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마르크 공작에 대해서…… 말이오?”
류마는 처용에게 의문을 섞어 말했다.
인간이 뱀파이어 공작인 마르크에 대해 어떻게 아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에 대해서 분노가 서린 듯 말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래, 그놈에 대해서 말해 봐.”
류마가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는 듯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크…… 그자가 군주님을…… 우리 일족을 배신했소!”
“배신?”
“그렇소…….”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
류마는 왜 이 인간이 그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대답해주었다.
뱀파이어들이 살던 세계에도 지구처럼 차원의 틈이 벌어지는 사건이 생겼다.
강력한 종족인 뱀파이어들에게 몬스터 침공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차원 너머에서 수상한 인간들이 밤의 성채에 찾아왔다.
그들은 악의 성좌의 성물을 내밀며 무언가 거래를 제안했다.
하지만, 뱀파이어 군주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그 일이 있던 이후 갑자기 반란이 일어났소.”
일족의 2인자인 뱀파이어 공작 마르크.
그의 세력들과 얼마 전 찾아왔었던 인간들이 힘을 합쳐 밤의 성채를 공격했다.
격노한 뱀파이어 군주가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마르크를 돕는 인간들이 예상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인간이 그렇게 강한 흑마법을 사용할 줄은…….”
뱀파이어 군주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밤의 성채는 둘로 갈라져 내전이 시작되었다.
“마기를 쓰는 인간들인가?”
“그놈들을…… 아시오?”
“아주 잘 알지.”
처용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가 그놈들한테 따져야 할 안부가 많거든.”
뱀파이어 일족은 처음부터 악신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 아니었다.
악신들의 명령을 받은 마인들이 종족 장악을 위해 꾸민 음모에 휘말렸을 뿐.
그리고 이런 방식의 작전은 뱀파이어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크들의 분열, 세계수의 오염.’
이종족들을 분열시키고 그들 일부를 악신들에게 충성하는 병사로 재탄생시키는 것.
그건 마인들이 중요하게 맡은 임무 중 하나였다.
“아는 것을 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처용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마르크하고 그놈을 돕는 버러지들을 내가 직접 죽여 주지.”
류마는 그런 처용을 마주 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해주겠소. 아니, 뭐든 하겠소!”
그가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팔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렸다.
“뭐든! 뭐든지 하겠소.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겠소?”
그리고 간절한 표정으로 처용에게 말했다.
그가 처용 앞에 부복한 자세는 뱀파이어들이 자신을 최대한 낮출 때 하는 행동이었다.
군주 앞에서나 보일 법한 자세.
그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그는 보통 뱀파이어도 아닌 백작급 귀족.
“왜 그렇게까지 하지?”
처용은 궁금했다.
자존심이 강한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이것은 순혈자들이 후천적 신격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았다.
자존심을 굽히는 걸 넘어서 완전히 꺾어 내려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군주님과 같은 격이 느껴지는데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잖소.”
“흠?”
류마의 말에 처용이 의문을 가졌을 때.
[신수의 격이 발동합니다.]
[대상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위압감’이 발동 중입니다.]
시스템이 울려왔다.
거북이와 아타 때와는 다르게 류마를 수하로 들이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위압감이라?’
권능 신수의 격이 지닌 ‘격이 낮은 대상에게 주는 위압감’인 것 같았다.
류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대의 신성력은 나를 해치지 않았소.”
류마의 말을 잠깐 생각한 처용은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걸 말하는 건가?”
-화아악!
처용이 자비의 손길을 발동하자 황금빛이 피어나왔다.
“그렇소. 지금 보니 고위 사제들보다 더 강한 힘이 느껴지는군.”
자비의 손길을 마주한 류마의 시선에 놀라움이 일렁였다.
“나를 불태워 버렸어야 하는 그 축복의 힘이 나를 치료해주었소.”
성기사와 사제들이 사용하는 축복의 힘인 신성력.
신성력은 신이 자신의 신력을 가공하여 병사들에게 내려준 마나와는 다른 힘이었다.
특히, 교단 소속 헌터들의 성좌인 빛의 신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대의 신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사를 전하오.”
“흠.”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자신의 신력은 항마와 파마의 힘을 띠고 있었다.
악신들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은 힘.
당연히 어둠 속성에도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자신이 치료한 뱀파이어는 어둠 속성을 타고난 어둠의 일족이다.
처용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자비의 뜻을 잘 생각해 보세요. 계승자.]
처용의 고민을 이해한 듯 보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보살의 말에 처용이 바로 이해했다는 듯 답했다.
자비의 손길은 ‘베풀어 주는 자’ 보살의 권능이었다.
어둠의 속한 존재라고 해도 처용이 류마의 회복을 원했기에 그가 치료된 것이었다.
“부탁이오.”
류마의 부탁에 잠시 고민한 처용은 무언가 생각난 듯 류마에게 말했다.
“피의 서약을 할 수 있나?”
처용이 말한 피의 서약은 뱀파이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조 같은 것이었다.
어기면 죽는, 맹세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이었다.
“블러디아 소 류마는 피의 서약을 하겠소!”
류마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부탁이라는 것을 들어보고 결정하지.”
“저주에 안전하게 격리되어있는 분이 있소.”
“설마, 군주는 아니겠지?”
“아니오. 군주님의 명령으로 보호하던 분이오.”
류마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뱀파이어 군주는 내전을 막는 동시에 자신의 가족 즉, 왕족들의 대피를 명령했다.
그러나 탈출 과정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류마가 이끌던 그룹이 강력한 저주에 감염되었다.
류마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은신처를 만들고 그 왕족을 지키기 위해 봉인시켰다.
그 후 모두 관에 들어가 자체적으로 저주를 억누르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분을 지켜야 하오. 만약 군주님이 쓰러진다면…….”
류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분만이라도 지켜주시오.”
“무슨 상황인지 대략 이해는 했다.”
처용은 이 상황을 대충 정리해보았다.
현재 뱀파이어 종족은 마르크의 반란으로 분열된 상황이다.
뱀파이어 군주가 강하긴 하지만 마인들의 지원을 받는 마르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군주가 쓰러지면 회귀 전처럼 뱀파이어들은 강제적으로 악신들 진영에 합류된다.
그러나 살아남은 왕족이 있다면 마르크가 일족을 장악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군주가 이기는 건데, 아마도 지겠지.’
회귀 전, 마르크는 뱀파이어 군주가 되었었으니까.
처용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을 때.
[상황이 참 흥미롭구나. 제자야.]
‘스승님.’
마침, 상황을 지켜보던 여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을 돕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요?’
처용은 성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계승자는 어떻게 하고 싶나요?]
처용의 질문에 보살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들을 돕고 뱀파이어들의 내전에 간섭하고 싶습니다.’
마르크의 야망을 꺾고 마인들의 계획을 좌초시킨다면.
더는 뱀파이어를 적으로 두지 않아도 된다.
다만.
‘제가 어둠의 일족을 도와도 괜찮을까요?’
어둠에 근원을 둔 종족을 도와도 괜찮은 것인가 그것이 좀 걸렸다.
[단순히 이들의 태생이 어둠이라 하여 배척할 이유가 되나요?]
‘……그렇군요.’
[계승자의 스승이라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이야기할 것 같군요.]
[하하, 잘 아시는군요.]
보살의 말에 여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너희를 돕겠다.”
결론을 내린 처용이 말하자 류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고맙소.”
처용에게 감사를 전한 류마가 공동 중앙에 있는 조각상에 다가갔다.
“루나 님, 일어나십시오.”
조각상에 손을 얹고 류마가 대답하자 조각상이 분해되고 화려한 관이 나타났다.
‘봉인인가?’
봉인을 한 건 아마 저 관에 있는 뱀파이어를 저주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끼이이.
관이 천천히 열리며 안에 있던 뱀파이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칠흑과도 같은 검은 머리.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류마와는 다르게 엘프들처럼 긴 귀.
그리고 등 뒤에 마치 박쥐를 연상케 하는 날개.
거기에 검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인형처럼 누워있었다.
관이 완전히 열리자 감겨 있던 눈이 뜨이고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류마?”
“좋은 밤입니다. 마이 프린세스.”
깨어난 뱀파이어 루나의 대답에 류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일족들은? 왜 혼자야? 저 인간은…… 누구고.”
“다들 이미 늦었습니다. 저도 이 인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영락했을 겁니다.”
류마가 깨어난 소녀 뱀파이어 프린세스에게 작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처용이 깨어난 소녀, 루나를 바라봤다.
[블라디미르 로 루나리스]
[등급 : A급 왕족]
[특징 : 뱀파이어 일족 중 가장 고귀한 가문의 일원.]
[아직 완전한 성장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현재 검은 침식의 저주가 진행 중입니다.]
[해제하지 않으면 영구적으로 변이됩니다.]
-진행률 2%
[스킬 : 안개의 환영, 블러드 웨펀, 그림자 습격…….]
통찰의 눈으로 소녀를 확인한 처용이 류마를 향해 말했다.
“이봐, 이 아가씨도 저주를 받았는데?”
처용의 말에 루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 루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류마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지며 절망이 나타났다.
“아, 안 돼!”
“이제 막 시작된 거니 해제는 어렵지 않아.”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분만큼은!”
처용 역시 눈앞의 중요한 뱀파이어를 죽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자비의 손길이 루나를 향해 뻗어 나가자 막 시작되려던 저주는 금방 사라졌다.
“저주가……?”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크게 안도한 류마가 루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루나 님! 꼭 살아남으셔서 밤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류마가 루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류마? 왜 그래?”
마치 마지막을 고하는 듯한 분위기에 불길함을 느낀 루나가 말했다.
“소신은…… 이미 늦었습- 쿨럭!”
류마가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옆에 있던 처용이 다시 자비의 손길을 사용했지만.
[대상의 저주 침식률이 높습니다.]
[검은 침식의 저주가 저항합니다.]
[65%]
[67%]
.
.
60% 낮춰놓은 저주가 다시 점점 오르고 있었다.
“저주에 오래 노출되어서 그런가?”
자신의 신력으로도 밀어내는 것이 힘겨운 저주.
이쯤 되니 누가 만들어낸 저주인지 짐작이 갔다.
“망할 바알 새끼…….”
유독 끔찍한 저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기인 악신.
이것은 그가 만들어낸 저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류마!”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은 류마를 본 루나가 처용을 바라봤다.
“류마를 살려줘.”
루나가 간절함을 담아 처용에게 말했다.
“부탁이야.”
자신을 따라 피신하던 일족 모두가 죽고 류마 하나만이 남았다.
그마저도 죽으면 정말 혼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흠.”
처용은 계속 자비의 손길을 사용하는 중이었지만.
저주 진행률이 오르는 시간을 늦출 뿐 해주 할 수 없었다.
“고맙소. 우리를 위해 애써주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류마가 마치 처용에게 작별을 고하듯 말하자 처용이 대답했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래?”
처용은 류마를 포기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왕족이 더 중요하다고 해도 류마는 자신에게 협조적인 뱀파이어다.
이자를 살려놔야 향후 뱀파이어의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난…… 가망이 없소.”
“나는 말이야? 가망이 없다고 해도 발버둥 치는 놈이라서.”
비록, 자비의 손길로 해주에 실패했지만, 처용에게 자비의 손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와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합니다.’
처용이 성좌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리는 지상에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텐데?]
처용의 말에 미륵이 대답했다.
인과율, 시스템의 제약.
성좌들이 태초신의 제약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었다.
그의 말대로 성좌들은 특정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면 직접 개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꼼수가 있습니다.’
처용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꼼수라고?]
미륵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처용이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계승자인 처용이기에 할 수 있는 ‘편법’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