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분명 환상은 아니었다.
저 괴물에게서 느껴지는 기척과 마나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처용은 저 괴물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통찰의 눈을 발동했다.
[카■■의 ■■]
[등급 : ■■…….]
[칭호 : 태■■ ■■…….]
[특징 : ■■■■…….]
[스킬 : ■■■…….]
마치 미륵을 응시했을 때처럼 곳곳이 가려져 있었다.
괴물을 보고 처용과 루나가 멍해 있을 때 재차 시스템이 울려왔다.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100미터 높이로 올라가십시오.]
“뭐?”
처용이 시스템의 음성에 대답하듯 말한 순간.
-그르르.
묵직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흔들며 울려 퍼졌다.
머리로 보이는 갑각의 일부가 열리자.
보랏빛 안광을 빛내는 여덟 개의 눈이 드러나며 처용과 루나를 응시했다.
동시에 괴수의 집게발 하나가 처용과 루나를 향해 쇄도했다.
“피해, 루나!”
처용이 멍한 표정을 짓는 루나에게 외치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녀석의 집게발 크기만 대충 비행기와 맞먹는 크기였다.
-콰쾅!
처용과 루나가 있던 제단이 산산이 조각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꺄아아!”
루나는 처용의 경고 덕에 무사히 피하긴 했지만.
괴수에게 압도당한 탓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해!”
상황을 파악한 처용이 루나에게 외치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처용이 부유하고 있는 바위 하나에 올라섰다.
[남은 높이 92미터]
시스템을 확인한 처용이 더 높은 바위로 뛰어 올라타자 남은 높이가 더 줄어들었다.
루나 역시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분신을 만들며 날아올랐다.
문제는 보랏빛 눈으로 처용과 루나를 노려보는 괴수였다.
-콰쾅!
또 하나의 집게발이 처용이 있던 바위를 산산이 조각냈다.
“젠장!”
다리를 박차 집게발을 피해냈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저 무지막지한 크기에서 오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마주하니 막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근처 바위로 이동한 처용은 곧장 다른 바위로 뛰어올랐다.
-콰쾅!
이번엔 집게발이 아닌 두꺼운 다리가 대검처럼 위에서 내려찍었다.
“저 덩치에 무슨 속도가……!”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한 처용은 풍운부를 다리에 붙이고 허공을 밟아 뛰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처용이 아니었다.
“토류부-대지의 손!”
처용은 부서진 바위 파편을 모아 대지의 손을 형성했다.
철벽부로 코팅까지 마친 강철 주먹 네 개가 처용 옆에 떠올랐다.
충전 강타에 지진의 일격까지 섞은 강철 주먹 두 개가 거대 괴수를 향해 쏘아졌다.
어지간한 빌딩은 단번에 부술 위력이었다.
유효타는 무리더라도 녀석의 움직임을 잠깐 주춤거리게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퍼서석!
괴수가 다리 하나를 가볍게 휘둘러 쳐내자 강철 주먹이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미친!”
쏘아 보낸 강철 주먹은 괴수의 다리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침 대지의 손 두 개가 소멸해 자연부에 여유가 생겼다.
“뇌격부.”
양손에 뇌격부를 각각 3장씩 만들어낸 처용이 두 손을 합장했다.
“뢰옥탄(雷玉彈)!”
스파크를 마구 분출하는 농구공 크기의 샛노란 구체가 처용의 손에 만들어졌다.
마치 투수가 야구공을 힘껏 던지듯 뢰옥탄을 움켜쥔 처용이 괴수를 향해 그것을 내던졌다.
전격 속성이 극한으로 압축된 구체가 괴수의 몸통에 닿자 전격 폭발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직!
지금 이 장소는 물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였다.
즉, 전격 속성의 감전 능력이 극대화되는 곳이다.
폭발한 뢰옥탄은 타격 부위를 중심으로 샛노란 스파크를 퍼트리며 괴수를 감전시켰다.
‘폭포 전체가 감전된 이상 조금은 마비가 올-’
-쾅! 쾅! 쾅!
괴수의 집게발이 시간차를 두고 처용을 내리찍었다.
“이런!”
처용은 몸을 틀어 집게발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이 과정에서 남은 대지의 손 두 개 중 하나가 파괴되었다.
괴수는 감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계속 공격을 해 왔다.
처용은 전격과 화염을 섞은 염뢰옥세 개를 다리 관절에 던져 폭파시켰다.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폭포가 흔들렸지만, 괴수의 다리는 조금 그을렸을 뿐 멀쩡했다.
“빙결부-설녀의 숨결!”
빙결부를 이용해 폭포와 다리를 얼리기도 해 봤지만.
-우드득!
괴수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듯 얼음을 부숴냈다.
“젠장할!”
결국, 처용은 괴수를 향한 공격을 포기했다.
시스템이 설명한 시험 내용도 괴수를 쓰러뜨리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우선 100미터 높이로 올라가라는 것.
순순히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겨우 100미터 높이였다.
저 괴수가 방해를 한다고 해도 회피하며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50미터 높이를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쏴아악!
심상치 않은 느낌에 처용이 다리를 서둘러 박차 피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부유하는 바위를 조각내며 지나갔다.
괴수의 집게 중 일부가 벌어지더니 고압축 물줄기 칼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용은 하나 남은 대지의 손을 내세워 공격을 가로막았다.
대지의 손은 절단에 내성이 있는 강철 속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물줄기쯤은 충분히 막아낼 수-’
-서걱!
공격을 맞은 대지의 손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이런 미친!”
처용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대지의 손을 버리고 서둘러 자리를 박차 벗어났다.
고압축 물줄기의 절삭력은 검기를 아득히 상회했다.
문제는 그 물줄기 칼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건 다 못 피해!”
근처에서 루나의 비명이 울려왔다.
나름 잘 피하며 나아가던 루나였지만.
물의 칼날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일곱의 분신 중 두 개가 사라졌다.
지금도 분신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촤아!
날카로운 예기가 처용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철 피부는 우습다는 듯 깊게 베인 상처가 생겼다.
‘막을 수 없다면!’
처용은 양손에 수류부를 두 장씩 생성하여 손에 쥐었다.
마치 물로 만든 장갑을 낀 것처럼 처용의 손이 수 속성 마나로 코팅되었다.
“수류태극권(水流太極拳).”
왼쪽 손바닥을 아래로 오른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양손을 펼쳤다.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손으로 태극을 그린 처용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반탄장(反彈掌)!”
쇄도해오는 물줄기 칼날이 처용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반탄장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특징인 태극권에 자연부를 섞어 만들어낸 기술이었다.
속성 공격을 같은 속성을 이용하여 받아칠 수 있기에 물줄기 칼날을 튕겨내는 데 성공은 했지만.
“크윽!”
물줄기 칼날을 막아낸 처용의 오른손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물줄기 칼날 구성의 원리는 대략 파악했다 해도 오른손의 상처가 심해 더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쏴아! 쏴아아!
그 와중에도 물줄기 칼날들은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발을 빠르게 움직여 직격당하는 것만큼은 피했지만.
-촤악!
옆구리와 허벅지 쪽에 상처가 생겼다.
이대로는 고작 1단계인 100미터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위이잉!
괴수의 입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심상치 않은 에너지가 모이고 있었다.
‘항마의 화신을…… 써야 하나?’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시간은 처용을 기다리지 않았다.
-!!
괴수의 입에서 모여들던 에너지가 처용을 향해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다.
“늦었-!”
괴수가 발사한 백색의 섬광이 처용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새하얀 섬광이 덮쳐든 이후 처용의 시야가 검게 암전되었다.
“으허억!”
암전되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자 처용이 숨을 들이쉬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련탑 1층의 진법 앞이었다.
찢어진 오른손과 베였던 상처들은 모두 없었다.
루나는 처용보다 먼저 와 있었다.
하지만, 그 괴수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는지 멍한 모습이었다.
[그래, 어떠했느냐 제자야?]
처용이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여래가 다가왔다.
잠시 침묵한 처용의 입이 열렸다.
“환상은…… 아니 환상일 리가 없겠죠.”
환상이었으면 통찰의 눈이 즉각 파악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것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악신들 그리고 재앙급 마수들과 수도 없이 싸워본 처용이었다.
당연히 그들 중에서도 한 덩치 자랑하는 놈들이 많았다.
S급 몬스터는 어지간한 건물들을 발로 밟아 부수는 덩치였으니까.
하지만, 방금까지 마주했었던 괴수는 차원이 달랐다.
건물? 그 괴수는 건물이 아니라 빌딩을 밟아 부수며 도시를 순식간에 초토화할 것이다.
만약 지금 시기에 유례없는 초대형 게이트가 열리고 저 괴수가 나타난다면?
나라 한두 개 멸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성좌입니까?”
처용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의심이 갔기에 물었다.
통찰의 눈으로 괴수를 응시했을 때 놈의 정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확인 불가’라는 표기가 아닌 장막이 쳐지듯 보이지 않았다.
처용은 이런 현상을 알고 있었다.
통찰의 눈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상은 ‘신격’을 지닌 성좌들.
상위 신격일수록 그 장막이 두꺼워지고 정보를 볼 수 없었다.
이전 처용이 미륵을 응시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녀의 놀이…… 아니 시험을 통과한다면 알려 줄 것이다.]
여래가 처용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버겁겠느냐?]
처용은 여래를 마주 보다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리가요?”
조금 전 괴수를 떠올린 처용은 다시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 괴수의 덩치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과연 그 괴수가 상위 악신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악의 종주…… ‘조크 크타니드’보다 강할까?
답은 절대 아니었다.
“스승님께서 준비해주신 것, 한껏 활용하겠습니다.”
그 괴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시험의 형태라고 해도 그 괴수와의 반복적인 전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지닌 상대와 무한히 싸우는 것.
이것은 확실하게 성장의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
처용이 다시 진법 위로 올라섰다.
“거, 거길 또 가게?”
루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처용을 향해 물었다.
“1단계조차 통과하지 못했어.”
처용은 주먹을 쥐며 대답했다.
괴수의 덩치에 압도되어 고작 100미터 높이로 오르는 것조차 못했다.
“이대로는 자존심 상해서 잠도 안 올 거 같거든.”
말을 마친 처용은 곧장 마나를 진법에 불어넣으며 작동시켰다.
-쏴아아!
시야가 바뀌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다시 펼쳐졌다.
불과 몇 분 전에 괴수가 날뛰며 난장판이 되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후.”
짧게 숨을 들이쉬며 준비를 마친 처용이 제단 위로 올라섰다.
-쿠구구!
또다시 폭포를 뚫고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하고는 다를 거다.”
괴수를 보며 씨익 웃음을 보인 처용이 위로 뛰어올랐다.
***
“아으으. 난 못해.”
루나는 진법 위에서 사라진 처용을 보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두 번 다시는 그 괴수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괴수에게서 이곳의 신들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졌으니까.
아니, 더욱더 원시적이고 근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무섭다기보다는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하, 그녀가 무서웠나구나.]
“그래도 루나는 잘했어요. 용님하고 비슷하게 떨어지셨잖아요.”
기운 내라는 듯 아타가 루나를 위로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루나가 아타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보여주마.]
여래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시스템 창이 점점 넓어지며 소음과 함께 어떤 장면을 드러냈다.
-콰쾅! 쾅! 쾅!
괴수의 공격을 피하며 위로 향하고 있는 처용의 모습이 나타났다.
[확실히 아까와는 다르구나.]
처용은 괴수의 덩치에 당황한 처음과는 다르게 침착한 모습이었다.
물줄기 칼날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웃음을 지으며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그 모습에 루나의 입에서 의문을 담은 말이 나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더구나.]
루나의 의문에 여래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 말에 여래를 잠시 바라본 루나가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으니까.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고 마음이 꺾여버린 자신이…….
그 무력함에 빠진 자신이 부끄럽고 비참했다.
‘뭐가 왕족이냐…….’
더는 밤의 성채를 탈출할 때처럼 무력해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아버지…… 뱀파이어 군주처럼 일족을 이끌어야 했다.
이렇게 마음까지 무력해서는 동족을 이끌기는커녕 동족을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루나는 고개를 들어 처용의 모습이 보이는 화면을 바라봤다.
처용은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존재라 해도 그것을 넘어서려 맞서고 있었다.
‘나아가야 한다.’
처용이 성장을 도와주기로 약속했지만 받기만 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었다.
미래를 위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진 루나가 수련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대련 상대를 지목해 주십시오.]
손을 들어 금강역사 중 하나를 가리켰다.
“너 나와.”
지목당한 금강역사가 루나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괘, 괜찮을까요. 주인님?”
루나를 보며 걱정이 든 아타가 말했다.
[하하하,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으냐.]
여래가 미소를 지으며 루나와 루나 앞에 선 금강역사를 바라보았다.
“각오해.”
루나가 투지를 태움과 동시에 긴장했다.
그녀 앞에 대련자로 선 금강역사는 소룡이었으니까.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