처용이 비웃음을 섞어 대답했다.
“뭐?”
“포세이돈이 청룡을 잡아먹으려는 걸 당신이 몰랐을까? 헤르메스가 몰랐을까? 아테나가 몰랐을까!”
처용이 분노를 담아 묻자 메리, 그 속에 있는 티케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 청룡을 확보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중이었지만.
점차 찬성 쪽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이었다.
“대악마와 손을 잡고 성운의 힘을 키우는 것도, 그 하찮은 노력에 해당하나!?”
다시 처용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올림포스라는 거대 성운의 성좌가 그걸 몰랐다?”
“아테나가 그럴 리 없잖아!”
발악하듯 대답한 메리의 말에 처용이 분노를 조금 가라앉혔다.
“……그 말 만큼은 믿겠습니다.”
처용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씩씩대는 메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했다.
“청룡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까?”
“……인간인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흐, 흐흐.”
메리의 말에 잠시 비웃음을 보인 처용이 표정을 바로잡았다.
“이건 경고다.”
처용의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전함과 동시에 눈빛이 붉게 변했다.
“당신네들 성운이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청룡을 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메리가 밀리지 않겠다는 듯 처용의 눈빛을 직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올림포스 세력 자체가 세상을 무너뜨린다 판단하고 전부 없애버릴 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쿠구구.
처용이 신력에 더불어 한 가지 힘을 더 방출했다.
[신살자(神殺者) / 칭호]
[수많은 신격을 살해한 증거.]
[신격을 지닌 대상과 전투 시, 방어 불가능한 피해를 추가로 가합니다.]
[신력 스테이터스가 높을수록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회귀 전 악신들을 무수히 죽이며 얻었던 칭호.
처용은 그 칭호를 활성화시키고 신력에 신살자의 힘을 섞었다.
메리가 그 힘을 알아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너…… 성좌를 소멸시켰어?”
“악신들을 죽였지 성좌는 죽인 적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처용이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여차하면 성좌도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 신을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 세계의 법칙과도 같은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불가능을 해낸 인간이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인간이었다.
당장 올림포스 전체에 이 사실을 전하고 눈앞의 인간에 대해 조치해야 했다.
그러나.
신살의 힘이 섞인 처용의 신력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는…… 혈선(血仙)의!”
처용은 메리의 말을 듣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처용이 내뿜는 신력에는 신살의 힘과 더불어 한 가지 힘이 더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전해주거라. 제자야.]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래가 처용에게 올림포스에 자신의 의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제 성좌님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처용은 메리를 똑바로 마주하며 여래의 말을 읊었다.
“올림포스에 불었던 피바람을 다시 보고 싶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라고.”
“!!”
그 말에 메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방금 처용이 전한 말로 확신했다.
과거 신계를 피바람으로 몰고 갔었던 반신.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드러냈다.
눈앞의 인간이 정말 그 혈선의 신관이라면 섣불리 건들 수 없었다.
그의 역린을 건든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었는지, 직접 목격한 신 중 하나가 바로 티케였으니까.
메리가 침음성을 삼키며 안절부절못할 때.
“어? 하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은 듯 당황하며 말했다.
그리고.
“아테나가 전해달래.”
메리가 처용을 바라보며 방금 받은 메시지를 전했다.
“대화를 하고 싶다고.”
“알았다. 라고 전해주십시오.”
처용은 그녀의 말에 여래의 대답을 전해주었다.
“후-, 너무 성좌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
메리,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티케가 자신을 향해 반성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처용이 했었던 말들을 하나하나 다시 생각을 해 보고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
“우리도…… 아테나도,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당신들뿐이겠죠.”
처용은 메리, 그녀 속에 있는 티케, 그리고 그녀를 통해 이 상황을 확인한 아테나를 생각하며 말했다.
“나머지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
메리는 처용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한 가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처용이 침묵하자 메리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신격을 얻은 거야?”
신격을 얻은 인간이 종종 나타나기는 했었지만.
눈앞의 인간은 고작 20여 년 정도 살아온 꼬마였다.
얼마 살지도 않은 인간이 선천적 신격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보여줬다.
아무리 그가 혈선의 신관이라고 해도 믿어 지지가 않았다.
메리의 질문을 무시할까 하다가 잠시 멈칫한 처용은.
“……판데모니움은 지구보다 시간편이 느리게 흐르죠.”
잠시 침묵한 후 적당히 이야기했다.
“판데모니움에서 악마들과 수도 없이 싸워보십시오. 신격이 안 생기나.”
지금 상황에서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수도 있는 적당한 핑곗거리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