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처용이 연화를 데리고 돌아온 곳은 태룡사의 산신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와보네.”
연화가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인 산신각 내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토굴 내부.
단상에 나열된 섬뜩하고도 신비하게 느껴지는 산신 조각상들.
어두운 분위기를 은은하게 비추는 촛불까지.
“여기만큼 조용한 장소도 없으니까.”
처용의 말대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협회에서 대우가 상상 이상이던데? 그 차가운 탐정이 그런 태도를 보일 줄이야.”
다른 길드들 사이에서 알려진 김태민 과장의 이미지는 차갑고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법과 규정에 까다롭고 협회와 공익을 우선시하는 사람.
때문에,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길드들은 가장 싫어하고 기피 하는 사람이었다.
대표적으로 오늘 처용이 뭉개버린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가 그랬었다.
그런 태민이 처용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협회에서 갖는 위치가 낮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했잖아. 내가 협회에서 대우가 좋다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처용이 연화를 향해 살갑게 말을 이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처용은 산신의 석상이 자리하지 않은 빈 바위 단상 위에 걸터앉았다.
“……막상 말하려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연화는 그런 처용을 보며 생각하다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에픽 클래스라는 거 정말이야?”
“음…….”
처용은 연화의 질문에 침음성을 흘렸다.
다른 이들 모두가 자신을 에픽 클래스라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에픽 클래스, 신관은 아니었으니까.
처용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아, 너에게 가호를 내린 신이 우리 집안 신들 중 하나라며?”
연화는 처용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
잠시 고민하며 침묵한 처용은 연화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내가 일반적인 각성자가 아니니까. 참고로 에픽 클래스도 아니야.”
자신은 신들의 ‘병사’가 아닌 ‘후계자’에 가까웠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음,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헌터가 신의 병사들인 건 알지?”
“헌터는 신들의 가호를 받아 각성한 이들이니까.”
“난 좀 달라.”
처용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풀어 설명해 주었다.
회귀 사실만을 숨기고 어머니에게 말했던 것보다는 더 자세히 말해주었다.
대신들에게 선택받은 후계자이자 계승자.
그간 협회에서 있었던 일들과 자신이 해왔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까지.
“계승자…… 확실히 에픽 클래스는 아니네.”
“신관들도 신의 병사니까.”
“너랑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어?”
“단언컨대 내가 유일할 거야.”
처용의 대답을 들은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충 이해는 가네, 아주 특별한 헌터라는 거 맞지?”
세계에 단 하나뿐인, 신관들보다도 특별한 헌터.
연화는 처용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집안에서 모시는 신들이 있긴 했었구나.”
연화의 말 속에는 묘하게 누군가를 향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나는 우리 집안 신들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
처용은 연화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했었던 말들이 생각났으니까.
-신을 모신 대가가 이거야?
아버지가 죽었을 때 연화가 원망을 가득 담아 했었던 말이었다.
부친의 죽음에 이어서 배신에 가까운 친척들의 횡포.
그로 인해 너무나도 힘들어하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연화는 신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대가가 정녕 이것인지 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과거의 처용처럼 완전히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처용 못지않게 많은 방황을 했었다.
그래서 빛의 신에게 가호를 받았을 때 망설임 없이 교단으로 향한 것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돕는 교단이 집안보다 나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난 사람들을 돕는 교단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녀가 밝은 빛만이 가득하리라 생각했었던 교단의 그림자는 너무나 어두웠다.
“지금은 이 꼴이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화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듯 말하자 처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빛의 신을 모시는 교단이 깨끗하지만은 않더라고.”
처용의 말에 연화가 그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이라는 게 참 무섭더라…….”
연화가 눈을 감으며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본래 직업은 교단에 존재하는 유니크 클래스인 ‘성수의 기사’였다.
‘성역의 사제’처럼 A급 헌터가 되는 순간 고위 사제의 지위를 얻는 이들이었다.
연화는 유니크 클래스로 각성한 헌터답게 능력이 있었고 인망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랑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놈의 부친이 추기경이었어.”
연화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추기경.
고위 사제들을 이끄는 자이자 신관 바로 아래의 직위를 가진 자였다.
“빅터 추기경?”
처용이 기억이 난다는 듯 말했다.
“알아?”
“아주 잘 알지.”
연화의 말에 처용이 비웃음을 담아 대답했다.
그는 교단에서의 지위와 자신의 이득만을 따지는 이기적인 자였다.
설령 당장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계산적인 쓰레기.
이것이 처용이 기억하는 빅터 추기경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쓰레기 같은 개새끼.”
처용은 무려 교단의 추기경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내뱉었다.
“하하하.”
연화는 그런 처용을 보며 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그 추기경이 날 불러서 제안을 하더라고.”
추기경은 아들이 연화와 경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때문에 연화를 불러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다.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다.
협박에 가까운, 강압적인 분위기로 그가 건넨 제안은…….
“혼인?”
연화의 말을 들은 처용이 인상을 크게 구기며 대답했다.
“응, 어이없지?”
그녀에게 건넨 제안은 경쟁자인 아들과의 혼인과 부 기사단장 자리였다.
“당연히 거절했을 테고.”
처용은 조용히 분노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연화의 성격상 이러한 제안을 수락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 아들이라는 놈의 나이가 낼 모래 마흔이야. 하하…….”
연화는 당연히 이런 웃기지도 않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람은 연화에게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가진 최악의 남자였다.
결국, 추기경은 아들을 단장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연화의 앞에 함정을 팠다.
“무려 교단의 추기경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교단에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일했던 연화는 그 함정에 당했고.
찬란하게 빛나던 자리에서 날개가 꺾이고 추락하게 되었다.
“추기경한테 밉보이니까 모두가 날 배척하더라.”
연화가 교단에서 일해오며 도와주고 인연을 맺었던 모든 이들이 그녀를 외면했다.
그토록 믿음을 가졌던 빛의 신 역시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추기경은 추락해버린 그녀를 교단에서 파면시켰고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로 보낸 것이었다.
“하…….”
연화의 이야기를 들은 처용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파란만장하지?”
“……엉망진창인데?”
처용이 분노를 억누르듯 얼굴을 쓸어내리자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빅터 추기경은 처용이 ‘반드시 죽여야’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회귀 전,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신을 버리고 악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맹세의 증거로 마인이 된 그는 교단의 헌터들을 절반 이상 죽이고.
동시에 마녀를 도와 세계 곳곳에 죽음의 저주를 퍼트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 저주에…… 처용의 어머니가 사망했었다.
‘어머니에 연화까지…….’
빅터 추기경은 처용의 가족을 두 명이나 죽게 만든 셈이었다.
“미안해,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연화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잘못한 게 없으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처용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고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놈은 따로 있었으니까.
“후, 일단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네.”
분노를 갈무리하듯 한숨을 내쉰 처용이 연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비의 손길.”
찬란한 황금빛 신력이 처용의 손에서 연화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어둠에 가라앉은 산신각 내부가 마치 여명이 다가오듯 환해졌다.
그리고.
-스스스.
연화의 몸에 드러난 흉터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거슬렸던 눈가의 흉터 역시 말끔하게 사라지자 처용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평범한 힐 스킬이 아닌데?”
연화는 오래된 상처까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놀란 듯 말했다.
“고위 사제들도 오래된 상처는 지우지 못하는데.”
“빛의 신 따위보다 더 훌륭하신 분의 권능이니까.”
처용은 태룡전의 성좌들을 생각하며 자랑하듯 말했다.
그리고.
“원래 계승자로 선택받은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야.”
연화에게 자신만이 알고 있었던 부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신들이 왜 개입하지 못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랬었……구나.”
연화가 눈물을 참듯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할 방법이 있어.”
“……무슨?”
처용의 말에 연화가 질문을 내뱉었다.
동시에 처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가호를 잃은 각성자가 재기한 사례는 없어.”
연화는 체념한 듯 처용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난 괜찮아.”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너도 괜찮지 않고.”
처용은 연화의 웃음 속에 감추어진 씁쓸함과 비참함을 파악하고 말을 이었다.
“방법이 있다는 건 빈말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처용의 말은 확실히 빈말이 아니었다.
좀 전까지 태룡전의 성좌들이 이 주제를 놓고 대화를 했었다.
가호를 잃은 헌터가 재기할 정말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재기할 수 있다.]
처용의 눈을 통해 연화를 살펴본 여래가 대답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다른 성좌가 그녀에게 가호를 내리는 것이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부탁할 만한 성좌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도와줄 의지가 있는 성좌를 찾았다 해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성좌와 병사들 간의 상성 문제였다.
이진태에게 가호를 내린 아레스를 예시로 들면.
괴팍하고 폭력적인 이진태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상성이 좋았기에 그에게 선택된 것이었다.
연화 역시 빛의 신과 상성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유니크 클래스인 ‘성수의 기사’가 되었었으니까.
반대로 성좌와 병사 간의 상성이 좋지 않은 경우, 가호가 튕겨 나오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각성은 불가능하고 서로가 피해를 입게 된다.
[다른 성좌들의 가호 말고도 방법이 있느니라, 임시이긴 하지만.]
처용은 여래가 제시한 방법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연화에게 말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연화는 처용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에서 자신감과 확실함이 느껴졌으니까.
“왠지 너라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신기하다.”
연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처용은 연화에게 말하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끊었다.
“아, 루나…….”
잊어버렸었던 약속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전 태민에게 소개받은 식당에서 각종 음식들을 대량으로 주문해 정지장 안에 넣었었다.
오늘 가족들과 레스토랑에 가기 전 루나가 그것에 흥미를 가졌었고.
루나의 수련과 처용의 가족 식사가 끝나는 시점에 같이 먹기로 했었다.
하지만, 처용에게 연화와 관련된 사고들이 발생하는 바람에 망각하고 있었다.
지금 루나는 정지장 앞에서 처용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머리를 긁적인 처용이 연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식, 생각 있어?”
“야식? 하하하.”
뜬금없는 처용의 제안에 연화의 웃음이 터졌다.
“잘 되었네. 안 그래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는데.”
웃음을 그친 연화가 처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