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상공을 날아가던 정도현과 이윤정은 마력의 충돌을 감지했다.
익숙한 마력이었다. 신호영과 신성한.
그 둘이 싸우고 있다.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몇 분을 이동하자, 저 멀리서 불꽃을 튀기며 치열하게 싸우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망연히 지켜보는 조예령도.
“……!”
정도현이 조예령 옆에 사뿐히 착지하자, 그녀가 흠칫하며 그에게 도끼를 겨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폭주해서 신성한을 죽였으니까.
리자드맨을 연상시키는 흉측한 몰골에서 용인으로 완화되긴 했으나, 그녀 눈에는 그게 그거일 터.
정도현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떼어 내고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드래곤 하트를 완벽히 통제하려면 훈련이 필요할 듯싶다.
“진정해. 지금은 정신 차렸으니까.”
“…….”
그 말에 조예령은 슬며시 도끼를 내리곤 다시 전투를 바라봤다.
울었는지 그녀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정도현은 조심스레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다.
“설득을 못 했나? 부활시켰으면 억지로 명령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설득은 개뿔. 우릴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그게 무슨…….”
조예령은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신성한의 개인 특성, 「시간 정지」를 발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중요한 기억 대부분을 뺏겼다고.
그 반동으로 정신이 무너졌고, 이십여 년 전부터 품어 온 죄책감을 먹고 커진 심마가 날뛰게 되었다.
“주화입마에 걸렸군.”
“…그래. 그냥 놔두면 며칠 못 가 광인이 될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 제 손으로 보내 주겠다고 싸우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도현은 혹시 싶어서 이윤정에게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
“윤정아, 네 정신 감응으로 어떻게 못 해? 나도 원래대로 되돌렸잖아.”
“안타깝지만 불가능해요. 저분의 기억이 온전했으면 모르겠지만…….”
이윤정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고.
신성한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지 않고 곧장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신호영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인으로서 원 없이 싸우다 죽을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그러다 자칫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콰앙, 쾅!
싸움은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부활 페널티로 5레벨이나 떨어졌는데도 신성한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앞섰다.
신호영이 레전드리 장비템들로 무장하지 않았으면 벌써 결판이 났을 거다.
둘 다 지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까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다음 공격으로 결판이 난다.
쿠구구구-!
둘은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마력을 모조리 방출했다. 그런 뒤 동시에 움직였다.
신성한의 공격이 조금 빨랐다.
그의 칼날이 거릴 바짝 좁혀 상대의 미간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신호영은 막거나 피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과감히 방어를 포기하고, 상대의 간격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주먹을 내질렀다.
콰드득!
신호영의 주먹이 상대의 흉부를 깨부쉈다. 반면에 신성한의 칼날은 미간에 닿기 직전 멈췄다.
언뜻 보면 신호영의 주먹이 더 빨라서 승패가 갈린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신성한은 마지막에 망설였다. 예지몽에서 본 광경 그대로였다.
모든 걸 잊었는데도 한순간 아들의 얼굴을 알아본 걸까.
그건 이제 영영 알 수 없다. 대답해 줄 사람이 죽었으니까.
“…….”
주먹이 뽑히자 신성한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졌다.
신호영은 아버지의 시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꽉 붙잡고 품에 끌어안았다.
예지몽으로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는데도.
그날 다 울었다고 생각했건만.
어째선지 그때보다 눈물이 더 흘러나왔다.
신호영은 아버지를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절규했다.
* * *
신호영은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해 묻어 주었다.
그러면서 허락도 받지 않고 품을 뒤져 일가의 가보를 챙겼다.
마음은 석연치 않았지만, 마지막 관문을 열려면 별수 없었다.
“류중현이랑 같이 내려가는 편이 낫지 않았겠어?”
“아니, 천사들의 최후를 내 눈으로 봐야겠다.”
류중현과 류씨 일가 그리고 연합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B구역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신호영은 그들과 같이 가지 않고 여기 남았다.
천사와 승천자의 힘을 짐작해 볼 때, 신호영이 따라온들 큰 도움이 안 되고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신호영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천사들 때문에 여동생에 이어 아버지까지 제 손으로 죽였으니. 심마에 빠져 미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도 같이 가.”
조예령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기에 돕겠다고 했다. 도끼로 천사들 머리통을 쪼개 버려야 속이 좀 풀리겠다면서.
그렇게 조예령까지 합류한 정도현 일행은 섬의 안쪽으로 향했다.
며칠을 내리 날아가자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 모습을 보였다.
“오…….”
정도현은 마지막 관문 너머에 솟아난 세계수를 보곤 절로 감탄을 흘렸다.
멀리서 봤을 때도 정말 거대했는데 코앞에서 보니 지금껏 그가 봐 온 무엇보다 웅장했다.
엘프들이 왜 신목이라 부르며 그토록 목메고 찬양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런데 세계수가 왜 여깄지? 여긴 천사들의 땅이잖아.”
“본래 차원에서 균열에 휩쓸려 사라졌을 테니……. 천사들이 차원 게이트에서 찾아내 가져온 거 아닐까요?”
“저렇게 큰 걸 수십 미터 상공으로 옮겨다 심을 수 있어?”
“듣고 보니 그러네. 좀 이상한데?”
조예령도 세계수의 출처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정도현의 반박에 맞장구쳤다.
정도현은 호루스한테 들었던 얘길 떠올렸다.
“엘프들은 세계수를 찾으러 제 발로 균열에 뛰어들었다던데.”
세계수만 덩그러니 있고 엘프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 보면 넘어온 시간대가 크게 어긋난 걸까.
정도현이 그렇게 중얼대자 조예령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하계인이 엘프는 어떻게 알아?”
“뭐?”
“그놈들, 장벽 바깥에 있어.”
“…장벽 바깥?”
인류가 살아가는 이 세상, 일명 방주.
방주는 태양신이 세운 거대한 장벽 속이었다.
그 장벽 너머는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황무지뿐이라 들었는데.
“그건 아냐. 바깥에도 생명체는 살고 있어. 물론 인간들이 나가 봤자 못 살아남겠지만.”
“밖엔 뭐가 있지?”
“아까 말한 엘프들도 있고, 악마랑 마족도 있지. 다른 몬스터들도 잔뜩 있을 거고.”
물론 나도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조예령이 멋쩍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아무튼, 장벽 밖에도 생태계가 있다.
바깥의 세력이 방주로 침입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막아 내는 것.
그게 승천자의 주된 임무라고 한다.
“옛날엔 플레이어와 천사들이 함께 막았었대. 그런데 자꾸 괴물들이 쳐들어와서 피해가 컸다고 해.”
천사들은 피해 없이 방주를 지킬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마법 공학의 기술력과 태양신공을 익힌 인간의 뇌를 활용한 기계 천사, 승천자가.
늙거나 지치지 않는 육체.
설사 마력이 다해 기능이 정지되거나, 온몸이 부서져도 문제될 게 없다.
승천자는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 텔레포트 주문으로 뇌만 본부로 전송시킨다.
망가진 신체 부품은 새로 만들어 달아 주면 그만이었다.
“승천자들이 배치된 후론 어지간한 놈들은 장벽 근처에 얼씬도 못 한다더라고.”
“그렇게 대단한 병기가 있는데 왜 우리한텐 안 보냈지?”
정도현을 급습한 승천자는 고작 하나.
지금이야 몇 기가 날아와도 해치울 자신이 있지만,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기 전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을 거다.
“얼마 전에 장벽 밖에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났다더라고. 그때 전투용 승천자들이 대부분 박살 나서 수리 중이래. 너흰 진짜 운 좋았던 거지.”
정도현 일행이 조금만 더 빨리 올라왔거나 늦었으면 승천자들이 그들을 반겼으리라.
조예령 말대로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밖에.
“그럼 지금 놈들 본진은 텅텅 비었단 거네?”
“맞아. 전부 고치는 데 보름쯤 걸린다 했으니 수가 그리 많진 않을 거야. 절호의 기회지.”
조예령은 1초라도 빨리 천사들의 골통을 깨부수고 싶은지 주먹을 꽉 쥐었다.
신호영이 대표로 다가가 아버지의 유품을 관문에 갖다 댔다.
우우웅-!
가보가 은은히 빛나자 거대한 관문이 좌우로 열렸다.
정도현은 진입하기 전에 모두를 둘러보며 한마디 했다.
“전원 살아서 돌아가자. 꼭.”
더는 누군가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에 다들 고갤 끄덕이곤 뒤따랐다.
* * *
같은 시각, 대천사와 최측근들은 지식의 열매에 취해 극상의 쾌락을 만끽하고 있었다.
실로 한심했다.
낙원이라 불리는 A구역 중심에 사는 자들의 모습이, 빈민가나 암흑가의 싸구려 마약에 중독된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다들 몽롱한 눈으로 침을 흘리며 실실 웃어 댔다.
쿠구구궁, 콰앙-!
그런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까부터 뭔가 터지고 깨지며 박살 나는 요란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꿀꺽, 꿀꺽.
큼지막한 포도주를 병째로 마시며 여종들의 속살을 만져 대던 대천사가 최측근들에게 성질을 냈다.
“밖에 무슨 일이냐?”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데 산통을 깨다니.
대천사의 살벌한 목소리에 거나하게 취했던 천사들도 정신이 번쩍 드는지 허둥지둥 확인해 봤다.
내성 곳곳에 설치해 둔 감시 카메라의 실시간 화면이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어, 어?”
“이게 무슨……!?”
감시 카메라를 뒤늦게 확인한 천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깥 풍경은 참혹했다.
고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승천자들이 산산이 부서져 장작처럼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저, 적습입니다!”
“…뭣이? 서, 설마 장벽이 뚫린 거냐?”
적이 내성까지 들어왔단 말에 대천사도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뱃살이 파도처럼 마구 출렁댔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여종들이 눈치를 살피며 물러났다.
“자, 장벽은 무사합니다.”
“그럼 적이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냐!”
대천사가 버럭 소릴 지르자 최측근들이 벌벌 떨며 말했다.
“며, 며칠 전에 올라온 침입자들 같습니다.”
“뭐? 전부 격퇴했다지 않았더냐!”
“그, 그렇사옵니다.”
며칠 전, 조씨 일가의 가주 조예령이 그들에게 직접 연락해 보고했다.
침입자들은 자신이 전부 처리했다고.
피의 맹약으로 묶인 그녀가 거짓 보고를 올렸을 린 없으니 이후로 신경 안 썼는데.
“설마 조예령, 그 여자가 우릴 배신한 건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네. 그랬으면 즉각 피의 맹약이 발동해서 죽었을 텐데…….”
콰앙! 쾅!
감시 카메라 영상에선 도끼 든 여자가 머릴 풀어 헤친 채 마구 날뛰고 있었다.
저건 누가 봐도 조예령이었다.
그녀가 배신했다면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리 없었다.
“뭐가 됐든 당장 나가서 막아! 막으란 말이다!!”
대천사의 불호령에 천사들은 덜덜 떨며 파티장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대천사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애써 불안함을 달랬다.
고작해야 유인원 몇 마리 들어온 거다.
저깟 열등종들 때문에 자신의 왕국이 무너질 리 없다.
‘내가 어떻게 일궈 냈는데!’
쨍그랑!
대천사는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근처에 있던 여종들은 혹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부복한 채 벌벌 떨었다.
대천사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저 머저리들이 이길 수 있을까?’
여기까지 뚫렸다면 신성한도 패했다는 거다.
신성한은 열등종이지만 돌연변이 괴물이었다.
만약 어릴 적에 피의 맹약으로 목줄을 단단히 채워 두지 않았으면 분명 자신들의 목을 물어뜯었겠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놈이 졌다니. 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대천사는 눈을 비비며 취기로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그리곤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신성한을 죽인 또 다른 괴물이 누군지.
“허, 허억!”
정도현이 용인이 되어 나타났다.
몸속에 용의 피가 흐르는 자가 기어코 자신의 왕궁 안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이클립스!”
그는 떠올렸다.
자신이 세뇌한 최초의 플레이어이자, 먼 미래도 내다보는 신통력을 지닌 초대 성녀의 경고가.
‘루체 님, 당신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암흑룡의 힘을 물려받은 인간이 나타나 자신을 죽일 거라고.
대천사 루체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플레이어들은 날개가 없는 열등종이나, 태양신이 직접 선별한 인간들이었으니까.
정신 감응으로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던 그조차도 무려 이십 년을 공들여 겨우 세뇌했지 않은가.
그마저도 열 명의 플레이어 중 세 명이 여성이었기에 유혹할 수 있었다.
‘저놈한테 죽는다고? 내가?’
대천사 루체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 해야 저 끔찍한 괴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쩍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수십 년 전, 그는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여기저기 수소문했고 끝내 악마왕과 거래했다.
그는 알아냈다.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해 줄 금단의 흑마법을.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치러야 해서 언제든 의식을 치를 수 있게 준비만 해 뒀고 여태 발동하진 않았었다.
‘지금이 적기다.’
대가가 뭐든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한 대천사 루체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제단이 있는 왕성 지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