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게이트를 넘고 눈을 가리던 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광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하고 잔잔한 호수였다.
그리고, 호수 위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연잎.
그 연잎 위에 세워진 웅장하고 거대한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태룡전.
처용의 성좌들이 거주하는 성역.
처용이 계승자로서 수행과 수련을 받았던 장소였고.
지구가 멸망하고 차원들이 무너질 때.
터전을 잃고 재앙을 피하던 사람들의 방주가 되어주던 곳이자,
악의 종주에 맞서던 연합군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악신들과의 전쟁에서 여래의 죽음과 함께,
성좌들의 성역 중 가장 마지막에 무너진 성역이었다.
“역시…… 지금은 좀 초라할 때인가?”
성좌들이 신력을 모아 구축한 이곳은,
이번 대에 계승자로 선택받은 자가 성장함에 따라 같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회귀 전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전각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중앙의 거대한 전각 하나뿐 이였다.
처용은 발걸음을 옮겨 중앙에 있는 전각에 다가갔다.
-끼이이
처용이 거대한 대문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들어오라는 듯 웅장한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용이 휘감겨 있는 듯한 문양의 붉은 기둥이 나열된 길이 이어졌다.
기둥이 나열된 길을 따라 계속 걷자 넓은 대전이 드러났다.
마치, 위엄 가득한 황제가 있을 것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내부.
그리고, 대전 중앙에서 처용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대전에 들어선 처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태룡전의 주인들인 세 명의 성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가장 왼쪽.
팔짱을 끼고 처용을 꿰뚫어 볼 기세로 노려보는 자가 있었다.
금빛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는 검은 용포를 외투처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성좌.
쓸어올린 검은 머리와 오른쪽 눈에 감겨있는 검은 안대.
인상을 쓰고 있는 미간에서부터 쭉 올라간 굵고 진한 눈썹.
그 아래에 번들거리고 있는 검붉은 눈동자가 처용을 담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에서 마치 처용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통찰의 눈이라는 권능의 주인.
관철의 대신 미륵이었다.
보통의 사람은 그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인상이 사나우시네요. 미륵님.’
그와 몇십 년을 같이 지내며 수행을 받아온 처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눈빛이 반가웠고 그리웠다.
언제나 모지고 날카로운 말투를 자랑했지만.
처용에게 은근히 정을 많이 주었던 믿음직한 큰형 같은 존재였다.
마음속으로 미륵에게 인사를 전한 처용은 가장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저 마주했을 뿐인데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린 감정이 밀려왔다.
자연을 형상화한 듯한 녹음빛 긴 머리와 온화한 인상.
머리 위에 연꽃이 피어 있는 화관을 쓰고 있는 여신.
처용의 마음이 무너지려 했을 때, 언제나 그 뒤를 받쳐주었었고.
어머니와 가족들을 잃고 마음에 구멍이 났을 때.
그 빈자리를 채워주던 어머니 같은 존재.
자비의 대신 보살이었다.
그녀의 옥색 눈동자가 처용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이번엔 절대로! 죽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처용이 다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두 대신 사이 중앙에 자리한 마지막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분위기의 미륵과 대비되는 백색의 분위기를 가진 신.
새하얀 장발이 어깨너머까지 길게 내려앉아 있는 미남자.
그는 마치,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로 처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용 역시 신선과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 그를 마주 보았다.
‘스승님…….’
못난 자신을 선택해 준 성좌.
처용에게 계승자로서의 수행을 지시하고 가르침을 주던 신법의 대신.
보살이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면.
여래는 스승을 넘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이였다.
모두 처용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어서 오거라.”
처용이 여래와 마주하자 여래의 맑은 미성이 울려 퍼졌다.
“네게 묻고 싶은 말이 많으니라.”
처용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전해야 할 말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나 그리웠던 이들을 마주했기 때문인지.
그들이 맞이하던 최후의 순간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울컥한 마음과 함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처용이 별 반응이 없자 이번엔 미륵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놈은 누구냐?”
처용을 향해 험한 인상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봐도 육체와 영혼 둘 다 정민 놈의 아들은 맞는데.”
지금의 처용이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처용은 처용,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미륵은 본인의 권능을 통해 처용을 파악해 보려 했었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네놈에게 ‘신력’이 있는 것이냐?”
분명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정보들은 ‘사실’이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처용의 신력에는 자신들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미륵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거야.”
처용이 입을 열었다.
“성좌님들에게 수련을 받았으니까요.”
“누구냐? 어떤 놈이냐?”
처용이 미륵을 바라보며 답했다.
“제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죽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냐?”
미륵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온몸을 강하게 조여오는 압박이 처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처용은 기운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륵님은 직관적인 것을 좋아하셨죠.”
미륵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다른 두 성좌 역시 작은 놀라움을 표했다.
처용이 정확하게 미륵의 이름을 언급했으니까.
그리고, 처용은 미륵을 바라보며 통찰의 눈을 발동했다.
[■■ : ■■……]
[■■ : ■■……]
아무 정보도 출력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대신이었고 이 권능의 주인이니까.
하지만, 처용은 미륵의 정보를 보려고 통찰의 눈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네놈?”
미륵의 눈에 경악 일렁였다.
분명 자신을 향했던 기운은…….
자기 자신의 힘과 같았으니까.
관철의 대신만의 고유한 권능이기에 절대로 남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계승’해 주지 않는 이상은.
미륵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의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중.
“그쯤 하시지요. 미륵님.”
여래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래의 말에 미륵이 처용을 향해 내뿜던 기운들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처용을 짓누르던 몸의 압박이 풀렸다.
처용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 이 성역에서 지옥 같은 수련을 받을 때.
미륵의 압박을 수도 없이 받아봤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일반적인 헌터들은 아마 주저앉는 것을 넘어서 기절했을 것이다.
처용이 속으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아직도 네 존재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여래가 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켜보던 계승자 후보가 갑자기 변해버렸다.
분명, 살면서 처음 몬스터를 마주했을 것인데도.
마치 숙련된 전사처럼 능숙하게 상대하는 모습.
다친 사람을 치료할 때 사용한 보살의 권능.
그리고,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성역, 태룡전을 찾아왔다.
거기에 미륵의 권능까지…….
“성역을 스스로 찾아온 만큼.”
여래는 처용에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우리에게 무언가 전할 말이 있을 것이다. 아닌가?”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응답했다.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스승?”
처용이 아차 했다.
본의 아니게 습관적으로 그의 호칭이 나와버렸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말을 돌린 처용이 눈앞의 신들을 하나하나 마주 보며 말했다.
“미륵님, 보살님, 그리고 여래님.”
한명 한명, 그들을 이름을 말하고
“제, 자신을 증명하겠습니다.”
여래의 질문에 대답했다.
처용은 검지를 들어 올리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손끝에서 푸른 마나의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비단을 짜듯 서로 촘촘히 엮이며 손끝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나로 쌓인 손끝이 머리의 관자놀이 부분으로 향했고.
처용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머리에 손가락이 박혀 있었기에 기괴했지만.
피는 없었고 마치 손가락이 관자놀이에서 빛나는 마나에 흡수되어 빨려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성좌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전 미래에서 왔습니다. 종말을 맞이한 미래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계승자로 선택된 자신.
그들의 수련을 받아 선한 사람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었지만.
거대한 악을 막아내지 못하고 미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해 버렸다.
그리고…… 패잔병이 된 채 과거로 돌아왔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처용이 관자놀이에 박혔던 손을 빼냈다.
그러자, 실처럼 길게 뭉쳐진 마나가 딸려 나왔다.
“기억의 실타래라는 것입니다.”
기억의 실타래는 시스템에 등록된 스킬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사용하는 독자적인 마법 중 하나였다.
회귀 전, 주로 전장에서 모은 정보들을 동료들에게 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당연히 처용의 모든 기억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모든’ 기억을 담아낼 정도로 엄청난 마법도 아니었다.
“네 기억을 담아낸 것이냐?”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처용은 여래의 말에 답하며 손가락을 한 바퀴 빙 돌렸다.
그러자, 길게 이어진 마나의 실이 천사의 고리처럼 둥글게 이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리를 성좌들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네놈의 수작질인지 어떻게 아느냐?”
미륵이 날 선 목소리로 처용에게 말하자.
“수작질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처용이 옅게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예상이었지만, 미륵이 사용하는 통찰의 눈은 처용보다 더 정확하고 강력할 것이다.
그의 눈이 직접 바라보는 앞에서는 그 누구라 해도 수작질은 불가능하다.
“젠장! 내가 인간을 보고 혼란스러워할 날이 올 줄이야!”
미륵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을 가득 담아 뱉어냈다.
그리고, 미륵이 짜증을 내던 때.
“그대를 믿겠습니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보살이 처용에게 말했다.
“그대의 기억을 보겠습니다.”
보살의 옥색 눈동자가 처용을 응시했다.
“그래야…… 그대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처용이 절망에 빠져 마음이 무너지려는 순간.
언제나 항상 미리 알아채고 보듬어줬었던 그녀의 권능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이 능력으로 이번 대 계승자 후보인 처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용을 지켜보며 그가 계승자로 선택된다고 해도.
자신의 권능을 계승시킬 생각은 없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러나, 지켜보던 계승자 후보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가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비탄에 빠진 아이에게.
울지 말라는 위로를 전하면서 자비를 보였다.
악신의 병사들을 잔혹하게 죽였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비되었다.
그가 정말 미래에서 온 계승자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그의 무엇을 보고 권능을 계승시켜줬을까?
눈앞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들 그리고…….
오싹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품은 강력한 살심과 증오.
눈앞에 있는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래에 무슨 일들이 발생했었던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 기억을 보고 당신을 판단하겠습니다.”
“보살님…….”
처용은 보살의 아름다운 미성이 귓가에 울리자 다시금 죄책감과 슬픔이 밀려왔다.
처용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심 불안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는…….
배신자들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깊게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까.
당연히 그들에게 품은 강력한 증오가 그녀에게 느껴질 것이다.
이들은 모두 대신이다.
처용이 숨기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고 숨길 방법도 없었다.
그녀가 묻는다면, 사실대로 대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가르침에 반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무엇을 보고 믿는다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믿어 준다는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보살님…….”
처용은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아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녀를 계속 마주했다간…….
마음 깊이 묻어둔 감정이 터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저는 이 기억을 보겠습니다.”
보살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보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보살님.”
“그래, 네놈이 해 봐야 뭔 짓을 하겠느냐? 직접 확인해주마.”
여래와 미륵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고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 명의 성좌가 동시에 고리에 손을 얹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