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확실해?”
두 뱀파이어를 번갈아 본 처용이 다시 한번 물었다.
“깊숙한 곳으로 좀 더 가봐야 정확히 알아볼 것 같습니다.”
“난 확실하게 느껴져.”
“……루나님이 느끼셨다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루나는 뱀파이어 왕족.
그녀는 귀족인 류마보다 어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젠장.”
처용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때부터 작업을 하고 있었던 건가?”
회귀 전, 이 던전에 문제가 생겨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은 지금으로부터 2년 후였다.
지금 시기에는 문제가 전혀 없을 줄 알았지만.
마인들의 준비성은 철저했고 더욱 치밀했다.
“가지.”
처용이 둘을 향해 말했다.
“망할 놈들 계획을 엎어버리러.”
놈들이 이 던전에 무슨 짓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이 던전에 온 이상 놈들의 계획을 모조리 박살 낼 것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 느껴져.”
“일단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깊은 곳까지 가 봐야겠네.”
루나의 말에 처용이 대답하며 화염의 절을 꺼내 들었다.
-그르륵!
-그어어!
복도 저편에서 미라 병사들이 십여 명 정도 몰려오고 있었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앞으로 나선 처용은 발도 자세를 취하며 병사들을 기다렸다.
-화르륵!
처용의 검기와 아티팩트 스킬 화염의 절이 합쳐졌다.
강력한 화염의 기운을 담은 처용의 검기가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우웅!
조악한 창을 쥔 B급 미라들은 그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몰려오던 병사들의 허리가 분리되며 전부 몰살당했다.
열 명 단위로 몰려오던 적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며 나아가던 중.
-딸깍.
처용이 밟은 바닥의 벽돌 하나가 마치 버튼이 눌리듯 들어갔다.
그러자.
-쿠쿠쿵!
천장 위가 열리더니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거대한 철구가 떨어져 내렸다.
지름 5미터 크기의 철구가 떨어지는데도 처용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쾅!
지면이 울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쓸 만해 보이네.”
가시가 박힌 거대한 철구를 한 손으로 태연하게 받아낸 처용은 아공간을 열어 철구를 집어넣었다.
그 외에도.
-딸깍. 푸슈수수숫!
벽의 틈에서 맹독이 발려진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왔지만.
-팅! 팅팅!
처용의 살갗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설사 살을 찢고 맹독이 파고든다고 해도 선인의 육체에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나와 류마는 화살이 날아올 때 그림자에 녹아들어 맞지 않았다.
이들 역시 화살에 맞는다고 해도 전혀 지장은 없는 이들이었다.
뱀파이어 종족 역시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으니까.
“나쁘지 않네.”
화살을 들어 잘 살펴보니 충분히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맹독이 발려진 건 덤.
처용은 풍운부로 바람을 일으켜 화살을 모으고 보물전에 집어넣었다.
복도를 쭉 걷자 마치 연병장처럼 느껴지는 넓은 공동이 드러났다.
그러자.
-침……입자……다.
-죽……여라.
보라색 안광을 번쩍이는 미라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대략 백여 명의 B급 미라들 사이에 검은 보랏빛의 두꺼운 갑옷을 입은 미라들이 보였다.
놈들의 등급은 A급, 그리고.
-침입자를…… 살려 보내지 마라!
공작 깃이 달린 투구를 쓴 미라가 다른 놈들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주받은 백인장]
[등급 : A급]
[특징 : 저주를 받고 이름을 잃어버린 지휘관.]
[생전에는 지휘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던 유망주였다.]
[스킬 : 병졸 지휘, 전략적 배치, 대국 검술…….]
왼손에 병법서를 든 백인장 미라가 검을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포위 진영을 짜라!
백인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루나.”
처용은 루나와 류마를 향해 무언가를 말했다.
류마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루나는 환영 마법을 통해 은신했다.
열 명의 미라들이 처용을 향해 창을 겨누고 일제히 찔러왔다.
“뢰신보.”
-파직!
전기가 흐르는 듯한 소음과 동시에 처용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채쟁!
병사들이 내지른 창은 허공을 찔렀고 서로 교차하듯 창끝이 겹쳐졌다.
그리고.
번개처럼 사라졌던 처용이 교차된 창끝 위에 무릎을 굽힌 자세로 나타났다.
-화르륵!
처용이 오른손에 쥔 화염의 절을 한 바퀴 크게 휘두르자.
미라들의 머리가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장갑병들은 앞으로!
백인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꺼운 중장갑을 입은 이십여 명의 미라들이 앞으로 나섰다.
처용은 이들을 베기 위해 검기를 응축했다.
-우웅!
검기가 장갑병들에게 날아드는 순간.
-철벽 대형으로!
백인장의 재빠른 명령에 장갑병들이 방패를 이어 붙이며 모여들었다.
동시에 놈들에게서 검보라빛 오라가 흘러나왔다.
-쾅!
“호오?”
놀랍게도 처용이 내지른 검기가 튕겨 나왔다.
-몰아내라!
백인장의 명령에 장갑병들이 동시에 검을 내지르자.
마치 검기처럼 검보라빛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이야.”
처용은 검보랏빛 파동을 화염의 절로 쳐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다.
“풍신보.”
-휘릭!
작은 바람 소리와 동시에 처용의 다리에 바람이 휘감겼다.
공격이 빽빽하게 들어오는 창들을 가볍게 피해내고 병사들을 베었다.
일반 B급 병사들은 쉽게 없애버릴 수 있지만 A급의 장갑병들은 틈이 보이지 않았다.
각을 잡고 한 명만이라도 제대로 죽이려 하는 순간.
-1조 2조 철벽 대형으로!
즉각적으로 백인장의 명령이 떨어지며 놈들이 뭉쳐 든다.
-3조 4조는 퇴로를 막아라!
백인장의 명령에 따라 절도있게 움직이는 장갑병들.
명령에 일제히,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은 군인을 넘어 로봇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잘하면 철벽이도 사냥당하겠는데?”
이 미라들은 헌터로 비유하자면 철벽이도 충분히 사냥할 정도였다.
처용이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선 순간.
-함정을 작동시켜라!
백인장의 명령과 동시에.
-딸깍! 푸화화화!
처용의 발밑에서 뜨거운 화염이 분출되었다.
함정으로 만들어진 화염의 기둥 속에 처용이 불타듯 사라졌다.
-둘러싸라! 공격하라!
병사들이 몰려들며 화염에 갇힌 처용을 둘러싸 포위했다.
그때.
“화류태극권.”
화염의 벽이 이등분되며 처용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흡기장(吸氣掌)”
얼마 전에 되찾은 자연신보를 응용한 기술.
이등분되어 갈라진 화염의 벽이 처용의 왼손에 흡수되듯 뭉쳐 들었다.
그리고.
“화염부.”
화염이 흡수된 왼손으로 화염부 여섯 장을 추가로 꺼낸 다음 주먹을 굳게 쥐었다.
처용이 정권을 지르듯 왼손 주먹을 앞으로 내지르자.
“봉황진격(鳳凰進擊)!”
-키야악!
응축된 화염이 거대한 새, 봉황의 형상을 띄며 병사들에게 쇄도했다.
-모두! 밀집하라!
처용이 만들어낸 봉황을 본 백인장이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장갑병들이 마치 벽을 만들 듯 서로 다닥다닥 붙어 방패를 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반 병사들이 마치 벽에 힘을 더해 주듯 이어 섰다.
-콰쾅! 푸화화!
뭉친 병사들이 검보랏빛 기운을 내뿜으며 봉황을 막아섰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가고 있을 때.
-우웅!
처용이 화염의 절에 검기를 가득 불어넣고 백인장을 향해 날렸다.
-막아라!
백인장을 근처에서 호위하던 세 명의 장갑병이 처용의 검기를 막으려 앞에 나섰다.
-콰쾅!
검기가 장갑병들에게 가로막힌 순간.
“류마, 지금이다.”
백인장의 뒤, 그림자 속에서 류마가 나타났다.
“섀도우 블레이드!”
류마의 손에 맺혀 있는 어둠 속성의 칼날들이 백인장을 기습했다.
-촤촤착!
백인장은 목과 등,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아직 죽지 않은 백인장을 지키기 위해 세 명의 호위가 뒤를 돌아 달려갔지만.
“뢰신보.”
처용의 다리에 번개가 휘감기며 순식간에 그들에게 다가갔다.
“함부로 등을 돌리면 안 되지.”
-서걱!
세 명의 호위의 뒤편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처용은 놈들의 머리를 일제히 날려버렸다.
동시에.
-크아아아!
류마가 어둠의 칼날을 응축하여 백인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백인장이 쓰러지자 미라들을 휘감던 검보랏빛 기운이 약해졌다.
처용은 남은 병사들을 몰아붙이는 봉황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폭!”
-콰쾅!
처용이 손가락을 튕기자 봉황이 폭발을 일으켰다.
장갑병들의 갑옷이 반파되었고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흩어졌다.
지휘관을 잃은 이들은 이제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이제 해도 되는 거야?”
허공에서 날개를 펴고 나타난 루나가 처용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근처에는 혈기가 뭉쳐진 핏빛 바늘들이 수백 개 이상 만들어져 있었다.
“어, 시작해.”
“그럼, 알아서 피해?”
처용의 말과 동시에 루나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블러드 니들 레인!”
루나가 손을 내리자 핏빛 바늘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지상에 내리꽂혔다.
-촤자자자작!
1미터 크기의 핏빛 바늘들이 쏟아지자 류마는 조용히 그림자로 들어가 피신했다.
“풍신보.”
처용은 다리에 바람을 휘감아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이며 피해냈다.
루나가 만들어낸 혈기의 바늘은 강철 피부로 막을 수 없다 판단했다.
또 보법을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는 만큼 루나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수련이라 생각했다.
처용과 류마는 루나의 폭격에 전혀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그어어!
-크악!
이미 봉황의 폭발로 중상을 입은 미라들은 루나의 광역 공격을 버틸 수 없었다.
깔끔하게 첫 번째 공동이 정리되었다.
루나가 쏟아진 핏빛 바늘들을 다시 손으로 회수하며 내려왔다.
“여기가 위험한 곳이야?”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용에게 말했다.
협회라는 곳에 있을 때 안경을 쓴 인간이 위험한 곳이라며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전혀 다치거나 지친 이들 없이 모두 정리했다.
“하하, 우리니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거야.”
처용이 루나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그렇다 치지만, 앞에 있는 두 뱀파이어도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다.
“보통 파티가 이 백인장을 상대했다면 상당히 애먹었을걸?”
처용이 냉정하게 판단해 봤을 때.
이 저주받은 군영은 최소 A급 다섯 명에서 열 명 이상, B급 상위 헌터가 이십 명 정도 필요했다.
그것도 성기사와 사제, 강한 화력을 보유한 마법사 클래스 등 최적의 조합을 갖춘 파티로 말이다.
이곳은 A급 던전, C급 헌터는 절대로 버틸 수 없는 곳이었다.
“권백호가 직접 나선다면 조금 나을 수도 있겠네.”
최상위 헌터인 백호가 직접 나선다면 아마 헌터들이 죽는 상황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호오, 이것 봐라?”
처용은 백인장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말했다.
백인장의 사체 옆에는 그가 들고 있던 책, 병법서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운 진짜 좋네, 아티팩트가 드랍 될 줄이야.”
아티팩트는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여 얻는 자원 중 귀하게 여겨지는 자원이었다.
“이 낡아빠진 책이 좋은 거야?”
루나가 낡은 책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하, 이 책이 억만금보다 가치가 있을 수 있지.”
처용이 웃으며 대답했다.
던전에서 드랍된 아티팩트.
이것들은 보통 제작된 아티팩트보다 강력한 성능을 가진 것들이 많았다.
스킬석의 가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 발견된 S급 던전 아서왕의 시련.
이 던전은 독특하게도 파티가 아닌 개인이 도전하는 1인 던전이었다.
총 20가지 시련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의 시련을 통과하면 중도 포기가 가능했다.
수많은 A급 헌터들에 S급 헌터들까지 도전했지만, 모두 절반의 시련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그때 A급 헌터 하나가 이 던전을 끊임없이 도전했고.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기며 도전한 끝에 결국 클리어에 성공했다.
그 헌터는 ‘영웅에게 인정받은 자’라는 칭호와 함께 신화급 아티팩트의 주인이 되었다.
A급 헌터 올리버, 통칭 ‘아서’라 불리게 된 헌터.
그는 A급 헌터임에도 S급 헌터와 맞먹는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당당하게 최상위 헌터로 등극했다.
“자, 과연.”
처용이 책을 집어 들고 감정을 시작했다.
[대국의 병법서 / 아티팩트]
[등급 : 유니크+]
[병사들을 다루는 병법의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지휘를 받는 부하들의 능력치를 증가시킵니다.]
-지휘를 받는 이들의 모든 능력치 10% 증가.
-병법서의 판단 사용 가능.
“……특정 클래스에게는 진짜 억만금의 가치가 있겠는데?”
낡은 책을 살펴본 처용이 감탄했다.
책을 짚고 페이지를 넘기자 마치 자동으로 병법의 지식이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거기에 아티팩트 스킬인 병법서의 판단.
이 스킬은 병사를 운용했을 때의 결과를 대략적으로 알려주는 스킬이었다.
예를 들어 천 명의 병사로 오늘 성을 공격한다 판단했을 때.
그 결과를 대길(大吉) 혹은 대흉(大凶), 이런 방식으로 보여준다.
거의 예지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소환사 클래스가 이걸 들면…… 하하.”
아티팩트를 보물전에 챙겨 넣은 처용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보물전에 어울리는 걸 얻었네.”
이 아티팩트는 충분히 보물(寶物)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었다.
“자, 그럼 계속 나아갈까.”
처용이 뱀파이어 둘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
-화르륵!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중앙에 검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마치 지하 동굴을 깎아 만든 제단처럼 느껴지는 공간.
그 제단 주변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입이 열렸다.
“역시나.”
검은 로브 사이로 흘러나온 붉은 머리카락과 어둠 속에서도 타오르는 듯 보이는 눈동자.
제단 위에 올라선 마녀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놈이…… 왔어!”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마치 생명체의 뼈를 깎고 이어 붙여 만든 듯한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제아무리 조커라도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성물’을 굳게 쥔 마녀가 마치 결전을 준비하듯 각오를 다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