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S급 마인이자 의회주 중 하나인 닥터 화이트.
회귀 전, 처용이 딱히 싸워보거나 자주 마주친 마인은 아니었다.
다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모습과 의술과 관련된 스킬들.
그리고 새하얀 마기를 다루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사실 중 하나는 지구가 멸망하기 몇 년 전, 그가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의회주의 자리를 마녀가 차지한다는 정도.
“하아, 커맨더만 신경 쓰면 될 줄 알았는데.”
마녀를 안아 든 닥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한국에 관심을 보인 겁니까. 조커?”
닥터가 안경을 빛내며 처용을 향해 말했다.
‘닥터도 나를 조커로 알고 있는 건가?’
처용은 마녀를 안아 든 닥터를 보다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궁금한데 말이야.”
화염의 절을 들어 닥터를 향해 겨눈 처용이 말을 이었다.
“의회주가 여기 있는 걸 보면 한국에 중요한 뭔가가 있는 모양이지?”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을 했지만, 상대는 S급 마인.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였다.
다만, 전우애가 없는 마인답지 않게 마녀를 보호한 것이 조금 의외였다.
“아니면 마녀 때문인가?”
처용이 닥터를 향해 떠보듯 말하자.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닥터가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처용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헷갈리는군.’
단순히 말만으로는 닥터의 진의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마녀와는 달리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니까.
“전 지금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조커.”
닥터의 말과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하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딜 도망치려고 Bro.”
처용은 화염의 절에 검기를 부여함과 동시에 황금빛 신력을 내뿜었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닥터와 싸워본 적이 없기에 그의 스킬을 몰랐다.
그렇기에 그를 향해 통찰의 눈을 발동하려 했지만.
-빠지직!
[대상을 통찰할 수 없습니다.]
닥터의 몸에서 새하얀 전류가 튀더니 통찰할 수 없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처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의 비밀을 엿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조커.”
닥터가 처용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화이트 아웃!”
-삐이이!
마치 섬광탄이 터지듯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마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처용은 밀리지 않기 위해 화염의 절을 세워 마기를 갈라내고 버텨내었다.
“병실을 열어줄 테니 전원 도망쳐라!”
닥터가 살아남은 마인들을 향해 외쳤다.
동시에 마녀를 안아 든 닥터가 위로 뛰어올랐다.
“뢰신보!”
그런 닥터를 보며 구경만 할 처용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닥터 앞으로 다가온 처용이 화염의 절을 치켜들었다.
-우웅!
닥터와 마녀를 일도양단할 듯 도신에는 화염을 머금은 검기가 가득 압축되어 있었다.
“검기입니까?”
닥터는 눈앞의 처용을 보고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메스.”
닥터의 주변에 새하얀 메스 열 개가 생성되었다.
“화이트 블레이드!”
그리고 마치 검기처럼 새하얀 마기가 피어오르며 크기를 키웠다.
처용이 휘둘러오는 화염의 절을 열 개의 메스가 가로막았다.
-콰쾅!
검기와 마기가 부딪힌 충격으로 닥터와 처용이 서로 물러났다.
닥터는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병실 개방.”
닥터의 뒤편에 마치 응급실과 같은 모양의 문이 생성되었다.
-위이잉.
그 문이 닥터와 마녀를 받아들이려는 듯 양옆으로 열렸다.
“어딜!”
처용은 허공을 밟고 재차 뢰신보를 사용하여 닥터에게 접근했다.
“기요틴 커터!”
그리고 루나 역시 닥터를 향해 날아오르며 공격을 가해왔다.
닥터는 접근하는 적들을 보고도 침착하게 스킬을 발동했다.
“에이드(AED) 실드.”
닥터의 주변에 네모난 직육면체 형태의 새하얀 벽이 생성되었다.
처용이 검기를 둘러 벽을 베어 버리려 했지만.
-차캉!
벽에 스크래치만 날 뿐 베어지지 않았다.
루나의 기요틴 커터 역시 새하얀 벽을 베어내지 못했다.
“화이트 쇼크!”
-파지지직!
닥터가 재차 스킬을 발동하자 새하얀 벽에서 전류가 튀어 올랐다.
새하얀 전류를 피해 루나가 물러났고.
“칫!”
처용 역시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자연신보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면회는 허가할 수 없습니다.”
닥터가 처용에게 웃으며 말함과 동시에 응급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쿵!
응급실의 문이 닫혔고 새하얀 먼지가 되듯 흩날리며 사라졌다.
“젠장…….”
닥터와 마녀가 사라진 자리를 본 처용의 입에서 짜증이 섞여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마녀의 모든 수를 차단하고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마녀가 죽기 직전 S급 마인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정보가 거의 없는 닥터 화이트가 나타났다.
“미안해…… 나 때문이야.”
루나가 처용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신이 꾸물대지만 않았어도 적의 수장을 놓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용님.”
류마 역시 처용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열 명 정도 놓쳤습니다. 갑자기 새하얀 공간이 열리면서 놈들을 집어삼키는 바람에…….”
닥터는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다른 마인들을 대피시켰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처용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은 나조차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이니까.”
닥터의 개입은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녀를 놓친 건 아쉽지만 성과는 컸어.”
처용은 잃고 놓친 것 보다 얻은 것들을 생각했다.
마인들의 아지트 중 하나를 붕괴시킨 것.
거의 백 명에 달하는 마인을 사살한 것.
그리고 한국에 S급 마인 중 하나가 와 있다는 정보까지.
마지막으로.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인들과 미라들을 학살한 결과 레벨을 상당히 많이 올릴 수 있었다.
[레벨 : 98]
이제 레벨 99까지 딱 하나만을 남겨둔 상황이다.
“오늘 놈들이 입은 타격을 볼 때, 당분간 제대로 활동하긴 힘들 거야.”
간부인 마녀를 놓쳤다 해도 놈들은 다수의 휘하 마인들을 잃었다.
병력의 큰 손실이 난 놈들은 당분간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녀의 피는 어때?”
처용이 루나를 향해 묻자.
“딱 맞는 피였어.”
“크크.”
루나의 말에 처용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숙적이었던 마녀의 피가 루나에게 알맞은 영양식이라니.
뭔가 마녀에게 제대로 엿을 먹인 것 같았다.
그때, 아타가 처용에게 다가왔다.
“저, 용님 남은 미라들은 전부 정리되었습니다만.”
아타가 처용에게 말함과 동시에 한 곳을 응시했다.
처용이 아타가 바라보는 곳을 보자.
-크, 크어어…….
안광이 푸른색으로 돌아온 S급 미라, 전위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처용이 전위에게 다가가자 전위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처용을 마주 보았다.
-그대 덕분에…… 해방될 수 있었군.
푸른 안광이 점멸하며 전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비의 손길은 마녀를 몰아냄과 동시에 그에게 걸린 속박도 같이 풀어 버렸다.
-정말 고맙소. 강인한 무인이여.
처용은 반쯤 무릎을 꿇으며 전위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전위가 푸른 안광을 점멸하며 대답했다.
-연옥의 시련을 받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군.
연옥의 시련.
차원의 틈이 벌어지자 연옥에 생긴 변화로 생전 영웅의 자격을 갖춘 영혼만이 받을 수 있는 시련이었다.
그 영혼이 고된 시련으로 인내와 의지를 다시 다지고 연옥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그 영혼은 ‘성좌의 자격’을 갖추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처용과는 다른 방법으로 탄생한 후천적 신격들인 셈이다.
김정훈의 성좌 창무신 역시 연옥의 시련을 견디고 성좌가 된 인물이었다.
어째서 연옥에 이러한 시스템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태초신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회귀 전 여래가 처용에게 했었던 말이 생각났다.
연옥을 창조한 태초신.
그가 작금의 상황을 예견하고 만들어 둔 안배가 아닐까? 하는 것이 여래의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처용이 생각을 마치고 전위에게 물었다.
“연옥에서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입니까?”
-미안하오. 내 기억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구속되어 있었소.
전위의 목소리에서 비참함이 묻어 나왔다.
처용은 전위의 말에 안타까운 듯 눈을 감았다.
마인들의 수작질만 아니었다면.
창무신처럼 성좌가 되어 헌터들의 힘이 되어주었을지도 몰랐을 영혼.
그런 영웅의 혼이 마인들 때문에 고통을 받은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강인한 무인이여, 그대에게 부탁이 있소.
전위가 처용을 향해 부탁했다.
“……무엇입니까?”
-나처럼 연옥에서 적출되어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있소.
“…….”
전위의 말에 처용의 두 주먹이 힘줄이 붉어질 정도로 세게 쥐어졌다.
동시에 마인들, 그리고 악신들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눈을 날카롭게 뜬 처용이 전위에게 물었다.
-‘무신전’의 별들에게 내 말을 전해주시오.
“……!!”
전위의 말에 처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신전(武神戰).
성좌들의 세력 중 하나로 연옥의 시련을 마친 후천적 신격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력이었다.
창무신 등 강력한 무투파 성좌들 다수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다른 거대 세력들에 비해 신생이었고 후천적 신격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힘을 가진 만큼 선천적 신격들도 쉬이 건들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순혈자들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세력이기도 했었다.
무신전 성좌들은 모두 인간이었던 자들.
순혈자들은 그들을 하계종 출신이라 비꼬며 비하했었다.
반면에 무신전 성좌들은 순혈자들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이들이었다.
때문에, 회귀 전 처용이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기도 했었다.
처용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전위가 말했다.
-승상(丞相)을 막아달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처용은 전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신전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도.
“그게…… 사실입니까?”
전위의 마지막 말은 충격적이었다.
회귀 전 무신전 성좌들과 잘 어울렸던 처용이었다.
그들 중 순혈자들처럼 배신한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신전 성좌들은 전원 악신들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처용의 말에 전위가 안타까운 듯 대답했다.
-사실이오.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내 말을 꼭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정말로…… 고맙소. 무인이여.
푸른 안광을 번쩍이며 감사를 전한 전위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렸다.
-이걸…… 그들에게 보여주시오. 그럼 그대의 말을 믿어 줄 것이오.
전위가 처용에게 내민 것은 그가 사용하던 무기였다.
자신의 무기를 건넨 전위의 푸른 안광이 점멸하더니 빛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군.
“이런!”
처용이 급하게 자비의 손길을 사용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오…….
그의 말대로 자비의 손길은 효과가 없었다.
-사아아.
전위의 안광이 점점 흐려지더니 그의 몸이 모래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처용은 정말 방법이 없는지 성좌들에게 물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미 영혼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타깝지만 더는 가망이 없구나.]
미륵이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듯 대답했다.
연옥은 영혼이 흩어지지 않게 유지해주는 환경을 제공한다.
영혼은 연옥의 인정을 받아 성좌가 되어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연옥을 무단으로 빠져나오게 된다면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마인들은 무단으로 빼낸 영혼을 강제로 구속시켜 묶어 둔 것이었지만.
그런 구속도 풀린 데다가 지금까지 영혼에 누적된 피로와 고통이 너무 컸었다.
“젠장…….”
처용은 영웅의 소멸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전위는 그런 처용을 보며 옅게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구려, 이 못난 나는 그대를 해치려 했건만.
전위가 처용에게 마치 악수를 권하듯 손을 내밀었다.
-무인이여 그대의 이름은?
처용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처용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오.
처용의 말에 대답한 전위의 몸에서 푸른 오오라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내 부탁을 들어준 그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전위에게서 피어난 푸른 오오라는 손을 맞잡은 처용에게로 점차 흘러 들어갔다.
-내가 줄 건 생에 쌓아 온 경험의 일부가 전부이지만.
푸른 오오라가 전달됨과 동시에 전위의 안광이 꺼져갔다.
-부디 그대에게 도움이 되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퍼서석.
마치 모래바람을 맞은 잿더미처럼 흩날리며 전위가 사라졌다.
동시에.
[영웅 전위의 능력을 계승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가 20 증가합니다.]
[스킬 충전 강타가 파쇄격으로 진화합니다.]
[패시브 스킬 중장 무기 마스터리가 생성됩니다.]
[선인의 육체가 성장합니다.]
시스템의 알람을 확인한 처용은 전위가 준 월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처용은 전위가 소멸하여 사라진 자를 보며 묵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