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처용이 하루를 보법 연습에 매달린 결과.
“겨우 밸런스를 맞췄네.”
드디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처용의 다리 부근에 바람과 번개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자.
-파직!
마치 한 줄기의 번개가 치듯 샛노란 섬광과 함께 처용이 사라졌다.
“어?”
루나는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온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좀 떨어진 장소에서 사라졌던 처용이 옆으로 와 있었다.
“이번엔 벽에 안 박았네?”
감탄하듯 말한 루나가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바로 옆까지 순식간에 다가왔으니까.
이런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접근하여 공격한다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성능이 좋은 만큼 다루기가 어려운 게 문제야.”
처용이 말을 내뱉는 동시에 다리를 뒤로 박찼다.
-휘잉!
이번엔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루나의 옆에 있던 처용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방금처럼 빠르지는 않은데 뭔가…….”
좀 전의 번개 같은 움직임은 직선적이고 신속했다.
그러나 방금 보여준 움직임은 조금 느렸지만 마치 자유로운 바람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대충 각은 잡혔는데…….”
처용은 보법에 성공했어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직 이전처럼 익숙하게 사용하려면 연습이 더 필요했다.
추가로 시스템 알림이 들리지 않았다.
보법을 완전히 되찾는 기준점이 바로 시스템의 인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일렀던 건가?’
원래 이 보법은 회귀 전 처용이 150레벨이 넘었을 때 만든 보법이었다.
그러니 지금 레벨의 육체로는 사용하는 데 무리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일단 부딪혀 보자.’
처용은 생각을 다시 했다.
그때보다 지금의 레벨이 낮다고 해도 육체의 스펙은 엇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전체적으로는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수많은 지식들과 경험들, 노하우를 지금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레벨은 중요하지.”
조금만 더 연습의 시간을 가지고 협회를 방문할 생각이었다.
“이거 어려워.”
루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처용에게 다가왔다.
처용은 루나가 움켜쥐어 들어 올린 양손을 바라봤다.
왼손에는 시커먼 암 속성 마나가 뭉쳐 있었고.
오른손에는 피가 뿜어져 나와 뭉쳐 있었다.
그 핏빛 에너지는 뱀파이어 왕족만이 지닌 혈기(血氣)라는 힘이었다.
“두 기운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것까지는 했지만…….”
루나는 현재 처용이 알려준 훈련법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우선 서로 다른 기운을 각각 따로 불러내고 운용하는 것.
루나가 지닌 어둠과 피의 힘을 동시에 불러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걸 따로 동시에 움직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미간을 찌푸린 루나가 집중하며 손을 움직였다.
왼손에 모인 암 속성 마나로는 환영 마법을 사용하고.
오른손에 모인 혈기로는 피의 창을 만들어 보았다.
그러자.
-푸슈우 펑!
암 속성 마나는 흩어지며 사라졌고 혈기는 풍선이 터지듯 터지며 다시 루나의 손에 흡수되었다.
“이!”
오기로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다.
“같은 기운으로 동시에 다른 능력을 쓰는 건 쉬웠는데…….”
루나는 어둠 속성 마나만을 가지고 동시에 세 가지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혈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신을 만듦과 동시에 블러드 재블린, 기요틴 커터까지 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기운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만큼은 힘들었다.
그래서 이 훈련법을 제시한 처용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다.
“내 방법이 너에게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잠시 생각하듯 고민한 처용이 입을 열었다.
“일단 두 기운을 동시에 유지한 상태에서.”
처용의 말과 동시에 루나가 두 기운을 다시 끌어내 유지했다.
여기까지는 수월했으니까.
“그래, 그 상태에서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다른 그림을 그려봐.”
“……뭐 어떻게?”
처용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루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음, 대충 이런 식으로.”
루나의 물음에 처용은 왼손에 화 속성 마나를 오른손에는 수 속성 마나를 끌어냈다.
그리고 양손의 손가락을 펴고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는 붉은색 별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푸른색 음표를 빠르게, 동시에 그려내었다.
그다음에는 왼손으로는 강아지를 오른손으로는 고양이를 그려내었다.
마치 3D 펜으로 그린 것처럼 붉은색과 푸른색 그림들이 허공에 떠다녔다.
“어때 참 쉽지?”
“…….”
루나는 생각보다 잘 그린 처용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멍해졌다.
“너무 어려우면 동그라미랑 세모부터 시작해 봐.”
처용이 허공에 동그라미와 세모를 동시에 그려내며 말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루나가 자신감을 담아 말했다.
‘동그라미와 세모쯤은 별거 아닌…….’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양손이 덜덜 떨렸다.
분명 동그라미와 세모라는 간단한 도형을 그리는 것인데 쉽지 않았다.
“이이!”
루나가 인상을 쓰며 어떻게든 떨리는 손을 바로잡고 도형을 완성해 보았다.
하지만.
“……슬라임?”
루나의 작품을 바라보는 처용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의문 섞인 말이 나왔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도형이 아닌 쭈글쭈글한 슬라임(?) 두 마리였다.
“시끄러.”
창피함을 감추고 차갑게 말한 루나가 걸음을 옮겨 떨어졌다.
그래도 처용이 알려준 방법을 쓸 모양인지 연습하기 시작했다.
‘내가 반드시 하고 만다!’
루나의 눈빛에 오기가 가득 들어찼다.
수련탑 1층이 쭈글쭈글한 슬라임 그림들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
협회를 찾아온 처용이 태민의 사무실로 가던 중.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음?”
분노가 섞인 듯한 태민의 고함이 들려왔다.
처용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태민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B급 던전에 C급 헌터들만을 보내겠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태민은 문을 등지고 창밖을 보고 있기에 처용이 온걸 모르는 듯싶었다.
처용이 기감을 넓혀 귀를 기울이자 전화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C급 헌터를 많이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대충 40명쯤?
“그들 중 대부분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정녕 모르는 겁니까?”
태민은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고 처용은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인력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널리고 널린 게 C급 헌터인데…….
“헌터들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태민이 전화 상대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그답지 않았다.
“절대로! 허가할 수 없습니다.”
-협회에 인력이 부족한 걸로 아는데요? 처리할 수 있겠어요?
전화 상대가 비아냥을 섞어 말할 때 처용이 벽을 두드리며 기척을 드러냈다.
태민이 놀란 듯 처용을 보자 처용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정확한 타이밍에 온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는 태민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을 건넸다.
처용을 본 태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전화 상대를 향해 강하게 대답했다.
“당신네처럼 개판인 길드의 도움 따위 필요 없습니다.”
-무, 뭣?
“이번 정기 토벌 건은 협회가 자체적으로 처리하죠.”
말을 마친 태민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이스 타이밍입니다. 처용 님.”
태민이 처용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설명해 주시겠어요?”
“하아, 이 사달의 원인은 어떤 던전 때문입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태민은 처용의 질문에 설명을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 새로운 던전이 발견되었다.
등급은 B급 상위 던전으로 공략 난이도가 좀 높았고.
대형 도시급 규모를 가지고 있어 던전 자체도 넓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황금 골렘이요?”
“네, 던전에서 황금 골렘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새로 발견된 던전은 다양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출몰하는 곳.
그 골렘들 중에는 전신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황금 골렘도 있었다.
“그 금덩이에 눈이 돌아간 길드장들이 정예 헌터들을 전부 보냈습니다.”
그 황금 골렘을 얻기 위해 각 길드들은 B급 이상의 헌터들을 모조리 투입시켰다.
“문제는 정기 토벌을 해야 하는 던전에 배치된 B급 헌터들도 그쪽으로 빠졌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정기 토벌을 해야 하는 던전들이 몇 개 있었다.
던전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는 한 정기적인 토벌은 필수였다.
몬스터를 줄이지 않으면 게이트가 폭주하여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길드들은 C급 헌터 다수를 보내 던전을 토벌하려고 했었던 것이었다.
“미친놈들.”
처용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물론, B급 하위 던전을 C급 헌터 다수가 클리어할 수 있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과욕을 위해 길드의 식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자 한 것이었다.
“모든 길드가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망이 하늘을 찌르는 인간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것도 헌터들을 이끄는 길드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인간들이.
“방금 통화한 그놈은 어디 길드입니까?”
처용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태민을 향해 물었다.
“올림포스 소속 길드 중 하나입니다.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라고.”
태민의 말을 들은 처용의 한쪽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어떤 길드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 하하.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길드네요.”
처용은 비웃음을 가득 섞어 말했다.
올림포스 소속 길드 중 하나인 워 글래디에이터 길드.
그 길드의 성좌가 바로 전쟁신, 아니 패륜아 아레스였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태민이 처용을 향해 말했다.
“전부 몇 개입니까?”
바로 본론에 들어간 처용의 말에 태민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길드들이 내팽개친 던전은 총 다섯 개입니다. 어쩌면 더 늘어날 수도…….”
태민이 태블릿을 들어 처용에게 설명해 주었다.
총 C급 던전 세 개, B급 던전이 두 개였다.
그중 B급 던전 하나는 중형 도시급으로 규모가 좀 컸었다.
처용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레벨업의 필요성과 보법의 연습이 필요한 참이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하겠죠?”
“아니길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 골렘 던전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이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호와 현아를 포함한 협회 헌터들은 이미 나서고 있었지만,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C급 헌터들만을 공략에 보냈다가는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하루.”
처용은 어두운 표정을 짓는 태민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태민은 설마 하는 눈빛을 보내며 동시에 반문했다.
던전 하나당 하루에 끝내겠다는 말인가 싶었지만…….
“방금 얘기하신 던전 다섯 개 오늘 다 정리해 드리죠.”
“……!!”
태민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고막을 의심했다.
하루에 한 개의 던전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도 놀라운 상황이다.
그런데 하루에 다섯 개의 던전을 처리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왠지…….’
처용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숨통이 확 트일 것 같습니다.”
태민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길드장 놈들에게 엿도 먹일 수 있고요.”
태민은 오늘 과욕을 드러낸 길드들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각 길드들은 직업상 헌터 협회에 협조를 구하는 일이 많았다.
던전의 알선이라던가 입장 허락, 혹은 헌터들의 혜택과 복지 관련 등.
헌터 협회를 통해야만 처리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
“헌터의 의무를 저버린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입니다.”
태민이 안경을 들어 올리며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
“그게 더 마음에 드는데요?”
처용 역시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
태민에게 던전 위치를 안내받은 처용은 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이전 개미굴과 비슷한 드넓은 지하 동굴 형태의 C급 던전.
그리고.
-샤샤샥! 사각! 사각!
1미터 크기의 바퀴벌레들이 동굴 벽면에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청객인 처용을 향해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10분 안에 끝내 볼까?”
던전의 내부를 살펴본 처용이 충분하다는 듯 말했다.
“아타.”
-준비는 언제나 되어있습니다. 용님.
아타의 말에 처용이 웃음을 지으며 태룡전의 열쇠를 꺼내었다.
-우우웅!
황금빛 게이트가 열리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다섯 마리의 개미가 나왔다.
“일렬로 서.”
처용의 말에 철벽이를 포함한 다섯 마리의 개미가 일렬로 섰다.
그리고 처용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밀어!”
처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이익!
-캬아악!
개미들이 각각 자신의 속성 마나들을 분출하며 돌격했다.
-콰콰콰쾅!
이곳은 C급 던전.
바퀴벌레들은 마치 불도저처럼 던전을 일직선으로 밀고 들어오는 개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바퀴벌레의 숫자가 워낙 많은 탓인지 처용의 레벨이 올랐다.
이 개미들은 군체여왕인 아타의 병사들.
그리고 아타는 신수의 격으로 처용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그 때문인지 개미들이 몬스터를 사냥해도 처용에게 경험치가 들어왔다.
개미들이 티라노를 잡았을 때 레벨이 오른 것을 보고 깨달았었다.
지금은 그저 개미들의 뒤를 따라가며 쓸만한 것들만 주워 담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벌써 던전의 절반 이상을 돌파했다.
멈추지 않고 길을 막는 바퀴벌레들을 분쇄하는 개미들.
“5분 만에 끝내겠는데?”
마치 산책하듯 개미들을 따라가던 처용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