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인천 공항.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의 배지를 달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나왔고.
이들을 마중 나온 듯, 같은 길드 배지를 단 사람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들을 맞이했다.
공항에서 나온 이들 중 중앙에 있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 오른손에 순금으로 만들어진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금시계를 뽐내듯 오른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고쳐 쓴 사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작은 나라까지 오게 만들어?”
화를 참는 듯 보이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인 이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모건 길드장님!”
가장 지위가 높은 듯 보이는 금시계와 선글라스의 남자.
그는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장 모건이었다.
길드의 한국 지부장이었던 박철민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참이다.
“그래서 한국 협회라는 곳으로 가면 되나?”
“회담 장소는 협회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고 합니다.”
길드장, 모건이 묻자 휘하 길드 헌터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쯧, 협회라면 박철민 놈을 즉각 잡아 올 수 있거늘.”
모건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박철민은 협회 보안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모건은 올림포스라는 막강한 세력과 S급 헌터인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박철민을 곧장 찾아가 무력으로라도 빼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협회에서도 모건이 그럴 수도 있다 판단하고 회담 장소를 다른 곳에 잡은 것이었다.
모건에 관한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더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 협회장의 생각이었다.
“이딴 촌구석 나라에는 더 있기 싫군. 빨리 가지.”
“모시겠습니다.”
차량에 탑승한 모건과 길드원들이 회담 장소로 향했다.
이들이 가고 있는 회담 장소는 협회가 운영하는 호텔 중 하나였다.
헌터나 그들의 가족들이 이용하면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호텔.
협회에서 운영하는 헌터 복지 사업 중 하나였다.
보안 시설 또한 협회 못지않게 훌륭한 편이라 회담 장소로는 나쁘지 않았다.
원래 협회가 아닌 회담 장소라면 워 글래디에이터 본부여야 했지만.
길드 본부는 현재 겨우 흔적만 남을 정도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회담 장소가 협회의 호텔로 선택된 것이었다.
회담 장소인 호텔에 도착하자 태민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모건은 태민을 잠시 응시하다가 무시하듯 고개를 돌렸다.
‘고작 B급 헌터를 안내로 보낸 건가? 이 나라 수준도 알만하군.’
그는 자신의 스킬 ‘약자멸시(弱者蔑視)’로 태민은 파악하며 자존심을 드높였다.
패시브 스킬인 약자멸시는 두 가지 기능이 있었다.
첫 번째는 상대의 레벨을 파악하는 것.
두 번째는 싸우는 상대의 레벨이 자신보다 낮은 경우 능력치가 상승하고.
반대로 상대의 레벨이 높으면 자신의 능력치가 하락하는 것이었다.
몬스터든 헌터든, 그저 상대가 ‘약자’일 경우 자신이 강해지는 것.
그게 모건의 능력이었다.
‘권백호란 놈이 강해 봤자 A급이지, 박철민을 이길 정도면 레벨은 조금 높을 수도 있겠군,’
S급 헌터인 모건은 권백호를 완전히 얕보고 있었다.
그는 무려 149레벨이었으니까.
“들어가시지요.”
태민의 안내를 받은 모건은 호텔의 최상층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넓은 객실 한가운데에 놓은 테이블.
그리고 중앙에 협회장, 그의 오른쪽에 백호가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모건 길드장. 한국 헌터 협회장 황제일이라고 합니다.”
협회장이 대표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저 놈이 권백호인가?’
모건은 협회장의 인사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듯 백호를 바라봤다.
백호 역시 팔짱을 끼고 분노를 감춘 듯 옅게 일렁이는 눈으로 모건을 바라봤다.
‘네깟 놈이 강해 봤자 A급 헌터, 레벨이 높아 봐야-.’
모건이 약자멸시를 발동하자.
[레벨 : 168]
마치 귀신을 본 듯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태민이 모건을 바라보며 묻자.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황급히 표정을 감춘 모건이 당황한 듯 웃으며 황제일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장 모건이라고 합니다.”
모건의 오만하고 자존심이 드높았던 태도는 싹 사라지고 얼굴에 친절한 웃음이 실렸다.
‘그의 말대로로군.’
태민은 그런 모건의 태도를 보며 처용을 생각했다.
-백호 님을 마주하는 순간 겁먹은 개새끼처럼 찌그러질 겁니다.
처용의 말대로 모건은 백호를 마주하자마자 귀신을 본 듯 안색이 확 변했다.
그리고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고수했던 오만한 태도도 싹 사라졌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길드장님도 바쁘실 테니.”
협회장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저도 좋습니다. 올림포스도 이 일을 심각하게 보고 있으니까요.”
모건이 친절한 웃음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저는 한국 헌터 협회장으로서 이 일을 WHU에 알리고 공식 수사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그…….”
모건은 협회장의 말에 욕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이런 건방진!’
이 일을 크게 만들어서 길드에, 올림포스에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박철민에게 모든 혐의를 덮어씌우고 추후 그를 자살로 위장시켜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었다.
계획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 이들을 힘과 지위로 압박을 하든 협박을 하든 해야 했다.
“…….”
그러나 백호의 흉흉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도저히 회담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가 없었다.
“올림포스에서도 이 일을 면밀하게 파악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결국, 믿을 건 올림포스라는 거대한 세력의 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 되었군요. 올림포스에서도 나서 준다면 더 정확하게 수사할 수 있겠지요.”
협회장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커맨더 역시 이 일에 크게 분노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그분의 고향이니.”
모건은 속으로 욕을 씹어 삼키며 말했다.
‘이미 커맨더에게까지 알려진 건가?’
모건의 뒤에 올림포스가 있다면.
한국 헌터 협회의 뒤에는 커맨더가 있었다.
그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라고 해도 한 나라를 하루 만에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헌터.
커맨더의 영향력은 올림포스 못지않았다.
“WHU에 이미 제 의사는 밝혔습니다. 정식 공문은 아마 오늘 중으로 갈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모건이 겉으로 지어내는 웃음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박철민 지부장의 신병이라도 저희에게 인도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어떻게든 친절한 웃음을 유지하며 협회장에게 말하자.
“그건 불가능합니다.”
협회장이 딱 잘라 대답했다.
“한국에서 이러한 짓을 저지른 자입니다. 신병 인도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협회장은 준비해 둔 서류철 하나를 모건에게 내밀었다.
박철민이 한국에서 저지른 짓이 담긴 서류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원본은 아니라 태민이 탐정의 스킬로 복사한 서류였다.
“이 정도일 줄은…… 협회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서류를 본 모건은 참담한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그리고.
‘망할 새끼들!’
모건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원래는 올림포스의 이름과 자신의 힘을 내세워 박철민을 돌려받은 후.
이 일을 완전히 묻어버리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강하게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의 협회장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압박하고 싶은 감정이 계속 솟구쳤다.
그때.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백호가 모건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를 향해 말했다.
“별것 아닙니다. 길드 지부장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통감할 뿐입니다.”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군요.”
백호는 팔짱을 풀지 않고 마치 모건을 경계하듯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실제로 백호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처용에게 들은 모건의 능력 약자멸시.
그 능력을 듣기만 했음에도 불쾌한 기분이 절로 들었었다.
비겁하게 약자만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쓰레기.
게다가 오만한 태도로 협회장의 인사를 무시하다가 자신을 마주하자마자 태도를 싹 바꾸었다.
모건은 백호가 전형적으로 혐오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허튼짓을 하는 순간, 팔다리를 부러뜨려 주마.’
백호는 혹시 모건이 협회장을 위협할 것을 대비해 감각을 높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모건 역시 백호가 흘리는 긴장감을 잘 느끼고 있었다.
약자멸시 스킬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협회장을 향해 함부로 무력을 드러냈다가는 백호가 곧장 움직일 것이다.
현재 자신은 백호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
여기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백호한테 당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올림포스도…… 이 일을 최선을 다해 조사하겠습니다.”
모건이 속으로 분노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한국이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에게 피해를 받은 만큼 올림포스에서…….”
협회장은 모건을 향해 미리 계획했었던 내용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모건의 웃음을 지은 가면이 점점 깨져나갔고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그럼에도 협회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회담은 협회장의 뜻대로 이끌리며 나아갔다.
모건은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가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를 인정한 만큼.
올림포스에서 피해보상을 할 것을 약속했다.
회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녹화된 회담 내용은 차후 서류로 정리해서 WHU에 발송하겠습니다.”
태민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히 B급 헌터 따위가…….’
그 모습에 분노한 듯 모건의 주먹이 쥐어졌지만.
자신의 성격을 드러낼 수도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이야기했던 대로 이진태와 던전에서 사고를 당한 헌터들은 신전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모건은 좀 전의 회담 내용을 언급하며 협회장에게 말했다.
“다친 헌터 분들을 치료해 주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협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건은 회담 중 이진태를 포함한 다친 헌터들을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 본부.
즉, 아레스의 신전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었다.
그는 신전에서 신의 축복을 내리는 것으로 다친 헌터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회장은 그 제안은 흔쾌히 수락했다.
회담을 마친 모건이 호텔을 나와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멍청한 새끼들.”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협회장과 백호를 향해 비웃었다.
‘이런 촌구석 같은 나라의 협회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는 휘하 헌터들을 치료한다는 좋은 이유만으로 이진태와 헌터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광전사가 완성되는 대로 너희들을 짓밟아주마!’
광전사.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아레스의 신관인 모건만이 알고 있는 축복.
전쟁신이 직접 병사들에게 신력을 내려 헌터들의 힘을 폭주시키는 것이었다.
당장 죽기 직전의 사람도 광전사가 된다면 순식간에 나아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광전사들은 이전보다 2배, 많으면 3배까지 강해졌다.
말 그대로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전사가 된 이들은 이성을 잃고 신과 신관의 명령에만 따르는 인형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그들은 광전사가 되고 일주일이 지나면 모든 생명이 타 버린 듯 말라 버리며 죽는다.
광전사는 헌터들의 힘을 폭주시키는 것.
그들은 생명을 불태우는 것으로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이지만.
그 대가로 생명력을 모두 소진한 순간 죽게 된다.
모건은 이진태를 포함한 다친 헌터들을 광전사로 만들어 협회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의심을 받을 이유는 절대로 없었다.
멀쩡해진 그들에게 삼일 정도는 평범하게 행동하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니까.
그리고 협회가 방심한 순간.
그들의 제어를 풀어버리고 협회를 집중공격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분노를 곱씹으며 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모건이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 다른 올림포스 소속 길드가 있나?”
“태양 마차 길드, 달의 사냥꾼 길드 등이 있습니다.”
모건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비서가 말했다.
“이진태랑 다친 헌터 놈들을 챙기는 대로, 태양 마차 길드로 출발한다.”
모건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명령을 내리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스르륵.
모건이 탄 차량을 일렁이는 그림자가 은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병신같은 놈.”
그림자 속에서 모건을 지켜보는 처용이 그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그 광전사들이 너와 네 신을 조지는 폭탄이 될 것이다.”
살기를 감추고 따라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모건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