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커, 헉……?!”
칼날이 뇌를 헤집자 루체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생명체라면 응당 즉사하는 게 당연했으나 루체는 태양신의 자손 중 하나인 천사. 그중에서도 대천사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뒤룩뒤룩 살쪘으나 반신답게 머릴 꿰뚫리고도 죽지 않았다.
“쿨럭, 크어, 이 자식이…….”
루체가 피거품을 뱉으며 정도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치이익-!
꿰뚫린 미간에서 황금색 불꽃이 피어나더니 칼날을 조금씩 밀어내며 상처가 아물었다. 정도현이 혀를 찼다.
‘역시 곱게 죽어 주질 않네. 귀찮은 놈들.’
지상에서 그가 상대했던 천사들은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
오랜 평화에 찌들어 나태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드래곤 하트를 취한 그가 너무 강해져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천사 개개인의 무력은 영광의 일족의 가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약한 건 아니나 정도현과 이윤정의 적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놈들을 쓰러트리고 지하실로 내려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수십 명의 쪽수 때문만은 아니다.
천사들이 「태양신공」의 상위호환인 「태양합일신공」이란 스킬을 지녔기 때문이었지.
「태양신공」의 유용하고도 까다로운 특성 중 하나, 재생의 불꽃.
천사들의 재생력은 영광의 일족의 몇 배는 되었다.
머릴 부수고, 목을 베고, 심장을 터트려도 언데드처럼 죽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놈들한테 「태양신공」만 통했으면 단숨에 처죽였을 텐데.’
「태양신공」의 유용한 부가 효과, 재생력 억제.
하지만 천사들에겐 「태양신공」을 담은 공격을 날려도 일절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긴, 자신들이 전수해 준 스킬에 당하는 것도 웃기는 촌극이긴 했다.
고로 놈들의 재생력을 억누를 방도는 없었다.
“내가 네 부하들을 어떻게 죽였을까?”
“…뭣?”
“간단해. 더는 재생 못 할 때까지 계속 베었어.”
그들의 재생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결국 생명체.
재생하다 보면 극양의 마력을 소모할 터. 열화판인 「태양신공」이든 원본인 「태양합일신공」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약점은 똑같으니까.
“극양의 기운은 충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잖아, 안 그래?”
정도현은 이마에 꽂힌 검을 힘껏 내리그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찢었다.
촤아악-!
비대한 몸뚱이가 세로로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양쪽 절단면에서 불꽃이 일렁이더니, 쪼개진 몸이 바닥에 드러눕기 전에 자석처럼 철썩 들러붙었다.
“…이놈!”
후웅-!
순식간에 재생을 끝마친 루체가 눈을 부라리며 반격했다.
주먹에 신성한 불꽃을 휘감아 크게 휘둘렀으나, 정도현은 자셀 낮춰 가뿐히 피하곤 동시에 팔을 휘저어 상대의 허릴 베었다.
촤악!
풍선처럼 빵빵한 복부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깔끔히 썰렸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화르륵-!
루체의 허리 아래로 불꽃과 함께 하반신이 새로 자랐다. 경이로운 재생력이었다.
정도현은 부들대며 일어서는 그에게 저벅저벅 다가가며 여유롭게 검을 휙 돌렸다.
“네 부하들은 백 번쯤 죽이니 못 일어나던데. 넌 얼마나 죽여야 뒈질까?”
“히, 히익…….”
루체는 깨달았다. 자신의 힘으론 정도현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걸.
놈을 이기려면 금단의 비술로 얻은 영혼의 구슬을 써야만 한다. 거기까진 생각이 미쳤으나.
“……!”
언제 놓쳤는지 손아귀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급히 눈동자를 굴려 대며 영혼의 구슬이 어디로 갔는지 찾았다.
‘저깄다!’
루체는 영혼의 구슬이 보이는 곳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보다 정도현의 검이 빨랐다.
“어딜 도망치려고.”
“커헉……!?”
푸욱-!
이번엔 심장을 정확히 뚫었다.
칼날을 확 비틀어 뽑자 여지없이 붉은 피와 황금색 불꽃이 함께 쏟아졌다.
“허억, 헉…….”
루체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 댔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가 거친 숨을 뱉어 내곤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 모습에 정도현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저건 도주가 아니라 뭔가를 손에 넣으려는 행동 같았다.
그 위화감을 깨닫자 여태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루체가 뛰어가는 곳에 회색빛 구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깐 없었는데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끼에에에-!
저게 뭔지는 몰라도 영혼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불길하기 짝이 없다.
놈이 저걸로 무슨 해괴한 짓거릴 할지 모르니 사전에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뗀 순간.
[호오. 벌써 내 「공허의 장막」을 간파했나? 감이 날카로워.]
“……!”
귓가로 음산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동시에 눈치챘다. 은밀하고 끈적한 마력이 자신의 몸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었음을.
기척을 감추는 능력을 지닌 놈이다.
[저 친구랑 거래가 안 끝났거든. 그러니 방해하지 말라고.]
꽈아악-!
기분 나쁜 마력이 촉수처럼 변해 온몸을 휘감았다.
서걱-!
정도현은 단숨에 베어 냈으나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촉수들이 바닥에서 흐물흐물 솟아났다.
이번엔 그의 동료들까지 노렸다.
“다들 조심해! 한 놈 더 있어!”
정도현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검은 촉수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정도현은 그들이 자력으로 버텨 줄 거라 믿고 곧장 루체 쪽으로 돌진했다.
수백의 촉수들이 오로지 그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것들은 날렵하면서도 유연하게 몸을 꺾으며 예측하기 난해한 방향으로 치고 들어왔다.
[호오?]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 그딴 잔재주는 소용없었다.
콰앙-!
정도현은 마법 주문처럼 검강을 날려 대며 다가오는 촉수들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건 부가적인 소득이었다.
그가 노린 건 루체. 정확히는 놈이 쥐려는 불길한 구슬이었다.
구슬을 얻지 못하게 파괴할 속셈이었다.
“끄아아악!”
촤좌좌좌좍-!
초승달 모양의 검강 다발이 루체의 전신을 난자해 수백 조각으로 토막 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마력의 칼날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영혼의 구슬까지 휩쓸었다.
[영혼의 구슬을 노렸나. 하지만 소용없어. 물리적인 수단으론 저걸 파괴할 수 없으니까.]
악마왕은 정도현의 노력을 비웃었다.
게다가 루체도 포기하지 않았다.
잘려 나간 손가락 하나가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구슬을 향해 기어 갔다.
톡.
손끝에 구슬이 닿자 루체는 손가락 하나에서부터 전신을 재생시켰다.
배보다 배꼽이 큰, 그야말로 비효율적인 재생이지만, 대천사의 방대한 마력 앞에서 그런 걸 따져 봤자 무의미했다.
“하, 하하!”
영혼의 구슬을 다시 거머쥔 루체가 승자처럼 웃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입속에 구슬을 넣었다.
서걱-!
그와 동시에 악마왕의 방해를 뚫고 놈의 뒤통수까지 도달한 정도현.
구슬을 삼키지 못하게 곧바로 목을 쳐 머릴 날렸지만.
‘없어졌어?’
목구멍에 있어야 할 구슬이 안 보였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툭, 데구르르.
잘린 머리가 축구공처럼 통통 튀며 저편으로 굴러갔다.
[계약은 성립됐다.]
악마왕의 만족스러운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콰아아아-!
머리 잃은 비대한 몸뚱이가 시커먼 마력을 사방으로 발산했다.
“꺄악!?”
“…큭!”
힘겹게 검은 촉수들을 피하거나 없애던 이들은 마력의 파도에 떠밀려 나뒹굴었다.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건 정도현과 이윤정뿐.
[드디어 마왕의 그릇이 완성되었다!]
악마왕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정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변해 버린 루체를 바라봤다.
신성력이 아니라 어딘지 불쾌한 마력이 풀풀 풍기는 것도 큰 변화였지만, 우선 겉모습이 싹 바뀌었다.
덕지덕지 붙은 군살이 싹 사라졌다.
조각상 같은 몸매와 헤일로 대신 시커먼 뿔이 한 쌍 자라났다.
반짝이던 머릿결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황금안은 섬뜩한 적안으로 변했다.
하얀 날개 역시 악마의 그것처럼 시커메졌다.
익숙한 모습에 정도현이 빈정댔다.
“뭐 대단한 건가 싶었더니. 악마로 변하고 끝이야?”
[악마가 된 게 아니다. 마왕의 그릇이 된 거지.]
“…마왕?”
정도현은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이윤정을 바라봤다.
이윤정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댔다.
“마왕은 오래전에 죽었을 텐데, 어떻게……?”
[그래, 육신은 잿더미가 됐지. 하지만 혼은 소멸하지 않았어.]
태양신이 탄생하기 훨씬 이전.
마족과 악마들이 살던 차원, 마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절대자가 바로 마왕이었다.
즉, 마왕은 태양신에 의해 몰락해 버린 다른 차원의 절대자였다.
먼 과거, 마왕은 병력을 이끌고 태양신의 차원을 침공했고 치열한 접전 끝에 패했다.
마왕의 오른팔이었던 악마왕은 금단의 비술로 죽어가던 마왕의 혼만을 겨우 챙겨 도주했다.
[고향인 마계로 돌아가고 싶어도 마왕께서 그리되신 탓에 완전히 붕괴해 버렸지.]
마족과 악마들은 어쩔 수 없이 태양신이 만든 세상인 대륙 각지로 흩어져 숨어 지냈다.
그렇게 수백 년을 버텼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었던 태양신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을 새로운 세상, 방주를 만들어 내고 소멸했다.
악마왕은 이 세상을 망쳐 태양신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인간을 가축으로 삼자고 한 것도 내 제안이었어.]
“저 돼지가 아니라 너였다고?”
[그래. 루체는 내가 알려 준 방법을 그대로 시행했을 뿐이야.]
악마왕은 미엘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루체를 꼬드겼다.
죽은 그녀를 위해 인간들에게 복수하자고. 그러면서 극상의 마약, 지식의 열매를 하나 선물했다.
이게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게 도와줄 거라 속삭이면서.
악마왕이 바란 대로 미엘라와 고위 천사들은 그 열매에 서서히 중독되었고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다.
[내 계획대로 잘 풀렸지.]
태양신이 바라던 건 최초의 플레이어들과 신의 자손들이 화합하며 생존하는 것.
하지만 악마왕이 그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루체, 이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
새로운 육체를 살피느라 정신없던 루체는 악마왕의 부름에 고갤 돌렸다.
스스스!
시커먼 마력이 뭉쳐지더니 이내 어떤 인간 남성으로 변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본 루체의 눈동자가 커졌다.
[미엘라랑 결혼한 인간. 지루할 정도로 착하고 성실한 남자였어. 그래서 인생의 즐거움을 좀 알려 줬지.]
악마왕의 의미심장한 말에 루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술, 도박, 마약, 여자, 돈 등등.
악마왕은 남자가 여러 욕망을 탐하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은 점차 더럽혀졌고, 끝내 사랑하는 아내마저 팔아넘길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미엘라가 죽은 게… 네놈 짓이라고?”
[난 그저 인간들이 솔직해지도록 등을 살짝 밀어주기만 했어.]
천사를 죽여야 할 몬스터라 선동한 것도.
최초의 플레이어 중 흑마법사였던 자와 결탁해 미엘라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전부 악마왕이 뒤에서 암약한 결과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단 걸 안 루체는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악마왕의 시커먼 마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죽여 주마!”
루체는 시커먼 마력을 손으로 붙잡고 비틀어 부쉈다.
마력 자체가 육신이나 마찬가지인 악마왕은 서서히 소멸당하면서도 오히려 킬킬댔다.
콰지직-!
분노로 눈이 돌아간 루체는 악마왕의 마력을 두 손으로 잡아 뜯고 발로 짓밟아 뭉갰다.
뜯겨 나간 마력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저대로 있으면 죽을 텐데. 악마왕은 아무런 저항도 안 했다. 오히려 기껍단 듯이 웃어 댔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이윤정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뭔가 이상해요.”
“그래. 반격도 안 하는 걸 보면 뭐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화르륵-!
루체의 전신에서 칠흑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번 일격으로 마무릴 지을 셈인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뜨겁고 강렬한 폭발이 악마왕의 마력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허억, 헉…….”
악마왕이 흔적도 없이 소멸하자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놈을 완전히 끝장냈다고 생각한 그는 고갤 돌려 정도현을 노려봤다. 그가 거만하게 말했다.
“이번엔 네놈 차례다, 열등종.”
“그래. 질질 끌지 말고 이제 끝내자, 돼지 새끼야.”
“닥쳐라!”
루체가 땅을 박차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도현은 이윤정에게 동료들을 지켜 달라 말한 뒤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