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류마가 일족의 생존자들이 놀라지 않도록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류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들 게이트를 넘는 순간.
-으헉!?
-어억!?
-크윽!?
세피아를 포함한 전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성한 신력이 가득한 환경에 노출되는 순간.
몸으로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일족들을 보며 류마가 난색을 표했다.
“애초에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처용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살을 바라봤다.
그녀는 처용을 마중 나온 듯 미리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마치 이 사태를 예견한 듯이…….
[어쩔 수 없습니다. 계승자.]
그녀가 처용에게 말하며 주저앉은 뱀파이어들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태생이 어둠이라 태룡전의 환경에 바로 적응하기가 어려우니까요.]
뱀파이어들 앞에 다가선 보살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신력으로 만들어진 연분홍빛의 연꽃이 피어났다.
[후-.]
보살이 피어난 연꽃을 가볍게 불자 연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듯 흩어지며 날아갔다.
이윽고 흩날리는 연잎들이 뱀파이어들에게 닿자.
-으…….
-으어…….
그들은 짓눌리는 압박감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조금은 나아지겠죠.]
처음 루나와 류마가 태룡전에 왔을 때 보살이 내려준 축복.
그 축복을 뱀파이어 모두에게 내려준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성역이 적막하지 않아서 좋군요.]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류마가 보살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아타, 이들을 도와주렴.]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타의 대답을 들은 보살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동족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루나.”
아타가 루나에게 다가와 묻자.
“모두, 도와준 덕분이야.”
루나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타와 루나가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신? 정말로 신인가요?”
세피아가 반쯤 멍한 상태로 류마에게 물었다.
자신이 모시는 뱀파이어 군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존재감.
세피아는 좀 전에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기운을 계속 상기하고 있었다.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 여신이 신성한 기운으로 자신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것이다.
어둠의 일족인 뱀파이어에게…….
세피아가 주저앉은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때.
“……두 분 더 계신다.”
아직도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잡지 못하는 세피아를 류마가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류마의 대답을 들은 세피아는 게이트를 넘어오기 전.
류마가 극히 신신당부했던 말이 기억났다.
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격을 가진 대신.
그 대신격을 가진 세 명의 신이 이곳에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절대! 사고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었다.
“후-, 한 번 더 말할 테니 다들 명심해라.”
류마가 뱀파이어들을 향해 잘 들으라는 듯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어둠의 일족 전원은 저분들께서 불편할 일이 생기지 않게 각별하게! 조심하도록.”
류마의 말에 세피아를 포함한 구출된 뱀파이어 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름이 세피아라고 했나?”
처용이 뱀파이어들 쪽으로 다가와 세피아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조금 이따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은인이시여.”
“오랜만에 만난 동족들끼리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처용의 시선이 루나와 류마에게 향했다.
“감사합니다. 용님.”
류마의 감사를 받은 처용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받아.”
처용이 아공간을 열고 치킨 박스 여러 개를 류마와 루나에게 건넸다.
“다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거 아냐?”
처용의 말에 류마가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류마가 처용에게 감사 인사를 할 때.
“헤헤.”
치킨을 한가득 안은 루나가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뱀파이어들의 표정에는 당황과 의문이 섞여 드러났다.
이들 모두 뱀파이어 군주 측 세력.
즉, 루나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알고 있는 루나의 이미지는 도도하고 차가운 모습을 가진 공주님.
그런 그녀가 마치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대체…… 상자 안에 든 저것이 무엇이길래?
“그럼 이야기들 나눠, 아타는 이 친구들 잘 안내해 주고.”
“다녀오세요.”
게이트를 연 처용은 아타의 배웅을 받으며 협회로 향했다.
***
태민을 만난 처용이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컵! 콜록! 콜록! 지…… 진짜 있었다고요?”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린 태민이 기침을 하고 황당한 듯 물었다.
의심이 갔기에 검토를 했었고 처용에게 알려준 것이긴 하지만.
정말로 그 던전 안에 뱀파이어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총 스물네 명.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처용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성역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요.”
태민이 처용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가 거주하는 성역이라면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조만간 류마에 더해 몇 명이 더 조사를 도와줄 겁니다.”
처용은 이번에 합류한 뱀파이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백작급인 류마보다 직위가 낮은 이들이지만, 나름대로 강합니다.”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태민이 처용의 말을 듣고는 반색을 표했다.
그간 류마의 도움을 받은 태민이기에 뱀파이어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깨닫고 있었다.
“류마 님만 해도 상위 A급 헌터와 같은 전력이라고 하셨으니까요.”
태민은 이전 처용이 했었던 말이 기억난다는 듯 말했다.
“가장 낮은 귀족 계급인 남작과 준남작은 99레벨 헌터와 맞먹습니다.”
처용은 뱀파이어의 계급과 그에 따른 전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일반 서민 계급은 평균적인 B급 헌터와 같고.
남작과 준 남작은 99레벨 헌터.
자작, 백작은 A급 헌터.
그리고 후작과 공작은 S급 헌터로 비교할 수 있었다.
“개성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평균적으로는 이 정도입니다.”
“이렇게 보니 그 스물네 명의 합류가 크게 다가오는군요.”
태민이 처용의 말을 듣고 전력을 분석하며 대답했다.
처용의 말대로라면, 무려 A급 헌터 한 명과 스물셋의 B급 헌터가 합류한 것이었다.
“3번째 S급 헌터를 수색하는 것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민이 작금 협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임무를 이야기했다.
청룡의 신관을 찾는 것.
뱀파이어들의 잠입 능력과 기동력이라면, 분명히 성과를 거두리라 판단했다.
“가장 좋은 건 전쟁신의 신전이 해결되기 전에 찾는 것이지만요.”
처용이 걱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올림포스가 전쟁신의 신전을 정리하면, 분명 청룡에 다시 집중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전이 정리되면 올림포스 총 길드장이 한국에 방문한다고 합니다.”
“제시카 로스차일드가요?”
처용이 태민의 말에 의문을 품으며 올림포스 총 길드장, 제시카의 풀 네임을 불렀다.
“그, 그분이 로스차일드 사람이었군요?”
“……저도 이름만 아는 정도입니다.”
다소 놀란 듯한 태민의 말에 처용이 대충 흘려 넘겼다.
로스차일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가문.
게이트가 발생하기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가문이었고.
헌터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재산에 더불어 막강한 무력까지 더해진 가문이었다.
무려…… 올림포스 성운의 수장, 아테나의 선택을 받은 신관이 그 가문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 더불어 다른 S급 헌터들 중에도 로스차일드 사람이 있었다.
무력, 권력, 재력, 삼위일체가 모두 막강한 가문.
그것이 로스차일드였고 제시카는 그들 중 가장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제시카가 직접 온다고?’
처용은 올림포스 총 길드장을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회귀 전에 많이 마주친 것은 아니었고 그녀와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었다.
다만, 욕망으로 가득한 지금의 올림포스에 어울리지 않게 정의롭던 모습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관이니까.
그리고 처용이 또 하나 기억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7년 후인가?’
제시카 로스차일드는 7년 후, 다른 올림포스 길드장들에게 살해당한다.
이것이 처용이 그나마 제시카에 관해 기억하는 부분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녀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회귀 전, 제시카를 공격했었던 길드장 중 하나인 모건.
그는 지금 ‘아레스 개새끼’를 외치며 괴물로 타락한 상태였다.
그리고 곧 같은 올림포스 헌터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처용이 제시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가 저지른 만행을 사과하고 직접 알아보기 위해 온다고 했었습니다.”
“……그런가요?”
처용은 태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올림포스 총 길드장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아테나의 신관이라 해도 정확한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물론,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청룡의 신관을 찾는 일 때문이라도 주의해야 하니까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태민이 처용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올림포스를 방해하기 위해 부장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태민이 처용에게 백호가 어떤 일을 맡았는지 이야기하자.
“나쁘지 않은데요? 그리고.”
처용은 거기에 정보를 더하며 태민의 계획에 도움을 주었다.
“태양 마차 길드가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를 흡수했다고 해도, 그들만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주의해야 할 다른 길드가 있나요?”
“달의 사냥꾼.”
처용이 태민의 말에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올림포스의 성좌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달의 사냥꾼 길드는 그녀의 세력이었다.
“올림포스 소속이긴 하지만, 딱히 사고를 일으킨 길드는 아닌데요?”
“아르테미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냥꾼입니다.”
태민의 질문에 처용은 성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이야기했다.
“사냥감이 눈치채지 못할 때, 조용히 활을 겨누고 치명상을 가하죠.”
처용이 분노를 삼키고 회귀 전의 전투를 곱씹었다.
아르테미스.
아폴론의 여동생이자 그와 같이 악의 종주에게 투신한 순혈자.
그녀는 회귀 전 처용이 직접 죽였던 악신 중 하나였다.
“애초부터 폐쇄적인 분위기의 길드이긴 하지만…….”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처용은 태민의 말에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처용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미리 오염시킬까?’
아공간 속 아주 깊은 곳에 자리한 저주의 파편.
아레스의 신전을 오염시킨 것처럼, 그녀의 신전도 오염시킬까 했지만.
‘아니, 아니다.’
처용이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단념했다.
분노에 미쳐 조급하게 행동했다간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지금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신전을 오염시키고 싶어도 당장은 불가능했다.
아레스의 신전과는 다르게 아르테미스의 신전은 숨겨져 있었고.
처용 역시 그녀의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괜히 달의 사냥꾼 길드가 폐쇄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일쯤, 류마와 다른 뱀파이어들을 보내겠습니다.”
“네, 저 역시 다른 루트로 달의 사냥꾼 길드를 조사하겠습니다.”
태민은 처용의 말을 믿고 조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지금까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정상적인 길드라 해도.
처용이 성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경고한 이상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달의 사냥꾼 길드 역시 올림포스 세력.
협회의 시선이 태양 마차 길드에 집중되어있는 동안 몰래 행동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청룡의 신관을 수색하고 납치한다던가…….
태민은 처용의 말을 듣고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