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처용이 징벌자를 선택한 순간.
[죄악의 근원이 꿈틀거립니다.]
전처럼 시스템 알림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역시나…….”
징벌자의 길은 죄악의 근원과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처용은 불안해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순순히 죄악의 근원에게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으니까.
자신은 숱한 절망이 가로막았을 때마다 그것을 부수고 나갔었다.
대악마와 마주했을 때, 지옥에 떨어졌을 때 등.
그 어떤 절망이라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아직 이겨내지 못한 절망.
악의 종주라는 거대한 벽 역시 부숴버릴 것이다.
‘악의 종주가 더 하면 더 했지.’
조크-크타니드가 최종 목표인 이상 죄악의 파편은 그 과정일 뿐이었다.
처용은 충분히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당장 크게 변한 건 없는 건가?”
징벌자를 선택했는데도 큰 변화가 보이지 않자 처용이 중얼거렸다.
그때.
[신격이 변경되었습니다.]
[칭호 ‘아라한의 길-징벌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수호신의 차단이 ‘차단의 눈’으로 강화됩니다.]
[수호신의 가호가 ‘징벌의 압제’로 강화됩니다.]
[권능 ‘징벌의 선고’가 생성됩니다.]
수호신으로서 지니고 있던 권능이 바뀌었다.
수호신의 차단은 차단의 눈으로 변화되었고 수호신의 가호 역시 징벌의 압제라는 권능으로 변화되었다.
‘아니, 강화되었다고 하니 더 좋은 건가?’
처용은 권능 확인을 나중에 하기로 하고 새로 생긴 칭호부터 확인했다.
원래 ‘아라한의 길-수호자’였던 칭호가 징벌자로 바뀌었다.
[아라한의 길-징벌자 / 칭호]
[악인을 심판하기 위한 징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공격력이 30% 증가합니다.
처용에게 있어 아주 좋고 당장 필요한 칭호였다.
모든 공격력이 30% 증가한다는 것.
검기와 자연부의 능력, 스킬 등 모든 공격력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시브 스킬 금강불괴(金剛不壞)가 재생성 되었습니다.]
[강철 피부가 금강불괴에 융합됩니다.]
“이것도 되찾았네.”
또 하나의 주력 스킬을 되찾았다.
방어 계열 스킬 중에서는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흠, 분위기가 바뀌었구나.]
여래가 변화한 처용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원래 처용의 신력은 수호자로서 단단하고 우직한 느낌이 있었다면.
징벌자가 된 지금은 강인하고 파괴적인 느낌이 전해졌다.
“이제 한계만 넘으면 됩니다.”
처용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헌터로서 한계를 넘는 것.
바로 100레벨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헌터들은 시스템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99레벨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처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어떻게 한계를 돌파했느냐?]
여래가 처용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마인들의 의식으로 지구에 넘어온 하급 악신을 죽였습니다.”
회귀 전 처용은 동료 헌터들과 하급 악신과 싸워 이겼었다.
[대단하구나, 하급이라 할지라도 신격을 지닌 이들일 텐데.]
“죽을 뻔했습니다. 하하.”
하급일지라도 일반 헌터가 악신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200레벨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처용은 99레벨에 악신을 죽였다.
비록 다른 헌터들의 도움과 운이 더해졌다고는 해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처용은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숙한 99레벨 헌터였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하급 악신 정도는 충분히 때려죽일 수 있습니다.”
주력 스킬들을 되찾았고 신격도 꽤 회복했으니 승산은 충분했다.
“그 전에 리벤지 매치부터 해야겠지만요.”
처용이 고행탑 방향을 바라보며 말하자 여래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제는 통과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합니다.”
여래의 말에 처용이 자신 있는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보법을 되찾기 위한 수련도 그 괴수를 이겨 먹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잠시 물러섰던 발걸음을 다시 전진시켜 나아갈 때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처용은 고행탑에 있는 거대 괴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아주 광활한 우주.
그 우주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차원 속.
과거 찬란한 문명이 가득했던 이곳은 그릇된 욕망을 가진 이들에 의해 멸망한 차원이었다.
전 세계가 물에 수장되어 버린, 물만이 가득한 세계가 되어버린 장소.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멸망한 세계의 아주 깊은 곳.
그 깊은 곳 한가운데에 ‘태초의 마수’ 중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무료함, 그리고 지루함.
가장 깊은 심해에 자리를 잡고 영생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을 표현하기에는 딱 맞는 말이었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과거에 행해진 신법의 조약 때문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무료함을 자장가 삼아 계속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지루한 일상에서 작게나마 해방되고 싶기도 했다.
아주 먼 과거 특이한 인간과 함께했을 때처럼…….
그렇게 지루함과 무료함이 무한하게 반복되고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쩌적. 쩌저적!
무한한 침묵이 깨어지듯 배경의 일부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그리고.
“오랜만이야. 카투라.”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특이한 인간이 다시 찾아왔다.
“여래?”
태초의 마수, 카투라가 심해에 누인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하하, 천년도 더 전을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어떻게?”
너무 오랜만에 말을 한 탓일까?
카투라의 질문은 짧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완전한 신격에 오르면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이 쉽지.”
여래가 웃음을 지으며 한 말에 카투라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거야? 신법의 약조가…….”
원래 여래는 자신을 찾아와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가 대신에 오른 것은 놀라웠지만, 아무리 대신이라도 신법의 약조는 거스를 수 없었다.
“그들이 먼저 신법의 약조를 깼다.”
“뭐?”
카투라가 놀란 듯 대답했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세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
여래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태초신의 소멸로 인한 차원의 붕괴.
하계가 무너지면 신계 또한 무너지기에 이를 막기 위해 행해졌던 시스템의 구축.
인간들을 이용한 병사육성.
악신들과 마인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인 악의 종주.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여래의 말을 들은 카투라가 힘없이 고개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설마 아버지가 소멸했을 줄이야…….”
세상과의 관심을 끊고 잠든 동안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대충 이해했어.”
카투라가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카투라, 네 도움이 필요해.”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고?”
“하하, 마치 내가 사고를 칠 것처럼 말하는 거 아닌가?”
“유례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긴 했잖아?”
성좌들, 특히 선천적 신격들이 혈선의 학살이라고 기억하는 사건.
분노한 여래가 신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은 모든 성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완전한 신격도 아닌 반신이 말이다.
“하하, 옛날의 내가 아니야. 그리고 그놈들을 잡는 건 이제 내 제자의 역할이야.”
“제자?”
“그래.”
카투라의 말에 여래가 처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계승자?”
“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의지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교육하는 것이지.”
“하지만…… 다른 신들이 이 사실을 알면.”
카투라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금오도의 일이 반복될 수도 있어. 여래.”
과거 오만한 성좌들에 의해 사라진, 소멸한 차원 금오도.
여래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금오도의 사람들을 위해 선인의 수련법을 가르쳤었다.
선인의 힘을 얻은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을 개선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성좌들, 특히 선천적 신격들은 선인의 수련이 신격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후천적 신격들이 다수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한 성좌들은 결국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 결과 금오도와 그 안의 사람들이 모두 소멸했다.
여래는 자신이 가르치고 함께 웃으며 살던 사람들이 모두 소멸한 것을 보고 폭주했던 것이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 카투라.”
여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성좌들은 시스템으로 인해 지상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게 되었어.”
“음…….”
“카투라, 이전처럼 나를 따라오지 않겠어?”
여래가 카투라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카투라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들, 성좌들이 모두 기피하고 두려워했던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던 자.
대신이 되어 찾아온 여래가 또다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화아악!
카투라의 몸이 밝게 빛나더니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계속 작아지던 카투라의 육체가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했다.
“재밌겠네.”
지루함과 무료함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은 카투라가 여래의 손을 잡았다.
여래는 함께 하기로 한 카투라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네 다른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
“한 명은 알고 있긴 한데…… 너 설마?”
카투라가 경악한 듯 여래를 바라보자 여래가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 직후,
여래가 카투라를 이끌고 차원을 넘어 태룡전에 당도했을 때.
-후우웅!
손에서 금빛 실 같은 선을 뽑아내더니 카투라를 향해 이어 주었다.
[역시나, 아무 무리 없이 되었군.]
여래가 태룡전의 기능을 이용해 카투라와 시스템을 연결해 준 것이었다.
[……뭘 한 거야? 이거 설마?]
잠시 당황한 카투라는 성역 태룡전과 연결된 감각을 느끼며 경악했다.
자신과 연결된 태룡전이라는 성역 아주 깊은 곳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지.]
카투라가 여래를 따라 두 성좌가 거주하는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워요. 카투라.]
보살이 카투라를 반겨 주었다.
[안녕, 자비의 신. 그리고…….]
카투라는 보살을 향해 웃으며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다른 이를 바라봤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역시 당신도 여기에 있었네. 관철의 신, 아니.]
미륵을 바라본 카투라가 냉랭함을 담아 말했다.
[관리자.]
[보살님한테 한 거랑은 다르게 너무 냉랭한 거 아닌가?]
미륵이 붉은 눈을 빛내며 카투라를 마주 보았다.
[이래 봬도 형제자매라고 할 수 있는 사이이거늘.]
[남보다 못한 사이 아니었나?]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서로 싸울 듯 노려보는 미륵과 카투라 사이에 보살이 끼어들어 말렸다.
[우리들과 함께 해 줘서 고마워요. 카투라.]
보살이 카투라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대한 비밀을 아는 건 우리들이 전부야?]
카투라는 눈을 감고 한 번 더 태룡전을 자세히 느끼며 말했다.
[그래. 여기 있는 우리들이 전부이지.]
카투라의 말에 여래가 대답했다.
[네 제자도?]
[그래,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이야.]
[그렇구나.]
잠시 생각하듯 침묵한 카투라가 여래에게 물었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한데? 그 여래의 제자라니.]
[안 그래도 제자 녀석의 수련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여래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처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태룡전과 처용의 관계, 그동안 있었던 일까지 말해주었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니 놀아주지 뭐.]
[가능하면 제자 녀석을 가혹하게 몰아붙여 주게나.]
[……제자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여래는 카투라의 말에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 그동안 심심했는데 잘됐네.]
카투라는 그런 여래를 향해 말한 후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쏴아아!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는 공간.
카투라는 그 폭포 안에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놓고 처용을 기다렸다.
짧은 기다림이 지나자 처용과 루나가 영역에 들어섰다.
그러자 시스템을 통해 준비한 시험을 시작하고 분신을 내보냈다.
“이런 미친!”
압도적인 크기에 충격을 받았는지 처용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카투라는 우선 분신을 조종해 가벼운 육탄 공격만을 시작해보았다.
아무리 훈련을 받은 인간이라 해도 피하기 어려운 속도로 공격했지만.
여래의 제자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는지 잘 피해냈다.
심지어 겁먹지 않고 분신체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처용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린 인간이 제법이긴 하네? 그렇다면.’
카투라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처용이 점점 궁지에 몰렸다.
‘널 가혹하게 몰아붙이라고 말한 여래를 탓하렴.’
종국에는 자신의 초월기를 사용해 처용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가히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준 셈이었다.
‘다시 올지 모르겠네.’
인간은 절망적일 정도로 거대한 벽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처용이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번쩍.
‘음?’
카투라의 의문과 동시에 진법이 번쩍이더니 처용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는 다시 제단 앞에 섰다.
“아까와는 다를 거다.”
호기롭게 말한 처용이 다시 폭포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패기가 무색하게도 이번 역시 1단계 시험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절망하고 포기하나 싶었지만.
-번쩍.
재차 나타난 처용이 웃음을 지으며 제단 앞에 올라섰다.
‘재밌는 녀석이네?’
카투라 역시 처용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