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이야기가 잠시 샜군요.”
처용이 성좌들을 향해 본론을 꺼냈다.
“혹시, 무신전을 찾아갈 방법이 있을까요?”
무신전의 성좌들을 찾아가 전위의 유언을 전해야 했었다.
[그 영혼의 유언 때문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처용이 여래의 말에 대답함과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무신전에 배신자라니…….”
[흠, 네가 겪은 미래에서는 배신자가 없던 것이냐?]
중얼거리듯 말한 처용의 말에 미륵이 질문했다.
“네, 무신전의 영웅들은 모두 악신들과 싸우다 소멸했습니다.”
그런 그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서둘러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처용이 다급함을 담아 말했다.
만약 미래가 바뀐 것이라면 서둘러 그 배신자를 색출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성역 무신전은 무신들에게 초대를 받는 것 외에는 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성좌들이라면 다른 방법을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그때.
[그걸 나한테 주거라.]
미륵이 처용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직접 ‘운장’을 찾아가 건네주마.]
“……무신전의 수장을요?”
처용이 놀란 듯 대답했다.
성좌들이 무신전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설마 수장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내가 직접 가져다주는 것이 이상하더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무신전하고 교류가 있었던 겁니까?”
처용은 혹시 이전 태룡전에 찾아온 손님이 무신전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물었다.
[아니다. 무신전의 수장과는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느니라.]
“그렇군요.”
미륵의 말에 처용은 월극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부탁드립니다.”
[그 영혼에 대해서도 운장에게 잘 설명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성좌들과 관련된 일이지 않느냐.]
미륵이 옅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으냐?]
“하하, 그럴 리가요.”
처용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저 미륵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미륵이 직접 움직인다면 그 누구보다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륵님.”
[오냐.]
미륵의 대답과 동시에 처용이 게이트를 빠져나가 사라졌다.
[그에게도 알리시려는 겁니까?]
처용이 사라지자 여래가 미륵에게 질문했다.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운장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미륵이 먼 곳을 바라보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인 입장이니까요.]
[그의 성품은 믿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여래가 미륵의 말에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무신전 안에 배신자라…… 제자 녀석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처용.
그가 무신전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동요했다.
처용은 자신이 겪은 미래에서는 무신전의 성좌들 중 배신자는 없었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처용이 전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제가 직접 운장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미륵님 만한 적임자가 없겠군요.]
여래가 이해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미륵님은 ‘관리자’의 이름으로 그를 찾아갈 생각이로군요.]
보살 역시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두 분께서 부지런히 움직이시는데 저라고 놀 수는 없지요. 하하.]
미륵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래가 태초의 마수들을 끌어들여 판을 키운 만큼.
자신 역시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
“……아니 망할 길드들은 골렘 던전에 살림을 차린 겁니까?”
협회에 쌓인 일들 대충 둘러본 처용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냥 그 골렘 던전을 날려버려야 하나?”
처용이 중얼거리듯 낮게 말한 것을 들은 태민이 움찔했다.
처용이라면 수틀리는 순간 던전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으니까.
“안 그래도 제가 직접 경고문을 보냈습니다.”
협회장이 처용에게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길드들의 멍청한 행동을 더 보다 못한 협회장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벌써 몇몇 길드들은 던전 출입 제지를 걸었습니다.”
태민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 등 악질적인 길드들에는 온갖 방법으로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각 길드의 본부에서도 잘못한 건 알고 있는지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제지를 당한 길드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협회의 직권 남용이라는 등 어이없는 이유로 말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백호가 분노를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양심도 없나?”
“양심 집어 던진 놈들한테 양심 찾으면 안 되죠.”
백호에 말에 처용이 비웃음을 담아 대답했다.
“그리고 개고생시킨 만큼 열 배, 백 배로 조질 겁니다.”
“하하하, 그거 정말 마음에 드는구만.”
백호가 처용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남은 던전은 여섯 개인가요?”
“네, 부장님과 협회 정예들이 나누어서 맡기로 했었습니다만.”
태민이 태블릿을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부 B급 던전이었다.
“다행인 건 이번 일이 끝나면 정기 토벌 건은 거의 마무리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번 여섯 개의 던전만 무사히 마치면 빡빡했던 일정은 어느 정도 끝나는 셈이었다.
“그중 절반.”
처용은 태민이 보여준 던전 중 세 개를 골라 선택했다.
“네?”
“결과는 내일 아침에 확인하시죠.”
지금은 늦은 오후 시간.
처용은 지금부터 바로 던전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현재 레벨은 98.
B급 던전 세 개를 독식한다면 충분히 99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부터 시작하셔도…….”
태민은 굳이 날밤을 새우려는 처용을 배려하고자 하는 말이었지만.
“잠이 안 와서요. 산책 겸 후딱 다녀오죠.”
“……하하.”
처용은 빨리 99레벨을 달성하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웃음만 지었다.
“누가 보면 던전하고 원수진 줄 알겠어.”
백호가 방을 나가려는 처용을 향해 말하자.
“헌터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처용이 백호를 향해 반사적으로 대답한 후 협회장실을 나갔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처용의 말에 백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헌터가 해야 할 일.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다.
게이트 사건 초기에는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작금의 헌터들은 질 좋고 돈이 되는 것들만 추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던전은 나 몰라라 하고 황금 골렘을 따라 우르르 몰려간 헌터들처럼 말이다.
헌터들은 본래 본분을 잊어가고 있었다.
‘나도 잊어버릴 뻔했구만.’
10년 전 커맨더와 같이 각성했을 때 했었던 다짐이 다시 떠올랐다.
“젊은 친구가 이리 열심히 하는데 가만있을 순 없지.”
처용에게 자극을 받은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백호는 원래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려 했지만, 더 느긋하게 있기가 싫어졌다.
“협회 정예 중에 근성이 없는 놈은 없으니 나도 지금 출발하겠네.”
“부장님?”
“그냥 빨리 끝내고 맘 편히 쉬어야지, 하하.”
협회 헌터들의 철야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
다음 날 새벽.
“후, 드디어!”
처용은 세 개의 던전을 부지런하게 처리한 결과를 마주할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99레벨을 드디어 달성했다.
[칭호 ‘한계를 마주한 자’가 재생성됩니다.]
한계를 마주한 자는 99레벨을 달성하고 ‘벽’에 부딪힌 헌터들에게 생기는 칭호였다.
모든 스텟을 10이나 올려주는 좋은 칭호였지만.
이것은 처용이 기다리던 칭호가 아니었다.
[칭호 ‘아라한’이 재생성됩니다.]
[새로운 아라한의 길이 열렸습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 운명이 결정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드디어, 수호자를 되찾았……어?”
처용은 시스템을 보며 말하다가 멈칫했다.
“……뭐지?”
회귀 전 99레벨을 달성했을 때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선택을 하라고?”
99레벨을 달성하고 얻은 아라한.
더 정확히는 ‘아라한의 길-수호자’라는 칭호가 생겼어야 했다.
그런데.
[두 가지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수호자
-징벌자
“이게……무슨.”
처용이 당황스러운 듯 침음을 삼켰다.
회귀 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99레벨을 달성하자마자 수호자의 길이 열렸고.
그렇게 자신은 수호신이 되었었으니까.
혼란스러운 상황에 한참을 생각한 처용은 결국 성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복잡해 보이는구나. 제자야.]
여래가 태룡전에 돌아온 처용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처용이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징벌자와 수호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시스템의 말에 답답한 듯 머리를 긁었다.
“이전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처용이 회귀 전 일들과 현재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듯 침묵한 여래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겠다만, 아라한은 너의 성장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여래가 옅게 웃음을 짓고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추구해온 신념과 행동에도 영향을 끼치지.]
“네, 그래서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장한 제가 수호자를 받은 것이겠죠.”
처용이 회귀 전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너에게 수호자가 아닌 징벌자라는 이름이 내려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여래의 말을 들은 처용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해 보니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회귀로 인해 과거와는 달라진 자신의 행동이었다.
아라한의 길은 자신이 행동하고 추구해온 신념에 따라 결정된다.
과거에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런 마음과 행동으로 인해 수호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귀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인들을 죽이고 거슬리고 방해되는 놈들은 힘으로 치워버렸다.
수호자가 아닌 수라를 향해 나아가기로 맹세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죄악의 파편.
최악의 경우이긴 하지만 이것이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것들이 많군요.”
처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기하긴 하네요. 우리들조차 길을 선택하지는 못했는데.]
보살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신들도 이런 비슷한 걸 받나요?”
처용이 잘 이해하지 못한 듯 말하자.
[아라한의 길은 세계로부터 신격의 이름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여래가 처용에게 설명해 주었다.
신들 역시 자신이 추구해온 신념과 행동을 통해 이름을 받았다.
창을 극한으로 수련하여 성좌가 된 이가 ‘창무신’의 이름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제가 반신에 올랐을 때는 ‘치유자’라는 이름을 받았었죠.]
보살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길을 향해 쭉 나아가다가 종국에는 자비에 도달했습니다.]
처용은 보살의 말에 대략적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너 역시 선인의 수련을 통해 신격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않느냐.]
“그렇군요.”
처용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눈을 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처용이 물었다.
변수가 없이 성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회귀 전과 같은 수호자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수호신 한처용은 실패라는 결과를 맞이했었다.
과연 그것을 다시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 해도 징벌자를 함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
왠지 죄악의 근원이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처용이 머릿속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나는 네가 ‘징벌자’의 길에도 어울린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미륵의 말이 들려왔다.
“하하, 미륵님은 징벌자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처용이 미륵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미륵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단순히 마음에 든다는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멸망한 미래를 보고 너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 봤었다.]
미륵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멸망을 막기 위해 계승자인 너를 수호자로 선택해 성장시켰다.]
눈을 뜬 미륵이 처용을 바라보았다.
[네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가 선택했지.]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저는…… 수호자로 선택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처용이 과거 자신의 마음가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너는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미륵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가 이끄는 길이 아닌 너의 길을 선택하거라.]
처용은 미륵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나의…… 길?’
고민 중인 처용을 향해 미륵의 말이 이어졌다.
[네 목표가 무엇이냐?]
“비극을 막기 위해-.”
처용은 하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복수입니다.”
미륵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는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네 마음을 탓할 생각이 없다.]
실패한 것은 처용만이 아니었다.
처용의 마음속에 어둠이 자리한 이유에는 그들의 탓도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관철’하고 싶은 미래를 위해 원하는 길을 선택해라.]
관철의 대신 미륵이 처용을 향해 강하게 말했다.
‘내가 관철하고 싶은 것.’
처용의 마음속에 미륵의 말이 맴돌며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미륵에게 감사를 전한 처용은 결정을 내렸다.
시간을 되돌아온 자신의 가장 큰 목적.
그것은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이자 ‘징벌’이었다.
이것이 수라가 되기로 한 자신이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설사 이것이 죄악의 파편이 유도한 길이라 해도…….
처용은 복수를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스템의 선택창을 바라본 처용의 손이 움직였다.
“징벌자를 선택하겠다.”
과거 수호신이었던 자가 완전히 다른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죄악의 근원이 꿈틀거립니다.]
처용의 내면 가장 어두운 무언가가 미소를 지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