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혀, 현장에 있으셨다고요? 그 던전으로 변해버린 신전에요?”
태민이 놀란 듯 재차 물었다.
뉴스와 협회의 라인으로 독일에서의 사태를 파악한 태민은 위화감이 들었었다.
신전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침식의 저주 파편.]
처용이 보여준 대악마의 힘이 담긴 저주의 파편.
신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저주에 당한 뱀파이어들이 변이된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래서 혹시 무언가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질문한 것이었다.
“모건 놈이 뭔가를 꾸미길래 녀석을 추적했었습니다.”
처용은 그날 있었던 일을 일부 변형하여 말해 주었다.
모건이 이진태를 포함해 부상을 회복 중인 헌터들을 챙겼다는 것.
태양 마차 길드에 찾아가 태양 마차를 빌리고 서둘러 신전으로 향한 것.
신전 내부에서 광전사의 의식을 행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악마의 기운이 퍼져 나온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만 싹 빼버린 채…….
“광전사요?”
처용의 말을 들은 태민이 광전사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전쟁신의 신관이 휘하 헌터에게 걸어주는 버프, 아니 저주입니다.”
처용은 태민의 말에 대답하며 광전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겉으로는 멀쩡해지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말라비틀어지며 죽는다는 것까지도…….
“그…… 무슨 인격 모독적인!”
“애초에 헌터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길드…… 아니.”
처용은 말을 잠시 끊고 증오를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머저리 같은 성좌입니다. 전쟁신은.”
대놓고 신을 욕하는 처용의 모습에 태민이 침을 삼켰다.
처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그 광전사들로 협회를 공격할 계획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문제가 터진 것이로군요. 도대체 왜 신전에서 마기가?”
“의심이 될 만한 것은 전쟁신이 대악마와 손을 잡았을 경우입니다.”
처용은 생각 중인 태민에게 대형 폭탄을 던졌다.
“네, 네!? 그게 무슨!?”
성좌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
처용의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듯 태민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저도 많이 아는 건 아닙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길드들뿐 아니라 그 길드가 모시는 성좌들의 일부까지 악신과 손을 잡았다.
처용은 태민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군요.”
“하지만 진실입니다.”
처용은 인상을 쓰는 태민에게 사실을 직시시켰다.
미리 알려 주면 예방주사가 될 테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태민은 협회장과 백호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참담한 심정이었다.
길드까지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인간은 욕망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성좌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큼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신들이 왜?”
“신들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들입니다.”
처용은 태민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아…….”
태민은 처용을 말을 듣고 복잡한 마음을 쏟아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처용 님 말씀대로라면 신전에서 마기가 나올 만했군요.”
“어쩌면 광전사를 만드는 데 대악마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용은 태민에게 한 가지를 더 말해 주었다.
“제가 볼 때는 원래 협력 관계였던 이들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보입니다.”
“어찌해야 할지…….”
“악신과 관련된 문제는 일단 제가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태민이 처용의 말에 대답하자 처용이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도 우선적으로 알아봐야 할 일 생겼습니다.”
처용이 청룡에 관해 이야기하자.
“저도 마침 의문이었는데.”
태민이 처용의 말을 듣고 쌓여있는 서류 중 하나를 꺼내었다.
[신수 사냥 프로젝트.]
“신수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긴 했군요?”
“신도 존재하는 세상인데요. 아, 그리고.”
처용은 태민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전에 고생물 던전에서 호수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했었죠?”
“아, 기억납니다.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죠.”
처용이 조사한 던전의 보고서가 떠오른 태민이 기억난다는 듯 말했다.
“그 호수 안에 있던 몬스터, 아니 신수는 이제 없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설마 그 안에 있던 게 청룡-.”
“아닙니다. 그 청룡을 찾기 위해 녀석을 생포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처용은 태민에게 곤에 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녀석을 이용해서 청룡을 수색할 수 있다고 성좌님이 그러더군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태민은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일에 걱정하면서도 처용을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다.
“한국에 있는 올림포스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해 주십시오.”
처용은 한국에서 던전 관련 일을 총괄하는 협회라면 올림포스를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놈들이 특정 던전에 집착한다거나 저번처럼 불법 던전을 운영하는 정황이 포착되면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태양 마차 길드가 조금 어수선하긴 했습니다.”
태민은 처용의 말을 듣고 막 떠오른 듯 말했다.
길드장을 잃은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 헌터들이 태양 마차 길드로 합류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류마 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수월하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잠입과 은신에 특화된 류마가 태양 마차 길드 본부 근처까지 잠입하여 알아낸 정보였다.
“합병시키려는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들은 처용이 상황을 유추하듯 말했다.
같은 성운의 성좌를 모시는 길드 내부에서 약해진 세력을 다른 세력에 합류시키는 것.
길드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일단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을 마친 처용이 협회를 나와 다시 태룡전으로 향했다.
***
고요한 분위기 속 촛불이 일렁이는 공간.
벽에는 전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듯한 벽화가 새겨져 있었고.
벽화 앞에는 검과 창 등, 여러 가지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 마치 높은 사람이 자리할 것 같은 넓은 제단 위의 방석.
그 방석 위에 긴 수염을 흘러내린 노장이 경건한 자세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도복을 입은 그는 나이가 있는 인상임에도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의 뒤에는 금빛의 용이 휘감긴 거대한 언월도가 진열대에 걸려 있었다.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에서 침묵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
-우웅.
노장의 앞에서 공간이 일렁이더니 검은 용포를 두른 남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긴 수염을 흘러내린 노장이 중앙에 나타난 미륵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관철의 대신님.”
“자네가 최초로 연옥의 시련을 통과한 이후, 딱히 볼 일이 없지 않았나?”
미륵은 대답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 노장 앞에 자리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나 역시 반갑군.”
미륵은 눈앞의 노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운장(雲長).”
미륵의 앞에 있는 긴 수염의 노장.
그는 무신전의 수장이자 최초로 연옥의 시련을 통과해 성좌의 자격을 얻은 인물.
태무신(太武神) 운장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해후를 나누고자 오신 것이 아닌 듯합니다만.”
운장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미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관철의 대신이 아닌 관리자의 이름으로 온 것이기도 하네.”
“……무언가 일이 있으셨군요.”
“우리들의 후계자, 계승자의 부탁을 받아서 말이야.”
“계승자요?”
운장이 의문을 담아 대답했다.
미륵이 평범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질문이었다.
이름 없는 선천적 신격, 관리자라고 불리는 자.
그의 이름인 미륵은 그를 숭배했던 인간들이 부르던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에 그 이름을 쓰는 것일 뿐.
태초신에 의해 탄생한 다른 선천적 신격들과는 다르게 그는 진명이 없었다.
관철의 대신이라는 신격의 이름 역시 그가 태초신에게 부여받은 어떤 임무 때문에 생긴 것뿐이었다.
“자네들처럼 나 역시 세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네.”
팔짱을 낀 미륵은 운장에게 처용에 대해 말해 주었다.
평범한 병사가 아닌 대신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후계자.
그리고.
“계승자는 그저 우리의 후계자뿐인 존재만은 아니라네.”
미륵 자신을 제외한 두 대신과 협력하고 있는 일의 일부까지도 이야기했다.
“자네 역시 ‘태초의 조각’을 지녔으니 알려주는 것이네.”
운장을 바라보며 말한 미륵은 그의 뒤에 걸려 있는 언월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뭐, 여기에 찾아온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지만…….”
미륵은 운장에게 말하면서 처용이 건네주었던 월극을 꺼내었다.
“이건……!?”
월극을 받아 든 운장이 눈을 감았다.
마치, 무기의 주인이 남긴 의지를 읽는 듯 중얼거렸다.
“계승자가 받은 전갈을 내가 대신 전하러 온 것이네.”
미륵은 운장에게 이곳에 온 본론을 이야기해 주었다.
처용에게 있었던 일과 그가 전위를 만나 전해 들은 이야기.
무신전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흠…….”
운장은 자신의 세력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동요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렇군요. 이 일은 제가 조용히 알아보지요.”
미륵을 향해 말한 운장이 시선을 내려 월극을 바라보았다.
“이제, 편히 쉬게나. 전사여.”
운장은 마치 전위에게 말을 전하듯 말했다.
“자네의 투쟁…… 우리가 잘 이어받았네.”
잠시 묵념한 운장이 월극을 든 손을 놓자 월극이 허공을 부유하며 날아올랐다.
허공을 날던 월극은 벽으로 향하더니 적당한 곳에 진열되었다.
“전위의 의지를 전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운장이 고개를 숙이며 미륵에게 감사를 전했다.
“감사는 나중에 계승자를 만나면 해주게나.”
“기회가 된다면 그 계승자라는 이를 만나보고 싶군요.”
“하하하.
웃음을 짓는 미륵에게 운장이 다른 질문을 꺼냈다.
“혹시, 최근 올림포스에 일어난 일과 그 계승자라는 이와 관련이 있습니까.”
“과연, 소식이 빠르군.”
미륵은 운장을 향해 감탄하듯 대답했다.
“천문과 언문께서 노력해주고 있으니까요.”
“우리 계승자는 악신 놈들과 붙어먹은 신들에게 엿을 주고 있다네.”
“허허허.”
미륵의 말에 운장이 수염을 쓸며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끝을 마주했었던 이가 심판의 군주가 되어 돌아오리라…….”
미륵은 운장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천문의 예언인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읽었다며 말해 주더군요.”
무신전의 성좌 중 예언의 능력이 있는 천문(天文).
운장이 꺼낸 말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읽은 예언이었다.
“추후, 직접 찾아뵙지요.”
“하하, 자네는 환영한다네. 힘든 싸움을 하는 계승자에게 도움이 되겠지.”
“그 계승자라는 아이에 대해 듣고 보니 누군가가 떠오르는군요.”
운장은 미륵의 말을 듣고 누군가가 생각난다는 듯 말했다.
“최근에 연옥의 시련을 통과한 영혼이 있었습니다.”
“호? 최근에 새로 별의 자격을 얻은 영혼이 있었나?”
“저희 쪽에 합류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뀐 세상을 보고 싶다면서…….”
운장이 수염을 쓸며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친구였습니다. 허허.”
“자네가 칭찬할 정도라니 궁금하군.”
“그 계승자라는 아이와 같은 한반도의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장이 마치 즐거운 일을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최근 연옥의 시련을 통과하고 성좌의 자격을 얻은 존재가 있었다.
무신전의 성좌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수료자를 그들만의 관례로 환영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투쟁의 증명이라고 하는 성좌들 간의 대련이었다.
연옥의 시련을 통과한 신입 성좌는 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입 성좌는 무신전의 고참 성좌들조차 애먹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보여줬다.
이에 흥미를 보인 운장이 그를 직접 상대했었다.
“호? 어찌 되었나?”
미륵은 운장이 직접 나섰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백 번을 대련하여 제가 여든여덟 번을 승리했습니다.”
운장은 신입 성좌를 상대로 각기 다른 전장에서 백 번을 대련했었다.
“흐음? 자네를 상대로 열두 번이나 이겼다니 대단하군.”
미륵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운장은 무신전의 성좌들을 통틀어서 가장 강한 성좌였다.
미륵조차 인정할 정도로.
그를 상대로 열두 번이나 승리할 정도면 충분히 강한 성좌였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운장이 그와의 대련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패배했던 열두 번은 모두 ‘바다 위의 전장’이었습니다.”
미륵은 운장의 말에 한쪽 눈썹을 크게 올렸다.
“바다 위에서는 그 친구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요. 허허.”
운장이 수염을 쓸며 그 당시가 정말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누구인지 한번 보고 싶군.”
“연옥에서 부여받은 그자의 신명은 해전무신(海戰武神)입니다. 그리고…….”
운장은 진지한 듯 즐겁다는 분위기로 신입 성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