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처용이 산신각으로 루나를 부르자.
“……늦었어, 엄청.”
루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시리게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얼음장 같았다.
“숙녀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최악이야.”
“미안하다.”
처용은 루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정지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피자를 꺼내었다.
그러자.
“음~ 맛있어!”
피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갑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맛있다니 다행이네, 음…… 아타도 부르는 게 좋겠지.”
처용은 생각난 김에 아타도 불렀다.
그녀가 태룡전에서 해주는 일이 많은 만큼 잘 챙겨주어야 했다.
“잘 먹겠습니다.”
아타 역시 피자가 마음에 드는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어…….”
연화가 피자를 맛있게 먹는 이종족 둘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처용이 아타와 루나를 부르기 전, 연화에게 둘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 애 피자 먹여도 괜찮은 거야?”
연화가 루나를 가리키며 황당한 듯 처용에게 물었다.
아타는 그렇다 치지만, 루나는 뱀파이어 종족이라고 소개받았다.
핏빛 눈동자와 긴 귀, 박쥐가 연상되는 날개.
그리고 피자를 먹으려 입을 벌릴 때 보이는 송곳니까지.
흔히 잘 알려진 뱀파이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뱀파이어가 피가 아닌 피자를 먹고 있는 상황.
“난 애가 아니야, 그리고 이거 맛있어. 아암~!”
심지어 그 피자가 맛있다고 한다.
“…….”
루나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연화가 황당한 듯 쳐다보았다.
맷돌의 어이가 날아가다 못해 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뱀파이어에 대해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편견이야.”
처용이 연화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그래?”
“저번엔 치킨을 줬더니 그거도 맛있게 먹더라고.”
“…….”
연화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황당함으로 가득 찼다.
지금 루나의 모습도 잘 적응되지 않는데 치킨을 뜯는 뱀파이어의 모습이라니…….
역시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루나 말고 류마라고 뱀파이어가 한 명 더 있어.”
처용은 연화에게 류마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현재 류마는 도시를 관찰하며 둘러보고 있었다.
“하아, 여기에서 피자를 먹는 거도 적응이 안 되는데…….”
연화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가 복잡한 듯 이마를 잡았다.
이곳 산신각은 산신들을 모시는 신성한 장소였다.
교단으로 따지면 신탁을 받는 예배당과 같은 곳.
연화는 이런 신성한 장소에서 피자 판을 펴 놓고 야식을 먹는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다.
“여기 진짜 주인들도 뭐라고 안 하는데 뭐.”
처용은 어깨를 으쓱이며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래.”
결국, 연화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처용이 준비한 야식을 먹기 전 피자 한 조각을 따로 덜어냈다.
그녀가 따로 덜어낸 피자 조각을 가져간 곳은 황룡 조각상 앞이었다.
처용이 앞으로도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짧게 묵념한 후 돌아갔다.
그때.
-우웅.
황룡 조각상의 눈 부분이 아주 찰나의 순간 금빛으로 일렁였다.
***
하루 뒤 처용은 곧장 연화를 데리고 태룡전으로 갈 준비를 했다.
“긴장할 필요는 없어.”
“하아, 네가 그렇게 말해도…….”
연화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처용의 말에 대답했다.
지금 연화는 신을 실제로 만나러 가는 것이니까.
그것도 집안에서 오랫동안 모셔오던 신을 말이다.
“음, 집안의 현자 같은 큰 어르신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처용은 연화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게이트를 넘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계승자.]
게이트를 넘어가자 보살이 처용을 반겨 주었다.
“그…… 안녕하세요?”
연화가 조심스럽게 보살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대웅전에 있는…….’
연화는 보살을 바라보며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거대한 세 개의 신상들을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여신은 신상 중 오른쪽에 자리한 여신상과 같은 얼굴이었다.
[계승자의 누이군요. 반가워요.]
온화한 웃음을 지은 보살이 연화를 반겨 주었다.
그 모습에 연화의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보통 신들은 권위적인 카리스마가 있기 마련이었다.
성녀에게 강신한 빛의 신이 그러한 분위기를 냈었으니까.
그러나 처용의 성좌들은 다른 신들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적인 느낌이 있었다.
딱 한 명만 빼고.
[음.]
마치 대국의 황제가 입을 법한 검은 용포를 입고 검은 안대를 한 신.
관철의 대신 미륵의 붉은 눈동자가 연화를 응시하자 그녀가 잠시 움츠렸다.
성수의 기사였던 연화는 미륵에게서 빛의 신과 비슷한 권위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아주 엉망이구나, 가호를 강제로 뜯어버리는 바람에 내부에 기운이 엉켜있어.]
연화를 통찰한 미륵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망할 놈, 그놈의 성격 머리는 여전한 것 같군.]
“그 소시오패스 같은 빛의 신이지 않습니까?”
처용 역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미륵의 말에 대답했다.
[그놈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구나.]
미륵이 피식 웃으며 처용의 말에 긍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던 연화는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정말로 제가 재기할 방법이 있는 건가요?”
처용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
자신이 헌터로서 재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가호를 잃은 헌터는 다른 성좌가 새로 가호를 주지 않으면……”
연화가 말을 하다 말고 침묵했다.
방금 자신이 말한 방법으로도 다시 재기한 헌터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방법일 뿐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절망적인 감정이 점점 조여오는 듯 연화의 고개가 숙어지고 있을 때.
[새로운 성좌의 가호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보살이 연화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마치 그녀가 좀 전까지 빠져들던 절망에서 손을 잡아 구해주는 것 같았다.
[계승자가, 그리고 우리가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연화가 울컥한 듯 울먹임을 삼키며 감사를 전했다.
보살의 손길에서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린 빛의 신과는 다른 따스함이 전해지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연화가 희망을 품고 질문했다.
[어렵진 않지만, 인내심이 필요하다.]
여래가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렵거나 복잡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처용이 받았던 선인의 훈련을 기초 과정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신력이 끊임없이 흐르는 태룡전에서의 훈련을 통해 엉클어진 기운을 바로잡고.
기초에서부터 육체와 마나를 천천히 다시 다져 나가는 것이었다.
다만.
[너에게 남아 있는 이전 신들의 기운을 모두 없애야 한다.]
임시로 붙은 전쟁신의 가호와 빛의 신의 흔적을 모두 지울 필요가 있었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지니고 있던 모든 스킬이 사라지고 일부 스텟이 추가로 하락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상관없어요. 저를 버렸던 신의 잔여물 따위는…….”
어차피 사용할 수도 없고 시스템에만 남아있는 스킬이었다.
연화에게 있어 한 줌의 미련조차도 없는 것들이었다.
“만만치 않을 거야.”
처용은 연화를 향해 진지하게 조언했다.
선인의 기초 훈련.
기초 훈련이라고 해서 절대로 만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예시로.
태룡전을 받치는 거대한 연잎의 외곽을 ‘죽기 직전까지’ 달린다던가.
만 하루 동안 가부좌를 취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마나 명상을 하는 등.
육체적 훈련만이 아닌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괴물들하고 싸우는 것보다 훈련이 백번은 낫다고 봐.”
연화는 처용을 향해 자신 있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럼 행운을 빌게.”
“고마워.”
처용은 연화를 향해 손을 흔든 후 게이트를 열어 협회로 향했다.
어제 대형 사고가 터진 만큼, 의논이 필요했으니까.
***
처용이 협회로 향하고 협회장실에 주요 인원들이 모였다.
“으음…….”
이마를 문지른 협회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태민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땐 피로가 확 몰려올 정도였으니까.
협회장이 고뇌에 빠져 있을 때.
“하하하. 아주 대형 사고, 아니 초대형 사고로구만?”
백호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자식 면상을 후려갈기려는 걸 몇 번이나 참았는데.”
이진태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린 백호가 인상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백호 님 몫을 남겨둘 걸 그랬나요?”
“하하, 내 몫은 무슨, 이진태 그 자식 완전히 병신 되었다면서?”
“……죽이려다 겨우 참았습니다.”
“그런 놈은 매장당해도 싼 놈이여.”
백호의 말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역시 이진태가 저지른 범죄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후, 우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합니다.”
대화를 듣던 태민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부장님이 빠르게 움직여준 덕분에 일이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어제 태민은 처용과의 만남 이후 곧장 여기저기 연락을 돌렸다.
마침 잠이 오지 않아 깨어 있던 백호도 태민의 연락을 받았다.
사정을 간략하게 들은 백호가 빠르게 현장으로 나가 산에 흩어진 사람들을 모두 찾아냈다.
그리고 불법 던전으로 추정되는 게이트도 찾아내어 현장 봉쇄까지 완료했다.
협회 구출반에 의해 구조된 헌터들은 현재 협회 빌딩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구출된 헌터들과 잠깐 대화를 해 봤지만, 데스나이트가 처용 님인 것은 전혀 모르는 듯합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변장했길래?”
태민의 말에 백호가 정말 궁금한 듯 물었다.
“별 것 없습니다.”
처용은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보여줬다.
“암철의 갑주.”
-콰드드득!
검은 강철들이 처용을 감싸 갑옷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해머를 꺼내 철벽부를 부여하고 흉측한 모습으로 바꾸었다.
“절대 저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처용의 입에서 마치 데스나이트처럼 낮게 울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 무슨…….”
백호는 처용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어둠 속성 마나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모르는 상태로 봤으면 나도 데스나이트라고 생각했겠구만.”
최상급 헌터인 백호는 데스나이트와 여러 번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보통 개성이 통일된 일반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개개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것이 바로 데스나이트였다.
생전에 검을 다루었던 자, 창을 다루었던 자 등 너무나도 개성이 다양했고 그만큼 강력했다.
지금 처용이 보여주는 모습은 백호가 싸워본 데스나이트 중 상급에 가까웠다.
“참, 부러울 정도로 다재다능하고만.”
“하하.”
멋쩍게 웃음을 지은 처용이 암철의 갑주를 해제했다.
“처용 님이 들킬 염려는 없는 것이로군요?”
생각을 마친 협회장이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처용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딱히 저희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군요.”
협회장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와 이원춘을 이간질할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요.”
소중한 아들이 병신이 되어버린 채 목숨만 부지해 돌아왔다.
이원춘의 성격상 분명 속이 뒤집힐 것이다.
더더군다나 던전 사고로 다친 것이니 소속 길드인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의 책임이었다.
협회장은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불법 던전에 대해 증언을 해줄 분들까지 저희 쪽에 있으니 가능합니다.”
태민이 밝은 목소리로 협회장에게 말했다.
“충분히 흔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놈들이 정신없는 틈에.”
“저희는 숨겨진 정보를 털고요.”
처용이 태민의 말을 잇듯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류마와 제가 직접 움직이죠.”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은 처용이 말했다.
[하하, 도적질하러 가는 것이냐?]
미륵이 처용에게 웃음을 지으며 전음을 보냈다.
‘고작 도적으로 끝내면 안 되죠.’
[흠?]
기대감으로 가득 찬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투(神偸)가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처용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