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그녀가 계승자를 도와준다니 다행입니다.]
성좌들이 거주하는 태룡전 내부.
보살이 시스템으로 괴수와 맞서고 있는 처용을 보며 말했다.
[도와준다기보다는 제자 녀석에게 호기심이 있어 보였습니다.]
여래는 자신이 데려온 손님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 방법만이 그녀의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래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흠, 하지만 다른 놈들이 이걸 안다면 난리가 날 터인데…….]
미륵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약조를 먼저 어긴 것은 그들입니다.]
여래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저는 그녀만으로 끝낼 생각이 아닙니다.]
[하, 하하하.]
여래의 말에 미륵이 크게 웃어 보였다.
[아주 화려하게 일을 벌이십니다?]
[기왕이면 판을 크게 키우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여래의 말에 미륵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 멍청한 성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미륵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두 신을 바라본 보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태초의 마수’들이 우리를 아니, 계승자를 도와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살이 표정에는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했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생사는…….]
[아직은 괜찮을 겁니다.]
여래가 보살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협조해준 덕분에 다른 녀석 하나의 생사는 확인했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보살이 안도한 듯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일렁였다.
[성좌들이 신법의 약조를 깨 버릴 줄은…….]
보살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먼 과거 여래가 아직 반신이었던 시절.
여래와 다른 성좌들, 그리고 태초의 마수까지 엮였던 사건이 있었다.
성좌들의 시기와 욕심으로 하나의 세계가 소멸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로 분노한 여래가 그 일을 계획했던 성좌들의 신계를 공격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한 명의 반신에 의해 선천적 신격들과 신계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성좌들의 피를 뒤집어쓴 여래가 혈선(血仙)이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결국, 보다 못한 보살이 미륵을 포함한 대신급 신격들을 모아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좌들이 ‘신법의 약조’를 걸고 맹세했다.
그 이후 여래의 학살은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그 약조가 깨졌다는 것이었다.
신법의 약조는 태초신의 인증 하에 신격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다.
대신조차도 그 약조를 깨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신법의 약조가 깨어진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여래가 먼 곳을 바라보듯 눈을 좁히며 말했다.
태초신이 소멸하여 사라졌다 해도 약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크-크타니드.]
태초신의 파편에 악의 근원들이 뭉쳐 탄생한 악의 종주.
그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악의 종주가 무언가 수를 쓴 것 같습니다.]
여래의 말에 보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째서 성좌들이 악의 종주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욕망하는 이들이지 않습니까.]
여래가 보살의 말에 답하며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그들의 과욕이 이 정도로 추악해질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과욕을 보인 성좌들을 모두 죽였어야 했다.
‘아니, 이미 흘러간 일을…….’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던 여래가 눈을 감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래는 짧은 후회는 날려버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
이것은 비단 처용만의 다짐은 아니었다.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사양입니다.]
처용이 겪은 미래에서는 그 비열한 성좌들에게 당한 듯싶었지만.
지금은 회귀한 처용 덕분에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
제자를 위해서라도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
고행탑 2층.
처용은 거대 괴수와 다섯 번째 마주하고 있었다.
-콰쾅! 쾅!
묵직한 무게감이 덮쳐오는 감각을 느끼며 아슬아슬하게 집게발들을 피해냈다.
다섯 번째쯤 도전하면 괴수의 집게발 정도는 우습게 피할 줄 알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몬스터의 공격은 패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몬스터가 살아온 습성, 싸움 방식, 발톱이나 이빨같이 가장 발달한 신체 등.
수십 년간 헌터로서 싸워온 처용이기에 조금만 싸워보면 그것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괴수는 일개 몬스터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패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마치 처용의 움직임을 보고 공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처럼.
-쏴아아!
처용이 집게발을 피해 이동하려 했던 바위 쪽으로 물줄기 칼날이 날아왔다.
“수류태극권.”
처용의 양손이 수 속성 마나로 감싸졌다.
태극을 그린 처용의 손바닥이 물줄기 칼날과 맞닿았다.
-촤아!
물줄기 칼날들이 처용의 손바닥을 타고 부드럽게 빗겨나갔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처용의 손바닥은 멀쩡했다.
“나선 반탄장!”
물줄기 칼날을 튕겨낸 처용의 손바닥 위가 마치 빠르게 회전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괴수와 다섯 번을 맞닥뜨리면서 완성한 기술이었다.
처용이 처음 괴수의 물줄기 칼날을 튕겨냈을 때.
손바닥이 마치 전기톱에 당한 것처럼 찢어졌었다.
그 이후 여러 번 정밀하게 더 관찰하며 그 이유를 파악했다.
괴수가 발사하는 물줄기 칼날은 극한으로 압축된 것도 있었지만.
그 압축된 수속성 원소들이 전기톱처럼 빠르게 회전까지 하고 있었다.
처용은 회전하는 방향에 맞춰 자신의 손을 코팅한 수속성 원소도 회전시켰다.
회전하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마찰 없이 돌아가듯.
물줄기 칼날의 회전 속도와 방향을 맞춘 수류태극권이 부드럽게 물줄기를 튕겨낸 것이다.
-촤아! 촤아!
처용이 모든 물줄기 칼날을 튕겨내는 것은 아니었다.
회피하면서 피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것들만 튕겨내고 있었다.
물줄기 칼날을 튕겨내면 손에 두른 수류태극권이 깎여나갔다.
연속으로 두 번 튕겨내면 처용의 손에 코팅된 원소가 완전히 벗겨진다.
그랬기에 회피에 집중하면서 피하기 힘든 것들만 쳐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갈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위이잉!
괴수의 입에 새하얀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처용은 재빠르게 발을 박차며 위로 향했다.
-촤아! 촤아!
자신을 격추하려 다가오는 물줄기 칼날들을 쳐내며 계속 올라갔다.
[남은 높이 5미터]
1단계 통과까지 코앞에 달한 순간.
-!!
괴수의 입에서 에너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씨-!”
처용은 목표를 코앞에 둔 채 에너지 광선 속으로 사라졌다.
“아오, 젠장!”
1층으로 되돌아온 처용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다섯 번을 도전하며 괴수의 물줄기 칼날까지 튕겨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00미터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날아오는 에너지 광선.
그걸 피하거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 광선의 공격 속도는 거의 빛처럼 느껴졌으니까.
‘보법을 빨리 되찾아야겠네.’
처용은 바로 재입장하지 않았다.
또 들어가 봐야 그 에너지 광선에 당할 것이다.
지금은 열 보 전진을 위해 한 보 물러설 때였다.
“음?”
처용이 1층 중앙을 바라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루나가 정말 지친 듯 대짜로 뻗어 있었다.
“만만치 않지?”
처용은 2층으로 재입장 할 때 루나를 힐끔 봤었다.
그녀는 다른 금강역사도 아닌 무려 소룡과 대련중이었다.
의지를 갖고 나아가려는 루나의 모습이 기특해 보였지만.
소룡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내가…… 저 골렘만큼은 이기고 만다.”
루나는 지쳐 보였지만 목소리에 투지와 오기가 섞여 있었다.
“열심히 해봐.”
처용이 작게 응원을 보냈다.
“아마 네가 소룡을 이기는 날이 오면.”
처용은 루나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그만큼 크게 성장한 것일 테니까.”
루나 역시 처용의 말에 공감했다.
-챙! 챙! 콰쾅!
처용과 루나의 시선이 근처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루나와 좀 떨어진 곳에서 펼쳐진 배틀필드.
그 안에서 류마와 A급 금강역사 하나가 대련중이었다.
소룡과 대련하는 루나를 보고 호기심이 든 류마가 아타에게 수련장에 대해 물었었고.
아타가 설명을 해 주자 한번 시험해 본 것이었다.
“후!”
대련이 끝나자 금강역사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류마는 처용을 발견했는지 다가왔다.
“어때, 할 만해?”
처용이 류마를 향해 웃어 보이며 묻자.
“전사들을 육성하기에 아주 훌륭한 곳인 것 같습니다.”
류마가 감탄한 듯 처용에게 말했다.
“정말 신기한 곳입니다. 신의 성역이란…….”
처용 역시 류마의 말에 공감하며 이들과 거리를 벌렸다.
“수련하게?”
“어, 근데 금강역사들과 대련은 안 할 거야.”
처용은 보법을 되찾기 위해 수련할 생각이었다.
‘다소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보법이 아니면 그 괴수의 에너지 광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루나의 말에 대답한 처용은 차렷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잃어버린 기술을 되찾으려면 집중해야 했다.
‘우선 풍 속성.’
처용은 자연부를 쓰지 않고 풍 속성 마나만을 이끌어냈다.
그러자 풍 속성 마나로 인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처용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뇌 속성.’
휘몰아치는 바람에 샛노란 번개가 섞이기 시작했다.
전부가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충돌을 일으키고 있을 때.
‘명 속성으로 중심을 잡는다.’
바람과 번개에 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처용이 끌어올린 명 속성 마나는 두 속성의 충돌에 끼어들며 그것을 진정시켰다.
각 속성에는 종류별로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화 속성은 뜨겁고 파괴적이다.
수 속성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풍 속성은 자유롭고 변화가 심했다.
명 속성의 특징은 바로 다른 속성의 능력을 증폭시키고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우우웅!
휘몰아치는 바람과 이리저리 튀는 스파크가 점점 가라앉으며 안정되었다.
“후.”
짧게 숨을 내뱉은 처용이 다시 속성 마나를 세심하게 조절하기 시작했다.
‘우선 풍 속성을 조금 낮추고 뇌 속성을 조금 올려야겠군.’
처용의 다리 부근에 스파크가 조금씩 일어나며 환하게 빛났다.
“일단 한 걸-.”
처용이 말을 하며 동시에 한 발을 내딛자.
-피슈웅!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나와 류마조차 그 움직임을 순간 놓쳤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콰쾅!
마치 몸을 던져 들이받은 듯 처용이 벽에 처박혔다.
“젠장! 더 많이 낮춰야겠네!”
처용이 투덜거리면서 벽에 박힌 몸을 빼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루나가 처용을 보며 의문을 가득 담아 질문했다.
“뭐긴, 조절을 못 한 거지.”
처용은 방금 자신이 속성 마력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설명하며 훈련을 이었다.
“마나의 농도를 더 낮추고 위력도 내려야 돼.”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데 더 낮춰서 조정한다고?”
루나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 속도로 움직이는 기술이라면 어지간한 적들은 대처할 수 없다.
“강하고 센 것 만이 전부가 아니야.”
처용은 잘 들으라는 듯 말했다.
“스스로가 온전히 다룰 수 있어야 자신의 기술인 거야.”
방금도 강한 육체를 지닌 처용이기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헌터의 육체로 방금 같은 짓을 했다면.
육체가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온몸이 부서졌을 것이다.
처용도 이곳 수련탑이 아니었다면 이런 무식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쓸 수 없으면 없는 것만도 못해.”
특히, 목숨이 걸려 있는 실제 전투에서 무리하게 강한 기술을 사용한다?
그건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능력과 수준을 안다고 해서 싸움에서 유리하거나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한계는 어느 정도이며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는지 등.
그것을 알아야 작전을 세울 수 있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좀 전보다 속성 마나의 농도를 더 낮추고 한 발을 내디뎠다.
-피슈웅! 콰쾅!
하지만 결과는 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밸런스 잡기 어렵네.”
벽에 처용의 실루엣 모양의 구멍이 추가로 생겼다.
“후, 다시.”
심호흡을 한 처용이 다시 속성 마나를 이끌어냈다.
쉽지 않을 것이라고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