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계획을 정리한 처용이 자리를 박차 신전의 창고를 찾았다.
신을 모시는 신전 내부에도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쓸만한 것들을 챙겨 두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처용이 신전 창고의 문을 열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 드러났다.
신전 창고는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의 창고보다 보관된 것이 적었다.
신전은 길드 본부와는 다르게 제단으로써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신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몬스터 사냥에 필요한 아티팩트나 자원을 보관하기보다는 성물 등을 보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처용은 아레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성물을 노린 것이었다.
“쩨쩨한 놈, 그래도 자기 병사들인데 고작 두 개만 내려주냐.”
신전 창고 한가운데에서 신력이 느껴지는 투구와 검을 본 처용이 중얼거렸다.
[다른 놈의 성물을 강탈해 봐야 쓸 수도 없지 않느냐?]
미륵이 처용의 행동을 보며 의문을 담아 물었다.
성물은 신의 허락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
아레스가 처용에게 성물을 허락할 리가 없기에 처용이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용할 순 있습니다.’
처용은 아레스의 성물을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분란을 일으키는 데 쓸 겁니다.’
예시로.
마인들의 아지트 한가운데에서 아레스의 성물이 나온다면?
그것을 다수가 볼 수 있게 만든다면?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 아테나에게 아레스가 마인들과 계속 접촉한다는 사실만 인지시켜 준다면.
아레스를 올림포스에서 완전히 추방시킬 수 있었다.
‘이놈을 시작으로 다른 순혈자들의 세력 역시 줄여놔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신관들도 죽여야 했다.
그들은 모시는 성좌가 악신 측에 선 순간, 망설이지 않고 마인의 길을 택했으니까.
처용이 성좌들과 대화하고 있을 때.
-으, 으아악!
-이것들은 뭐야!? 왜 신전 안쪽에서 몬스터들이?
멀리서 비명 섞인 괴성들이 울려 왔다.
“슬슬 빠져야겠군.”
처용은 창고 내부에 있는 쓸만한 것들을 모두 챙긴 다음.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처용이 꺼낸 것은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 한국지부에서 탈취한 서류철이었다.
그것도 마인들과의 거래가 주로 적혀져 있는 장부.
다만, 이것은 길드에서 탈취한 원본이 아니었다.
처용은 이곳에 오기 전 태민에게 탈취한 증거 서류철들을 복제할 수 있는지 물었었다.
-복사요? 어렵지 않습니다.
태민은 ‘기록’과 ‘출력’이라는 스킬로 빠르게 증거들을 복제해냈다.
처용이 태민에게 이러한 부탁을 한 이유는 중요한 증거인 원본 서류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길드 간 불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능하면 라이트닝 워리어에서 이걸 봤으면 좋겠는데.”
처용은 창고를 포함해 신전을 나오는 길 곳곳에 서류를 뿌려두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원이 이 널브러진 서류를 발견하면 숨기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을 뿌린 이상 다른 길드 역시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
신전에서 저주가 퍼져 나왔고 신관까지 타락한 상황에 길드가 마인들과 협력한 서류까지 발견되었다?
올림포스 길드 입장에서는 정말 최악 중 최악이었다.
처용이 신전 밖으로 빠져나오자 신전은 완전히 아비규환 상태였다.
신전 내부에서 불길함이 가득 느껴지는 검은 기운이 퍼지면서 구울들이 튀어나왔다.
신전에 체류하고 있던 헌터들은 그 구울들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이게 뭐야!? 으, 으아악!”
신전에서 퍼지는 검은 안개에 오래 노출된 헌터 하나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꾸드드득! 우득! 우득!
뼈와 살이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몬스터로 변했다.
신전에서 튀어나온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저, 저게 무슨!”
“검은 안개에 닿지 마라! 사제들은 검은 안개부터 막아!”
헌터들이 거대한 혼란에 빠져들어 있을 때.
-크끄가가가각!
뼈가 뒤틀리는 듯 기괴한 소리를 내는 구울이 튀어나왔다.
모건이 타락하여 탄생한 어보미네이션 구울이었다.
“저, 저건 뭐야!”
“잠깐, 저 갑옷……, 저 칼……, 설마!?”
“길드장님 갑옷이잖아?”
어보미네이션 구울은 생전의 습관이 조금 남아있는지 자신이 쓰던 쌍칼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꺼, 꺼거걱, 아-아레스, 개-개새끼.
처용이 강제로 말하게 한 ‘아레스 개새끼’가 기억에 남아있는지.
기괴하게 튀어나온 입과 이빨을 딱딱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아, 아레-스는, 개-개새끼다!
괴물이 되어버린 모건의 모습에 길드 헌터들의 멘탈이 무너졌다.
“시…… 신이 노했다!”
“저주를 받은 거야!”
구울들과 맞서던 헌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레벨이 높은 헌터들은 아직 구울과 맞서고 있었지만.
-약-자……놈들.
어보미네이션 구울이 약자멸시를 발동하자 몸에서 강렬한 어둠이 피어올랐다.
“약자멸시라고!?”
“길드장님 스킬이잖아! 그럼 저 몬스터가 정말로?”
헌터들이 구울을 보며 경악할 때.
-개-개새-끼!
어보미네이션 구울이 빠르게 앞으로 돌진하여 A급 헌터 한 명을 공격했다.
“크악!”
A급 헌터가 단 일격에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길드장님 스킬이야, 확실해.”
어보미네이션 구울이 사용한 돌진 스킬이 모건의 돌진 스킬과 같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싸우던 A급 헌터 열 명도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헌터들을 추적하던 구울들은 멀리 가지 않고 다시 신전으로 돌아왔다.
마치, 저주가 흘러나오는 이곳을 벗어나기 싫다는 것처럼.
어보미네이션 구울 역시 신전으로 돌아와 근처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 아레스…… 개새끼…….
자신이 모셨던 신에게 불만이 많은 듯 신성모독을 내뱉으면서…….
“큭, 크크크. 기대 이상인데? 신전이 던전으로 변해버렸잖아?”
지켜보던 처용이 재밌다는 듯 웃음이 흘렸다.
예상보다 결과가 더 좋다는 것도 있었지만.
아레스의 신관인 모건이 자신의 신을 모독하는 말을 계속 내뱉은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바알의 힘이 담긴 저주의 파편은 아직 몇 개 남아있었다.
“다음은 어떤 놈의 신전을 던전으로 만들어 버릴까?”
처용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감상하며 다음 표적을 생각했다.
[성좌의 신전이 악마의 소굴로 변해버렸구나. 하하하.]
미륵이 어둠에 잠긴 신전을 보며 고소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놈에게 어울리는 신전으로 변한 것이죠.’
[허, 네놈이 저리 만든 것이지 않느냐?]
처용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미륵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할 때.
[흠, 이거 올림포스가 난리가 나겠구나. 제자야.]
‘그걸 노린 겁니다.’
여래가 건넨 말에 답한 처용이 말을 이었다.
‘올림포스의 순혈자 놈들은 이미 악신들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아테나가 이를 알아야 하니까요.’
[지금의 올림포스를 이끄는 그 어린 성좌 말인가?]
‘네, 이번 일만으로는 아테나가 아레스를 내치지는 않겠지만…….’
처용은 아테나를 생각하며 말을 흐렸다.
그녀는 강제로 떠맡겨진 올림포스의 수장 노릇을 해 나가면서도 형제들을 챙기려 하는 이였다.
그러나 아테나가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포스의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 지고 있었다.
개념 없는 다른 형제들은 그녀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꼰대 같은 주신들은 아테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아테나가 올림포스의 임시 수장을 맡고 있음에도 그녀를 돕는 올림포스 성좌들은 소수였다.
처용 역시 그런 아테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강제로 떠맡아진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맡은 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챙기던 형제들이 등에 칼을 꽂고 배신했을 때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억누르면서…….
-미안합니다. 수호신.
아테나는 악신으로 변한 아레스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처용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듯 느껴지는 미안하다는 말.
‘어쩌면 이 일이 그녀를 돕는 일일 수도 있겠지요.’
처용은 과거의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었는지.
우직하고 강인한 성품을 가진 그녀를 나름대로 돕고 싶었다.
***
아레스의 신전에 저주가 퍼지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용의 예상대로 올림포스의 모든 길드에 난리가 났다.
전쟁신 신전에서 퍼져 나오는 검은 저주.
이 사건은 비단 올림포스 길드에서만 난리로 번진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뉴스거리로 다뤄지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전쟁신 신전이 죽음의 신전으로 변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는 아직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장인 모건 씨는 어제부로 행방이 묘연한 상황…….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신의 신전이 던전처럼 변했다.
전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만큼, 사건을 향한 관심이 뜨거웠다.
올림포스는 이 사건을 조용히 덮고 처리하려 했지만.
이미 독일 상공으로 솟구쳐오르는 검은 마기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기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국에 있는 올림포스 길드 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올림포스 길드 본부 대회의실에 길드장들과 지부장 등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신전이 던전으로 변하다니…….
-모건 길드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비상소집으로 모인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들 경거망동하지 하십시오.”
대회의실의 가장 상석에 앉은 여성이 말하자 소음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태양 마차 길드장 헤리스가 상석에 앉은 여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일단 제시카 님 의견부터 들어봅시다.”
헤리스의 웃는 얼굴을 본 상석에 앉은 여성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상석에 앉아 있는, 황금처럼 빛나는 금발을 단발로 자른 20대 즈음의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성.
그녀는 올림포스 길드의 총 길드장이자 아테나의 신관인 제시카였다.
제사카의 청록빛 벽안이 헤리스를 잠시 응시하다가 오른쪽에 앉은 여성을 바라봤다.
“우선 정확한 상황을 좀 다시 짚어야겠습니다.”
제시카의 시선을 받은, 그녀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금발 머리에 깃털이 달린 모자와 안경을 쓴 여성.
“메리가 파악한 정보를 말해 줄게.”
시선을 받은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이키 윙 길드의 길드장이자 전령신 헤르메스의 신관 메리였다.
나이키 윙 길드는 올림포스 길드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길드였다.
“우선 전쟁신의 신전에서 퍼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마기’가 맞아. 그것도 아주 강력한.”
“S급 마인들이 우리를 공격한 건가요. 메리?”
제시카가 묻자 메리가 살짝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메리도 그렇게 추측은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어. 신전 안의 상황을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아.”
메리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신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워 글래디에이터 헌터들이 맞다는 거야.”
메리의 말에 대회의장 내부에 동요가 일렁였다.
-헌터들이 몬스터로 변했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회의장이 다시 시끄러워지려 하자 제시카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메리의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용해졌을 때 메리가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몬스터들 중에 모건 길드장도 있다는 거야.”
메리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특히, 태양 마차 길드장 헤리스가 큰 경악을 내질렀다.
웃는 듯한 미남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분노와 현실부정이 표정에 감돌았다.
“어제만 해도 저한테 태양 마차를 빌려달라며 연락을 했었습니다! 그땐 멀쩡했는데!”
헤리스의 말에 제시카가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신전에 어둠이 퍼져 나온 것도 어제입니다.”
제시카는 헤리스의 말을 생각하며 질문했다.
“어제 모건 길드장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헤리스는 제시카의 질문에 얼굴을 쓸면서 대답했다.
“급하게 신전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고…… 저에게 태양 마차를 빌려달라 했었습니다.”
모건과 대화했던 내용을 생각하며 헤리스가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리고.
“태양 마차에는 다친 헌터들도 같이 탔었습니다.”
태양 마차 길드의 한국 지부장 최민식이 추가 설명을 이었다.
그는 모건을 안내하고 도와줬던 만큼 어제 가장 그의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최민식의 말이 끝나자.
“다친 헌터들을 급하게 신전으로 옮겼고 그 후 신전에서 마기가 퍼져 나왔다…….”
제시카가 손깍지를 끼며 상황을 유추하듯 말을 이었다.
“신전 내부는 신관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근데 신전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시카의 말에 헤리스가 발끈한 듯 말했다.
“모건이 뭔가를 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죠. 신전에서 강력한 마기가 퍼져 나왔는데.”
“모건은 사고를 당한 겁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당했길래 신관이 신전에 마기를 퍼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괴물로 만듭니까?”
“…….”
“제 생각에는 모건이 마인들과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제시카의 차가운 벽안이 대회의장 내부를 훑자 몇 명이 속으로 침을 삼켰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