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성좌들이 환하게 빛을 내뿜는 고리에 손을 얹고 얼마 지나지 않자.
-우우웅-쩌적!
고리가 점점 빛을 잃어가더니, 균열이 생기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세 명의 성좌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계가…… 그렇게 되었었구나.”
여래가 눈을 감고 방금 확인한 처용의 기억을 되새겼다.
모든 세계의 종말.
그것을 직접 확인해서인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처용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처용은 여래의 표정을 보고 회귀 전 그가 자신에게 했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공간에서 시간이 돌아가기 전.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던 여래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자신은 그의 미안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패배자였다.
“아무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죽어갔던 소중한 사람들의 마지막 얼굴들이 떠올랐다.
“전 수호신의 자격이 없는 놈이고…….”
지금 종말을 확인한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을까.
“계승자의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계승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다른 훌륭하고 더 뛰어난 이가 계승자가 되었었다면.
세계가 그리 비참하게 무너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너만 실패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가 처용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가 아닌 다른 이가 계승자였다면, 종말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의 말에 처용이 고개를 들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래를 마주 보았다.
“우리 역시 실패한 이들이었고 패배자들이구나.”
처용이 바라보는 여래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좌인 나도, 그 누구도 너를 나무랄 자격은 없다.”
그저, 안타까움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네 녀석이 최후를 맞을 때, 아무도 없었다는 건.”
미륵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역시…… 모두 소멸했다는 것이겠지.”
미륵이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못난 탓이 아니다.”
너에게 잘못은 없다는 듯 확고하게 답했다.
그리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처용에게 보살이 다가왔다.
“잘 견뎌 주었습니다.”
보살의 위로를 담은 목소리가 처용의 마음에 울렸다.
“홀로, 너무나도 큰 고통을 참아왔습니다.”
보살이 처용을 향해 손을 뻗으며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잘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계승자여.”
성좌들의 격려와 위로가 처용에게 닿았다.
처용의 마음이 마치 해일이 몰아치듯 요동쳤다.
가슴속에 거무죽죽하게 쌓여 있던,
고이고 썩고 응어리진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처용이 눈을 감았고, 그 응어리들이 흘러나왔다.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보아왔기에 눈물이 말라 없어진 줄 알았었다.
어머니를 마주했을 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터져 내리는 눈물은 막아놓은 수도가 터진 듯 흘러내렸다.
처용의 눈물은 메말라 버린 것이 아니라,
가슴속 깊은 응어리들과 함께 잠겨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응어리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보살님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비열한 배신자 중 하나가 저지른 만행.
“악의 종주를 막아섰던 미륵님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생존자들을 위해 홀로 크타니드에게 맞섰던 미륵.
“태룡전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에서 스승님이…….”
악의 종주, 크타니드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여래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쏟아내는 배신자들…….
처용의 눈동자에 갈기갈기 찢기는 여래가 담겼다.
그런 와중에도 공간을 열어 처용을 대피시키던 여래의 마지막 모습.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정들이 제어되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흉하게 일그러져 있을 테니까…….
“계승자라고 고통받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보살이 처용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상처를 입고 서러운 울음을 내는 아이를 감싸주듯,
내면에 쌓였던 고통을 쏟아내는 처용을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파도처럼 몰아치는 처용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안아주었다.
***
처용은 마음속 응어리들이 쏟아져서인지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앞으로의 일을 이들과 의논하기 위해 감정을 수습했다.
“그래, 네 녀석이 너무 못나 보였느니라.”
미륵의 말에 처용이 옅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투가 저래도 미륵의 진짜 마음이 전해졌으니까.
감정을 수습한 처용은 여래를 향해 중요한 문제를 질문하려 했다.
“스승님, 아니…….”
여래를 부르려던 처용이 아차 하고 정정하려 하자,
“괜찮구나.”
여래가 처용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괜찮단다, 제자야.”
“……감사합니다.”
처용이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 여래에게 물어볼 질문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스승님께서 시간을 되돌리셨습니까? 아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으셨던 겁니까?”
처용이 시간을 건너 과거로 올 수 있었던 이유.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을 여래가 만든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혹은 여래가 ‘직접’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으십니까?”
처용의 질문에 여래가 눈을 감으며 잠시 침묵했고 입을 열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구나. 세계의 시간을 되돌린다니…….”
여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들조차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적(異跡)이구나.”
“나 역시 불가능하다. 네 녀석이 미래에서 왔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 지지가 않거늘…….”
미륵이 여래의 말에 동의했고,
그 어떤 대신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군요.”
그러면, 도대체 누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과거로 보낸 것인가?
“나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만, 지금 당장은 알 수가 없겠구나. 허나.”
여래의 말에 처용이 빠져 있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아니더냐? 너로 인해 우리도 기회가 생긴 것이니.”
“……맞습니다.”
처용이 긍정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종말이 아닌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니까.
“그나저나…… 다른 성좌들이 배신했다라?”
미륵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를 언급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성좌씩이나 된 놈들이 악신들한테 대가리를 숙였단 말이지?”
“더 정확히는 악의 종주, 크타니드입니다. 그리고.”
처용 역시 배신자들을 생각하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배신자들은 모두 ‘순혈자’들이었습니다.”
성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아주 먼 과거 태초신에 의해 사명을 부여받고 탄생한 신격들.
거기에 신격과 신격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신격들.
이들은 ‘선천적’인 신격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필멸자가 수련과 수행을 통해 성장하고.
극히 드물게 신격을 얻어 성좌에 오른 신격들.
이들은 ‘후천적’인 신격이다.
수행과 수련을 통해 반신에 오른 ‘수호신’ 처용은 후천적 신격이었다.
그리고, 순혈자들은.
선천적 신격들 중 스스로를 고결하고 고귀하다 여기는 이들이.
자신들을 드높여 칭하는 말이었다.
문제는 이들 중에 후천적 신격을 하찮은 ‘하계종’ 출신이라 비하하고 경멸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결국은 그것들이…….”
처용의 말을 들은 여래가 한숨을 내쉬었고.
“어째서…… 스스로를 고결하다 여기는 이들이 배신을…….”
보살은 탄식을 내었다.
“그 개새…… 죄송합니다. 보살님.”
처용은 보살 앞에서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삼켜 넘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고결한 게 아닙니다. 자만적이고 이기적인 이들입니다.”
처용이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아댔다.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과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자식들이지요.”
결국, 욕이 튀어나와 버렸다.
처용의 분노와 증오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성역을 울렸다.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될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었지만.
“하하하하! 그 상놈들 부모 신격들까지 싸잡아 욕먹는구나!”
처용이 내뱉은 욕에 미륵이 폭소했다.
“자식 신격을 그따위로 만들었으니 욕을 처먹어도 쌉니다.”
그 순혈자들 때문에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당장 순혈자들을 조지러 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네 녀석은 무리겠지.”
미륵이 처용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간 역행의 대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용이 탄식을 내었다.
전성기에 지녔던 막강한 힘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면.
다른 성역들을 전부 뒤집어 엎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순혈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네 상태는 정확히 어느 정도이냐?”
처용은 여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보며 답했다.
“지금 B급 헌터 정도는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A급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흠, 반신에 도달했던 네가 상급 병사에게 애먹을 정도로 약해진 것인가? 좋지 않구나.”
여래가 말한 병사는 다른 헌터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성좌들의 선택을 받아 힘을 얻고.
게이트의 침략에 맞서는 ‘병사’가 맞았으니까.
물론, 처용은 병사가 아닌 세 명의 성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하나뿐인 계승자였다.
다른 성좌들의 병사들처럼 양산되는 소모품이 아닌.
대신들의 의지와 유지를 이을 후계자 즉, ‘선택받은 자’였다.
“그렇다면, 네 선술도 없어진 것이냐?”
선술.
여래가 창안한 권능으로,
계승자인 처용에게 그가 직접 가르쳐 준 능력이었다.
“완전히 뜯어져 나간 것은 아닙니다만…….”
여래의 말을 들은 처용은 스테이터스로 선술을 살펴보았다.
[선술 / 권능]
[선인의 육체]
[선인의 수행과 훈련으로 단련된 육체, 잔병치레가 없어지며 생명력과 마나가 더 강해집니다.]
[육체가 더 강해질수록 선인에 가까워집니다.]
[선술에 영향을 받아 속성 저항력을 추가로 갖춥니다.]
- 생명력 증가 : 500
- 마나 증가 : 250
- 속성 피해를 20% 감소
- ■■■……
“하, 왠지 그 발바리들 공격이 강하다 했었는데…….”
선인의 육체는 처용이 성좌들에게 수련을 받으며 단련한 육체이자 선술의 중심이었다.
처용이 가진 힘의 기초이자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
수련할수록 육체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마나를 더 많이 담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일부 능력들이 사라졌고 약화되어 있었다.
“남아는 있습니다만, 생각보다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처용에게 있어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술의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몬스터를 사냥하면 다시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련과 단련을 하면 스킬을 생성하거나 강화할 수 있었다.
예시로 여래가 준비한 화염이 들끓는 진법 속에서 며칠을 버텨내 화염 저항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얻은 적도 있었으니까.
“단련을 다시 하면 됩니다. 한 번 걸었던 길이라 어렵지도 않고요.”
가장 중요했었던 성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협력을 구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지구의 멸망을 막는 일과 배신자들을 척살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변수를 막기 위해 성좌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