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며 또 게이트가 열렸다.
강력한 마기를 내뿜는 악신들.
섬뜩하게 달려드는 악마병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몬스터들이 흉포함을 자랑하며 돌진해왔다.
악의 종주가 일으킨 종말.
다가오는 종말에 굴복하지 않고 세계가 연합하여 맞섰다.
이종족의 대표들, 성좌들, 그리고 지구의 헌터들이 모인 연합군.
하지만, 지구의 멸망을 시작으로.
세계들이 하나하나 무너졌으며.
함께 싸워주던 성좌들의 성역이 무너졌다.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생존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대항했다.
“무너지지 마라!”
“더 버텨내!”
투지와 사기를 끌어내며 압도적인 군세로 돌진하는 전사들.
악의 군세에 비해 백 명조차 되지 않는 초라한 수.
악의 종주에게 대항하여 생존한 마지막 이들이었다.
“마지막 게이트야! 더 버텨내!”
가장 앞장서서 군세에 돌진한 검은 머리의 전사가 거대한 몬스터를 단칼에 갈라버렸다.
-쿠구구- 콰쾅!
피를 뿜으며 양단되어 쓰러지는 거대한 몸뚱이에 다른 몬스터들과 악마병들이 짓눌렸다.
“죽어라! 바퀴벌레 같은 놈!”
악신 하나가 빈틈을 노리고 마기에 물든 창을 내질렀다.
고개를 틀어 가까스로 피해냈지만, 창은 오른쪽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한쪽 눈의 시야가 붉은빛으로 점점 흐려졌다.
아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무너질 뻔한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았다.
써걱-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러 창을 내질렀던 악신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머리를 잃은 악신의 몸뚱이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악신의 몸이 무너지자 그 너머에서 달려드는 악마병들이 보였다.
검을 휘둘러 놈들을 죽여야 하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커윽-!”
악마병이 내지른 병장기가 왼쪽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꺼져!”
거리를 벌리고 달라붙은 놈의 머리를 발로 차 터트렸다.
왼팔이 멀쩡했다면, 무기를 들어 방금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이미 왼쪽 팔은…… 없다.
한쪽 팔에 한쪽 시야까지 없어지자 몸의 균형이 점점 흔들렸다.
뒤를 기습한 몬스터의 발톱이 등과 허벅지를 찢고 지나갔다.
이를 악물고 쓰러져가는 육체에 힘을 주어 지탱했다.
다리를 억지로 전진시키고 검을 휘둘러 놈들을 베어나갔다.
마나와 포션은 오래전에 바닥났다.
지니고 있던 아티팩트와 무구들도 진작 한계를 넘어 부서졌다.
오른손에 쥔 실금투성이의 마지막 무기도 부서지기 직전이다.
한계를 넘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오른팔을 휘둘러 놈들을 베었다.
“한처용! 이 괴물 자-!”
써걱- 깡!-
악마병들을 지휘했던 악신을 베어버리자 무기가 반파되며 부러졌다.
털썩-
그리고 동시에 정신을 붙잡으며 움직였던 몸이 주저앉았다.
전쟁에서 주저앉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이젠 괜찮다.
방금 머리를 베어버린 악신이 마지막 놈이었으니까.
“다…… 다들 무사해?”
승리에 대한 안도와 기쁨에 말라버린 목을 쥐어짜며 말했다.
“얘들아?”
다시 한번 말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봐…… 왜 대답들이 없는…….”
초점이 흐려진 시야를 바로잡고 전장을 살폈다.
악의 종주가 일으킨 종말에 맞서서 싸운 전투의 현장.
최후의 전장에서 같이 싸운 결사대, 그리고 수십만이 넘는 적들의 시체 가운데.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생존자 1명.
“마지막……, 마지막 한 놈만 죽이면 되는데…….”
아무리 흐느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현재 상황을 판단한다.
이 전투로 죽인 놈들의 수가 수십만이었다.
지금 놈들의 본진은 악의 종주를 제외하고 비어 있을 것이다.
몸을 추스른 다음 조금, 아주 조금만 쉬고 마지막 남은 놈을 처치하면 종말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슬픔을 묻고 굳건한 마음으로 나아가려고 했었다.
-우웅-
눈앞에 열리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게이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일주일이 넘는 싸움 끝에 천 배를 아득히 넘는 병력차를 극복하고 겨우 승리했다.
처용만 살아남은 채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게이트를 열고 나오는 적들은 수십만을 넘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군세였다.
“하…….”
처절하게 싸워 이겼던 수십만의 군세는 눈앞의 무한한 악신의 군대 중 일부에 불과했다.
“이…… 이걸 어떻게 이기라고…….”
끝이 보이지 않는 군대가 게이트를 넘어오고 있었다.
처용은 부서진 무기에 의존해 반쯤 꿇린 무릎을 겨우 지탱하며 힘겹게 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뿐인 시야에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적의 군대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하지만, 놈들은 처용을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두며 에워싸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싼 악마병들과 몬스터들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이 직접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육중한 검은 갑주와 투구 속에서 빛나는 핏빛 눈동자.
신격을 지닌 자조차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악의를 내뿜는 존재를 똑바로 마주했다.
“이겨서 기분 째지겠네. 그치?”
소멸한 태초신의 잔재에 악념들이 모여 태어난 악의 종주이자 악신들의 왕.
“조크-크타니드.”
증오와 분노, 억울함과 원통함의 감정을 가득 담아 악의 종주의 진명을 불렀다.
반쯤 부러진 검을 땅에 박아 몸을 지탱하고 있던 오른손이 떨렸다.
천근 같은 무거움을 이겨내고 무너진 다리를 일으키고 싶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저앉은 육체는 이미 옛적에 한계를 넘은 상태였고.
놈을 베어야 할 무기는 반파된 상태였다.
“고작 하계종 따위가 감히 위대한 존재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악의 종주를 받들어 모시는 악신 하나가 고함을 내질렀다.
처용은 눈을 돌려 고함을 내지른 악신을 마주 바라봤다.
“아레스…….”
배신자, 악신 아레스.
전 올림포스 전쟁의 신이자 제우스의 아들.
동료들은 물론 가족들인 올림포스 신들마저 뒤통수를 치고 악의 종주에게 복종을 맹세한 쓰레기.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개새끼.
패륜의 신 아레스.
그리고 그 옆, 뒤에 자리한, 자신과 동료들을 배신하고 악의 종주에게 붙은 쓰레기들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처용이 분노를 가득 담아 배신자들 노려봤다.
놈들이 저지른 짓거리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크크, 이기면 끝이지 멍청한 새끼.”
“바퀴벌레 같은 놈 드디어 죽는구나!”
“어리석은 수호신이여,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했을 뿐이네.”
“실패한 꼴이 보기 좋구나.”
그들은 만신창이의 처용을 조롱했다.
자신들의 배신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쓰레기들.
하지만, 그저 권력욕과 자리보존을 위해 세계를 팔아먹은 차원급 매국노들이었다.
처용은 그들이 지껄이는 조롱과 개소리에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킄……크크, 병신 같은 패륜아 새끼, 버러지 같은 꼰대 새끼…….”
배신자들을 상징하는 듣기 좋은 말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일갈했다.
“나한테 뒤질까 봐 전선에는 오지도 못한 쓰레기들이 왕 뒤에 숨어서 짖는 것밖에 못하나?”
비웃던 놈들의 안면이 싸늘하게 식으며 굳어갔다.
“이 건방진 하계종이!”
“응 조까 패륜아 새끼야.”
처용이 비웃으면서 날린 도발이 먹혔는지 아레스는 순식간에 칼을 뽑아 들어 그의 목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처용 역시 그냥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이들에게 엿을 줄 생각이었다.
의외의 인물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을 막기 전에는.
“짐은 공격을 허용한 적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의 종주가 아레스의 검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무장을 해제시켰다.
마지막까지 싸운 적에 대한 예우라도 해 준다는 건가?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다시 그를 마주했다.
“역시, 선택받은 계승자인가? 네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았구나.”
“그래서 감동받은 대가로 직접 납시었나? 이야~ 이거 아주 송구스럽네.”
어차피 끝장난 마당에 악의 종주든 뭐든 시원하게 욕 한마디를 더 하려고 했다.
“아직도 나를 따를 생각은 없는가?”
크타니드가 같은 제안을 또 하기 전에는.
“내 휘하에 들어와라. 계승자 한처용.”
수호신 처용이 지구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절망할 때.
그가 처음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제안했었다.
자신을 섬기라고……, 너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이 아마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제안이었던가?
“킄,크크…… 크크크.”
처용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하계종, 반쪽짜리 신…….”
자신에게 들러붙은 조롱과도 같은 말들을 토해냈다.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무능한 수호신, 그리고 이젠…… 실패자!”
처용이 크타니드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이유가 뭐냐 대체?”
이런 자신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진심이었다.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 기회를 주는 거다. 계승자.”
“……너만의 세계겠지.”
“정녕 내 뜻을 모르는 것인가?”
처용이 검은 투구 속 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악의 종주 조크-크타니드.
태초신의 소멸과 함께 태어난 만악의 근원.
세상을 멸망시키고 재창조를 한다는 뒤틀린 신념을 가진 악의 종주.
지금까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건 그저 그와 대척점에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세상을 지키려 함께 싸워온 많은 인연들 때문이었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던 많은 사람들, 헌터들, 성좌들…….
지금은 전부 죽어버렸지만.
“사실, 네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도 있어.”
처용이 침묵하고 있는 크타니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딱,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말이야.”
처용의 시선이 크타니드에게서 그 뒤에 있는 악신들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처용과 동료들을 배신한 배신자들에게 향했다.
“네 손으로 저 쓰레기들을 손수 정리해준다면.”
당장 검을 들어 죽여 버리고 싶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일갈했다.
“개처럼 충성을 맹세 해주마!”
세상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나발이고 저 면상들을 갈아버릴 수 있다면.
악의 종주한테 충성 맹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신자들을 휘하로 받아들여 품은 크타니드.
이게 지금까지 그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었으니까.
“한처용! 왕이시여, 저 건방진 하계종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레스가 두 눈이 벌게져 악을 썼다.
다른 악신들, 특히 배신자들의 얼굴이 마치 종이가방처럼 구겨졌다.
처용은 다시 크타니드를 마주하며 그에게 나올 말을 기대했다.
“내 입사 지원서가 마음에는 들었나, 크타니드? 킄…… 크크.”
“이 하계종 따위가 감히!”
“고작 반신 주제에!”
“죽여 버리겠다!”
악신들 전부가 무시무시한 마기를 내뿜으며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악의 종주 역시 더 들어줄 마음은 없는지 손수 마기를 뭉쳐 다수의 무기를 형성했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물론, 이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건넨 처용도 그가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은 네가 멸망시켜서 이미 없어.”
마치 처형을 준비하듯 시커먼 기운을 내뿜는 무구들이 처용을 겨누며 둘러쌌다.
“너무나도…… 아쉽구나. 계승자.”
핏빛 눈동자 외에는 얼굴이 가려져 있기에 크타니드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녀석이 본인의 말대로 정말 아쉬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짐이 이겼느니라.”
“그래, 축하하고…….”
극한으로 압축된 마기로 형성한 무수한 검들이 쇄도해왔다.
“네놈들 앞길에 빛의 축복을 바래주마. 이 망할 새끼들아!”
곱게 죽어줄 수는 없다.
패배가 확정되었다 해도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저들의 뜻대로 굴러가게 두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반신에 올라 ‘수호신’이라는 자격을 얻었을 때 받은 권능.
‘최후의 희생.’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악이 도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사용할 수 있는 힘.
지금까지 받아온 모든 피해를 상대의 영혼에도 똑같이 가하는 최후이자 최강의 비기.
수호신의 신격, 영혼, 자신의 모든 걸 기폭제로 삼아 터트리는 이른바 자폭.
-삐--
심장이 터지자마자 어둠에 잠긴 세계를 비춰주는 밝은 빛이 폭발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게 지워져 가며 의미 있는 희생처럼 보였다.
“쓸데없는 발버둥을…….”
악의 종주가 몸소 폭발을 막아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자폭을 가한 처용도 알고는 있었다.
최후의 발버둥일 뿐, 이 공격으로 놈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저 많은 희생 속에서도 이리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배신자들만이라도 길동무로 삼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면서 말이다.
-희망을 잃지 마라.
죽었기 때문일까. 유독 그리웠던 스승이자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성좌, 여래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희망은 무슨 희망입니까? 다 끝났는데…….”
시야가 암전되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한 곳.
허공에 붕 떠 있는 이상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죽음의 신들도 죽어서 저승도 없을 텐데……, 여기는 뭐야?”
이 장소가 악의 종주가 그리던, 무로 돌아간 세계인가?
애초에 죽어 본 경험이 없으니 이 상황이 정상적인 것이 맞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지어 죽어 버린 자신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태초신의 잔재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서 그런가, 무의 세계에서도 시스템이 뜨네?”
[조건 충족 : 대상자의 사망]
[시크릿 퀘스트 ‘프로젝트 새로운 여명’이 시작됩니다.]
[……의 재구성을 시작합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끝나자 다시 여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분명 환청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처용아.
“저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종말을 막아내지 못한 무능한 수호신인 자신은 스승의 미안함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이런 선택을 내려야 하는 못난 스승을 용서하지 말거라.
“스승님?”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다.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다.
이 말은 여래가 마지막 성역에서 악의 종주와 싸워 죽기 전,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종말을 막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노력했던 스승의 유지를 잇지 못했다.
“전 실패했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중요할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선한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이 멍청한 제자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책감이 깊게 밀려왔다.
자신이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 더 강했더라면!
처용이 절망하는 와중에도 여래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아직 한 줄기 희망이 남아있다.
“희망은 무슨, 다 끝났는데 뭔 희망입니까? 앞도 안 보이는데…….”
처용의 말과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어떤 장면이 나타났다.
“나?”
자폭으로 산화하는 자신의 모습.
그것뿐이면 상관이 없었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자신의 자폭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은 악의 종주.
문제는 배신자들만이라도 길동무로 삼겠다는 작은 바람 또한 허무하게 흩어졌다는 거였다.
“하! 꼴에 지 부하라고 지켜준 거야?”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원통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개 같네 씨바 진짜!”
자신이 죽은 것에 대한 억울함은 아니다.
자폭으로 악의 종주를 죽이지 못한 것도 상관없다.
전부 예상은 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배신자 쓰레기들만이라도 죽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저 자식은 잘 막아놓고 갑자기 왜 저래?”
처용의 자폭을 막아낸 크타니드.
녀석이 돌연 주저앉더니 가슴께를 더듬고 있었다.
최후의 희생을 혼자서 감당한 만큼 데미지를 받은 듯 보였으나.
다시금 들려오는 여래의 목소리 때문에 더 생각할 수 없었다.
-세계의 목숨이 네 손에 달려 있다.
“이미 늦었다니까요…….”
여래의 목소리에 대꾸하고는 있었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맞다.
그저, 다 끝장난 마당에 이러한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견뎌 주기를 바란다. 제자야.
“도대체 뭘요?”
이번 대꾸에는 여래가 아닌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재구성 완료.]
[기록 삭제가 시작됩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끝나자.
처용을 중심으로 눈앞에 보이는 최후의 장면이 반 시계 반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의문 섞인 말을 내뱉자마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변하기 시작했다.
빛들이 다시 뭉쳐지며 처용이 자폭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죽었던 동료들이 다시 일어나 악신의 군대와 싸우는 모습으로.
그리고 마지막 성역이 무너지는 모습으로…….
“시간이 되돌아가?”
지금까지 일어났었던 일들이 거꾸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중심축의 내구도가 소모됩니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신력이 하락합니다.]
[……스킬이 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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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시스템이 말하는 중심축은 처용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로 알람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처용의 힘이 깎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처용의 존재가 마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점점 깎이듯이 찢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흡, 크아아아-!”
자기 자신조차 인지하기 힘든 이상한 공간 속에서.
사지가 찢어지며 분해되는 듯한 강력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스테이터스가 하락합니다.]
[……스킬이 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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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으로서 종말을 막아내지 못한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주의! 정신을 잃으면 중심축의 존재가 소멸합니다.]
“지랄하지 마!”
처용은 시스템의 경고에 악을 썼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억울해서라도 정신을 붙잡았다.
당장 놓아 버릴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히 이어질 듯했던 고통이 멎었고 돌아가던 세상이 멈췄다.
[프로젝트 새로운 여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에서 추방됩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강력한 인력이 발생했다.
멈추어진 세상 속으로 처용이 점점 녹아 들어갔다.
-네게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구나,
“스승…….”
처용이 말을 다 끝마치기 전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세계가 암전되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