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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44화 (44/726)

#044화

처용은 성좌들에게 편법에 대해 설명함과 동시에.

“명환부.”

명환부 여덟 장을 생성해 주변에 뿌렸다.

“팔괘봉마진(八卦封魔陣).”

뿌려진 명환부들은 류마를 중심으로 각 여덟 방향으로 퍼지며 팔각형을 그렸다.

“거기 꼬마 아가씨.”

처용이 옆에 선 칠흑빛 머리의 뱀파이어 루나를 보며 말했다.

“……꼬마 아니야.”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지만,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미안하다. 루나라고 했나?”

빠르게 사과를 전한 처용이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 녀석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루나의 눈빛을 마주한 처용은 그녀에게 웃음을 보이며 설명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해 주고 있었으니까.

설명이 끝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처용이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후,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류마의 심장 부근에 얹고 왼손을 가슴께로 모아 한 손으로 기도하듯 손바닥을 펼쳤다.

처용의 전신에서 황금빛 신력이 피어올랐다.

감았던 눈을 뜨자 처용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리고 그 눈이 바닥에 누워있는 류마를 향했다.

[보이느냐?]

“네, 아주 잘 보입니다. 미륵님.”

미륵의 전음에 처용이 대답했다.

지금 처용의 눈에는 통찰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류마의 체내에서 잠식해 있는 저주 같은 것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감염되어 있는지, 어떤 식으로 육체를 잠식해 나아가는지도 뚜렷하게 보였다.

[북쪽과 북서쪽의 결계에 힘을 더하거라. 제자야.]

여래의 말과 동시에 결계의 빈틈을 느낀 처용이 눈짓했다.

그러자 여덟 방향으로 퍼진 명환부 중 여래가 말한 방향의 명환부의 빛이 강해졌다.

[하하,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이야.]

미륵은 지금 상황이 무척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저희니까 가능한 것이지만요.”

보통 성좌들은 처용의 시야와 감각을 일부 공유하고 상황에 따라 조언을 건네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성좌들이 처용의 감각을 빌려 공유하는 것이 아닌 처용이 성좌들의 감각을 빌려 공유하는 중이었다.

다만.

“10분 안에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용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일부라고 해도 무려 대신의 감각을 빌려오는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세 명이니 몸에 심각한 부담이 된다.

아무리 처용이라도 이것을 오래 유지하기에는 힘들었다.

[다행히 계승자가 힘을 써둔 덕분에 저주의 기세가 조금 약해졌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보살님.”

[걱정하지 마세요. 계승자.]

류마의 심장 쪽에 얹어진 처용의 손에서 황금빛이 피어나왔다.

자비의 손길이었지만, 이전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무려 보살이 처용의 신력을 직접 운용하여 사용하는 자비의 손길이었으니까.

미륵의 눈으로 보이는.

저주가 심각하게 퍼진 부위를 자비의 손길이 몰아내는 중이었다.

동시에 여덟 방향으로 퍼진 명환부들이 저주를 약화시키고 억누르고 있었다.

류마의 얼굴과 피부에 퍼진 검은 반점들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의 육체를 잠식해나가던 저주가 밀려나고 심장 부근으로 모였다.

그 순간.

-캬아아아!

류마의 몸속에서 마치 악령과도 같은 어두운 형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반갑다, 이 새끼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처용이 왼손을 뻗어 악령의 목을 잡아챘다.

-꺄아아아!

“나와.”

낮게 읊조린 처용이 악령을 뽑아내자 녀석이 류마의 몸에서 질질 끌려 나왔다.

미륵의 눈을 공유하자 뚜렷하게 보였던 녀석.

처용은 이놈을 노리고 있었다.

이 악령이 바로 검은 침식의 저주라는 저주의 근원이자.

“바알이 만든 게 확실했네.”

바알이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저주였다.

처용이 악령을 거의 다 끄집어낸 순간.

“루나!”

-스르릉!

처용의 부름에 루나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도신에 명환부가 붙여져 있는 화염의 절이었다.

-사각!

화염의 절이 붉은 선을 그려내며 지나갔다.

악령과 류마가 이어져 있던 중간 부분이 잘리며 분리되었다.

-끼야아악!

마치 고통을 받는 듯 괴성을 지르며 악령이 울부짖었다.

“시끄러!”

처용의 왼손이 악령을 더 강하게 틀어쥠과 동시에 오른손을 뻗었다.

“팔괘봉마진.”

주위에 깔린 명환부들이 악령 쪽으로 모여들며 강한 빛을 내뿜었다.

처용이 준비한 이 진법은 저주를 억누르는 목적도 있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이 근원을 잡아내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영멸(永滅)!”

-캬아아!

류마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악령은 점점 빛으로 산화되며 부서졌다.

동시에 처용에게서 뿜어지던 황금빛이 옅어지며 사라졌다.

“후우!”

처용이 심호흡을 하듯 숨을 깊게 내쉬었다.

빠르게 펌프질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숨을 가다듬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계승자.]

“후-,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보살님.”

식은땀을 닦고 호흡을 가다듬은 처용이 안심한 듯 대답했다.

-파사삭 –툭! 구르르.

먼지로 흩어지던 악령의 파편 중 일부가 서로 뭉쳐 들었다.

뭉쳐진 것들은 검은 구슬 형태로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 했는데도 찌꺼기가 남는다고?”

처용이 바닥에 떨어진 검은 구슬 하나를 들어보았다.

[검은 침식의 저주 파편 / ??]

[등급 : 유니크]

[강한 악념(惡念)을 응축하여 만들어낸 끔찍한 저주의 파편.]

[저주에 오래 노출되면 서서히 정신이 마모되며 괴물로 영락한다.]

[완전히 변이된 이들은 영원히 악에 복종하는 노예가 된다.]

근원이 사라지고 남긴 찌꺼기에 불과했는데도 강한 저주의 기운이 풍겨 나왔다.

처용은 일단 떨어진 파편들을 주워들었다.

끔찍한 저주가 담긴 불길한 것들이지만 그만큼 활용할 부분은 있었다.

“류마는…… 무사한 거야?”

옆으로 다가온 루나가 처용에게 물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 너도 잘 해줬다.”

처용이 루나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칭찬하듯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최근 아타와 지내다 보니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루나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 버렸다.

“뱀파이어 왕족이면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을 텐데.”

“…….”

어쩌면 처용의 회귀 전 세월까지 포함해도 루나가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었다.

특히 엘프들이 그러하듯 이종족은 겉모습으로 살아온 세월을 판단할 수 없었다.

처용의 말에 루나의 표정은 조금 더 일그러져 있었지만…….

“류마를 살려줘서 고마워.”

루나는 정중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귀한 피, 블라디미르의 이름을 걸고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진심이라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하, 살면서 뱀파이어한테 감사를 받을 줄이야.”

그것도 왕족에게 말이다.

회귀 전에는 자신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협력이라…… 신기하네?’

처용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실렸다.

“……으윽!”

“정신이 드나?”

류마가 깨어났는지 작게 내뱉은 소리를 듣고 처용이 말했다.

“어……떻게?”

“네 책임을 나한테 던지고 편하게 가려는 걸 내가 못 봐서 말이야.”

처용이 루나를 한번 눈짓하고 류마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널 데리러 온 사신(死神)을 내가 내쫓아 버렸어.”

잠시 처용을 응시한 류마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저주의 영향인지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흉측하고 끔찍한 저주의 기운은 더 느껴지지 않았다.

“은인이시여.”

류마가 처용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도록 하지.”

일단은 협회에 상황을 알리는 것이 먼저였다.

그 이후 이들을 통해 뱀파이어들의 상황을 더 자세히 파악해야 했다.

“우선, 전에 말한 피의 서약. 네 마음이 변심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류마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처용을 보며 말했다.

“그 끔찍한 저주에서 저와 루나님을 구해준 은혜를 갚겠습니다.”

“좋아, 그럼 조건은-.”

“잠깐!”

루나가 처용의 말을 끊고 류마의 앞으로 나서 처용과 마주했다.

“류마는 피의 서약을 하지 않을 거야.”

“루나 님!”

“그게 무슨 소리지?”

처용이 루나를 마주 보며 말했다.

도움을 받아 놓고 내뺄 속셈인가 싶었지만.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루나의 눈빛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날 도와주는 조건으로 류마가 피의 서약을 하기로 한 거겠지?”

“맞아.”

“피의 서약은 내가 하지.”

루나의 말에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굳이 왜?”

“이건 왕족인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니까.”

루나는 자신의 목숨 때문에 류마가 피의 서약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류마는 내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는 게 맞아.”

피의 서약은 서로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맺는 것.

이 인간은 자신에게 좋은 조건으로만 서약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류마는 왕족인 자신을 위해서 어떤 불리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류마를 말리고 나선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가(家)는 혈족의 정점.

피의 서약이라 해도 왕족은 여기에 저항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네 뜻이라면.”

처용은 상관없다는 듯 루나에게 말했다.

“내 조건은 간단해.”

서로가 적대하지 않을 것.

먼저 공격받지 않는 이상 다른 인간을 공격하지 않을 것.

마르크와 마인들을 죽이는 것에 협력해줄 것.

“……그게 다야?”

루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맥빠진 듯 말했다.

“그럼 노예계약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뱀파이어들을 미래의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상호 협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왕족과 귀족에게 피의 서약으로 노예계약을 한다?

이건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 역시 목적이 있기에 너희를 도와주는 거야.”

“…….”

“대답은?”

루나가 처용에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 블라디미르 로 루나리스가 고귀한 피의 약속을 맹세하니…….”

피의 서약을 외는 루나의 몸 주변에 붉은 핏빛 마나가 일렁였다.

서약의 내용을 모두 말한 루나가 처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의 서약자 네 이름은?”

“한처용.”

루나의 말에 대답하며 처용이 왼손을 내밀자.

“서약은 서로의 피가 증거로서 지켜질 것이다.”

루나가 처용의 손바닥에 피를 한 방울 떨구었다.

-스스.

처용의 손바닥에 떨어진 피가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문양을 그리더니 점점 사라졌다.

“영광으로 알아도 좋아. 너는 블라디미르 가와 피의 서약을 맺은 최초의 인간이니까.”

[블라디미르 로 루나와 피의 서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신수의 격이 성장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로도 피의 서약이 체결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한다.”

“우리야말로.”

처용의 말에 루나가 웃으며 답했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좀 이따가 하도록 하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일단 여길 나가야 하는데…….”

처용이 눈앞의 뱀파이어들을 바라봤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인간이 아닌 이들.

이들과 함께 던전을 나가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한 처용은 태룡전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들을 태룡전으로 들여도 괜찮을까요?’

[저희는 괜찮아요. 계승자. 하지만, 저들이 괜찮을지는 모르겠군요.]

‘알겠습니다.’

전음을 마친 처용이 열쇠를 휘둘러 게이트를 형성했다.

“안에 계신 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여기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을 거다.”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류마가 처용에게 감사를 전했고 게이트에 다가갔다.

루나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불안한 눈빛을 내보였지만.

“곧 찾아가지.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처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류마와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할 일이 점점 많아지네.”

짧게 한숨을 내쉰 처용이 던전을 빠져나갔다.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자 협회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처용 씨! 무사하셨군요!”

그 사이에 있던 현아와 백호가 처용을 향해 다가왔다.

처용은 다소 지친 느낌이었지만, 겉으로 볼 때 다치진 않아 보였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만. 너무 늦으면 내가 직접 들어가려 했다네.”

“구울들은 다 죽였지만, 그 묘실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겠나?”

지친 듯 일그러져 있는 처용의 표정을 본 백호가 물었다.

“우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용의 말에 백호가 현장을 폐쇄하고 감시할 인원들을 배정하며 지휘했다.

현장이 신속하게 마무리되고 협회로 빠르게 돌아왔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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