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던전은 최대한 빨리 알아봐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
태룡전에서 나온 처용은 곧장 태민을 찾아갔었다.
아쉽게도 당장은 빈 던전이나 문제가 발생한 곳이 없었다.
태민이 빠르게 알아봐 준다고 미안한 듯 말했었다.
처용은 태민을 독촉하지는 않았다.
그를 들볶는다고 해서 없던 던전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굳이 던전이 아니어도 할 일은 많았다.
“그래도 자금이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는 게 다행이네.”
협회를 찾아간 이유는 빈 던전을 알아보려 한 것도 있었지만.
몬스터 사체 자금을 정산받고 혁수에게 새로운 무구 원형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정산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먼저 계산된 것들은 입금이 되었다.
현재 처용의 자산은 130억이 훌쩍 넘는 상태였다.
“태룡사 일정은 끝났으니 자택에 계시려나?”
지금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어머니에게 부탁할 것과 해야 할 말들이 있었으니까.
처용이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행히 어머니가 쉬고 있었다.
그리고.
“응? 넌 왜 여기 있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냐?”
처용을 쏘아보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고등학생.
여동생인 연아였다.
“야 싸가지, 각성했다며?”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악!”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은 연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래, 오늘은 일이 없는 거니?”
“……?”
뭔가 달라진 처용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연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 누구야? 내가 아는 한처용이 이럴 리가 없는데?”
“연아야?”
“으아아악!”
어머니에게 옆구리를 붙잡힌 연아가 비명을 질렀다.
“연아는 기숙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처용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아는 서울권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기숙사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집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오늘 주말이야, 멍청아.”
“아~.”
연아가 가끔 주말에 집으로 쉬러 올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때인 듯싶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요일 개념이 없어지네.”
주말이든 평일이든 던전 일이 있으면 사냥을 하고 아닌 날은 수련을 했으니까.
“오늘은 쉬는 거니?”
“아뇨. 어머니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뭐길래?”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궁금한 듯 물었다.
“태룡사, 그러니까 어머니 명의로 되어있는 땅이 입구 근처까지죠?”
“……입구보다 조금 뒤란다.”
원래 태룡사가 있는 산 전체가 어머니, 정확히는 가업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비극이 닥치고 친척들이 이 땅을 탐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태룡사를 지킬 순 있었다.
이 땅이 친척들에게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았지만.
지저분한 재산 싸움으로 자금 형편이 안 좋아졌다.
“다행히 네 아버지 지인분들이 도와주셔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버지의 지인들이 태룡사의 땅 일부를 사들였고 그로 인해 형편이 조금 나아진 상황이었다.
지인들은 태룡사 부지가 본인들의 땅이 되었음에도 기존에 있던 것들을 철거하거나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고마운 분들이죠.”
처용은 도와준 지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 그가 마인들에게서 구해낸 사람들 중 일부였다.
그들은 은혜를 명분으로 어머니를 도와준 것이었다.
“그 땅 되찾죠.”
어머니에게 협조적인 분들이니 되찾는 데에는 수월할 것이다.
“나도 그러고는 싶구나. 하지만.”
어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할 때, 처용이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얼떨결에 통장을 받은 어머니가 그것을 열어 확인하자.
“……?!”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며 흔들렸다.
“일, 십, 백……?!”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지 숫자의 첫째 자리부터 다시 세보기까지 했다.
통장에 찍혀 있는 금액은 100억이었다.
“일단 그걸로 되찾을 수 있는 땅부터 되찾죠.”
“이걸 어디서?”
어머니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처용을 바라보았다.
헌터가 버는 돈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첫째 딸인 연화가 용돈이라고 가끔 보내주는 돈들이 제법 많았으니까.
하지만, 처용이 건넨 통장에 적힌 돈은 제법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얼마가 들어 있길래?”
연아가 어머니 근처로 오며 통장을 확인하려 하자.
-탁!
어머니는 연아가 보지 못하게 통장을 덮어 버렸다.
고등학생이 함부로 봐서는 안 될 숫자라 판단했으니까.
“어떻게 된 거니?”
어머니가 진지한 눈빛으로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간첩 잡았어요. 좀 비싼 괴물들도 때려잡았고.”
“간첩?”
처용은 어깨를 으쓱이고 옅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을 팔아먹으려는 간첩을 잡은 것은 맞았으니까.
“그리고 땅을 되찾는 건 저분들의 의지도 있어요. 어머니.”
신상이 세워져 있는 대웅전의 방향을 눈짓한 처용이 말했다.
어머니를 납득시키는데 ‘신의 명령’이라는 말 만큼 좋은 핑계가 없었다.
“그렇구나.”
어머니는 처용의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은 집안에서 모시는 신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알았다. 고맙구나.”
처용의 대답에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만간 더 드릴 겁니다. 그거로는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요.”
처용이 땅을 되찾으려는 건 그저 땅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한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 태룡산의 성지화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에 해 둬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
대견한 듯 처용을 바라보는 어머니 옆에서 연아가 째려보고 있었다.
“돈 많이 버나 보네?”
어머니에게 얼마나 줬는지는 못 봤지만, 반응을 볼 때 상당한 돈인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용돈 좀 주지 않을래?”
“…….”
연아가 처용에게 윙크를 날리며 당당하게 손을 내밀고 돈을 요구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 처용은.
“개미가 애교를 부려도 너보단 귀엽겠다.”
처용의 말은 진심이었다.
태룡전의 일개미들은 아타가 지휘를 잘하는 탓인지 청소든 정리정돈이든 뭐든 잘했다.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처용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다.
또 그들은 처용과 마주칠 때마다 앞다리를 머리로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마치 ‘근무 중 이상 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 얼마나 귀여운 이들인가.
“야!”
개미만도 못한 취급(?)을 당한 연아는 열불을 토해냈다.
열 받은 연아가 처용의 다리를 차려 했다.
“후회할 텐데.”
처용의 진심 어린 경고를 무시하고 행동한 결과.
-딱!
돌덩이를 발로 찬 듯 둔탁한 음성이 울렸다.
“악!”
새된 비명을 지른 연아가 발을 잡고 굴러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던 처용이 연아에게 말했다.
“계좌 불러 봐.”
“이씨!”
정말 아팠는지 눈물을 찔끔 보인 연아가 낑낑거리며 일어났다.
“그래! 얼마나 주나 한번 보자!”
연아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처용을 노려봤지만.
처용에게는 그저 가소로워 보일 뿐이었다.
정말 용돈을 보내줄 생각인지 처용이 핸드폰을 조작했다.
“내 친구는 30만원 받았다던데~.”
연아가 처용을 힐끔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친구는 아니지만 같은 반 동기가 각성자인 가족에게 받은 용돈이라며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그래?”
그 말에 무심하게 대답한 처용이 입금을 끝냈다.
-띠링!
“기껏 보내 봐야 만 얼마…….”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확인한 연아의 말소리가 끊겼다.
[한처용 / 10,000,000 / 입금]
“일, 십, 백…….”
자신의 눈을 의심한 연아는 좀전의 어머니처럼 첫째 자리부터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어, 어어…….”
연아의 눈동자가 금액의 시작점과 끝점을 왔다 갔다 하며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팔짱을 낀 처용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보며 웃었다.
“이게 너와 나의-.”
“닥쳐!”
처용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밀리기 싫었던 연아가 버럭 했지만.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는?”
“…….”
“입금 취소할까?”
“이, 이…….”
천만 원이라는 자본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가, 감사합니다.”
연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처용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천만 원이다. 천만 원!’
이 돈으로 무엇을 할지 연아가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띠링.
[박연수 / 10,000,000 / 출금]
“어?”
연아의 통장에 입금되었던 돈이 사라졌다.
뒤에서 어머니가 핸드폰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어, 엄마!”
연아는 현재 미성년자, 그녀는 어머니의 통장으로 용돈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그 통장의 권한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미성년자한테 이렇게 큰돈을 함부로 보내면 어떻게 하니?”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처용을 타이르듯 말했다.
처용은 그저 남은 자산의 1/30을 보낸 것이지만.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다시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아…… 내 돈.”
연아는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처용은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웃어? 웃겨? 지금 장난해?”
연아가 처용을 보며 분개했다.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려 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기에 그만두었다.
처용은 잠시 생각한 후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그 돈 성과금으로 거는 건 어때요?”
“성과금?”
“네.”
처용은 어머니를 보며 대답한 후 연아를 바라보았다.
“너 반에서 몇 등이야?”
“……10.”
연아의 대답에 처용의 한쪽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자신이 알기로는 연아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뒤에서.”
처용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연아가 말을 덧붙였다.
“자랑이다 이놈아.”
“니가 물어 봤잖아!”
처용과 어머니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반에서 2등,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연아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할 수 있어!”
상황을 눈치챈 연아가 자신감 넘치게 소리쳤다.
“반드시 할 테니까! 꼭 약속 지켜!”
“어머니가 안 주면 내가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라도 주마.”
“좋아!”
이미 천만 원이라는 상금(?)을 직접 확인한 연아였다.
의욕은 넘치다 못해 불타오를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금을 전달한 처용이 집을 나왔다.
‘깔끔하게 땅을 모두 찾고 천천히 성지화를 준비하면 되겠지.’
처용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야, 한처용!”
연아가 집 문을 나오며 처용을 불러세웠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처용이 걸음을 멈추었다.
“10만 원만 빌려줘.”
기껏 자신을 불러 세워놓고 하는 말이 당당하게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 처용은 궁금한 듯 물었다.
“엄마 생일 선물 사려고 그래, 돈이 부족하단 말이야.”
“어머니 생신이라고?”
“그래, 빌린 돈을 꼭 갚을 테니까…….”
하던 말을 잠시 멈춘 연아가 처용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정말 정신 차렸으면 엄마 생일 정도는 챙기지?”
“……며칠 남았지?”
“엄마 생일도 잊어먹냐 멍청한 놈아?”
수십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처용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용은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도저히 날짜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진 처용이 연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처용의 진지한 분위기에 쏘아붙이려던 연아가 멈칫했다.
믿기지는 않지만, 처용이 각성한 후 변한 것은 명백해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한 달 정도 남았어.”
연아가 정확한 날짜를 말해주자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어지듯 기억이 선명해졌다.
처용은 두 번 다시 잊지 않겠다는 듯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고맙다.”
처용은 아공간을 열어 5만원 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 들었다.
혹시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미리 뽑아둔 지폐였다.
돈을 연아의 손에 쥐어 준 처용은 뒤돌아 나아갔다.
“야! 이거 10만 원 아니-.”
“그냥 가져. 진짜 고마워서 주는 거니까.”
연아의 말에 손을 흔들며 대답한 처용이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 생신 겸 연화의 일도 처리하는 게 좋겠네.’
처용에겐 여동생과 어머니 말고 가족이 한 명 더 있었다.
교단에서 현직 헌터로 일하고 있는 그의 누나, 한연화였다.
‘마침 잘 되었어.’
안 그래도 처용은 연화를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회귀 전, 연화는 처용이 각성하고 1년도 안 돼서 부고를 전했었다.
던전 공략 실패로 인한 사망이었기에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것이다.’
처용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각오를 다졌다.
가족이 죽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