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하아…….”
서로를 탐하던 키스가 끝났다.
정도현이 입술을 떼자 서아린은 아쉬움에 찬 얼굴로 긴 한숨을 뱉었다.
스윽.
그녀는 이대로 끝내기 싫다고 칭얼대듯 양팔로 그의 목을 휘감으며 밀착했다.
방금 나눴던 것 이상을 바라는 음탕한 눈빛에 정도현은 적잖이 당황해서 말했다.
“윤정아, 이게 뭔 상황이야? 방금 내 몸은 왜 멋대로 움직였지?”
“아, 그게……. 여긴 서아린 언니의 기억이랑 감정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
눈은 가렸으나 끈적한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 탓에 얼굴이 새빨개진 이윤정이 변명하듯 설명했다.
서아린의 심상 세계가 합쳐져 그녀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 추억이 미화되거나, 서아린 언니가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랐던 일이 벌어진다고나 할까요…….”
“그럼 내가 갑자기 입 맞춘 게 서아린이 원해서 된 거라고?”
이윤정이 고갤 끄덕였다.
정도현은 서아린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서아린 본인이 아니다.
그녀의 기억과 감정으로 구성된 분신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분신이라도 서아린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진 않았을 터.
‘그 말이 진짜였다고?’
신호영이 저번에 그랬다, 서아린은 널 좋아한다고. 그것도 꽤 많이.
그땐 농담 겸 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둔감한 정도현이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진한 키스를 주고받길 상상하고 바라겠는가.
심지어 그녀의 분신은 지금도 은근슬쩍 그의 윗옷을 손가락으로 벗겨 내려고 한다.
“윤정아, 서아린 본인도 불러 낼 수 있냐?”
“네? 가능은 한데……. 언니가 싫다는데요?”
진짜 서아린은 이윤정 눈에만 보이는지 텅 빈 곳을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아마도 부끄러워서 나오기 싫은 거겠지. 정도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불러내.”
“예? 그, 그래도 돼요?”
“안 그러면 얘랑 끝까지 갈 것 같아서 말이야.”
서아린의 분신은 상의에 이어 그의 바지까지 만지작 댔다.
그녀가 만든 심상 세계라 그런지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붙잡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이윤정도 상황을 보더니 고갤 끄덕이며 서아린을 불러냈다.
스르륵.
정도현 옆에 또 한 명의 서아린이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뭐 하는 짓이야!”
퍽-!
서아린은 자신의 분신을 밀쳐 정도현한테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분신은 이해가 안 된단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바란 거였잖아?]
“뭐, 뭐?”
[난 네 무의식이야. 그러니 네가 싫어 할 행동은 절대 안 해. 왜 솔직하지 못해?]
분신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서아린은 뭐라 대꾸 못 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이윤정한테 물었다.
“쟤 어떻게 없애?”
“서아린 언니가 마음속으로 사라지길 바라면 돼요.”
“사라져!”
그녀의 날 선 외침에 분신이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도현은 반쯤 흘러내린 옷을 정돈하며 말했다.
“몰랐어. 평소에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구나.”
“이, 이 정도까진 아니었거든요!”
서아린이 극렬히 부정했으나 정도현은 다 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포기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예, 맞아요. 저 도현 씨 진짜 좋아하니까 그만 좀 놀려요.”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정말 몰라서 물어요?”
“진짜로 기억 안 나. 너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말에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 발짝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이윤정은 지금이다 싶었는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그때 일을 언니가 구현해서 보여 주면 되겠네요. 그럼 오빠의 기억도 돌아올 거예요.”
“…어떻게 보여 주는데?”
“아까처럼 오빠한테 보여 주고 싶은 기억을 강하게 떠올려 봐요.”
서아린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퍼플 팬텀에 혼자 쳐들어가 민소이한테 붙잡혔을 때.
정도현이 자신을 구하러 나타난 순간을.
그러자 반지하의 풍경이 퍼플 팬텀의 본거지로 서서히 바뀌었다.
서아린은 어느새 민소이한테 머리끄덩이를 붙잡혀 무릎 꿇고 있었다.
“맞아, 이랬었지.”
퍼억-!
정도현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순간을 재현했다.
민소이를 발로 걷어차 저 멀리 날려 버린 뒤 서아린을 품에 안았다.
거기까진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하지만 다음 광경은 달랐다.
서아린은 분신이 했던 것처럼 입술을 맞대고 혀까지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정도현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질문했다.
“이랬었던 기억은 없는데?”
“…어차피 다 들켜 버린 김에 한번 용기 내 봤어요. 뭐, 불만 있어요?”
“그렇게 나랑 키스하고 싶었어?”
“…….”
그의 짓궂은 말투에 서아린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기억은 돌아왔어요?”
“응. 전부 기억나.”
서아린과 함께했던 추억, 그녀를 만났을 때쯤 겪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자 마음의 허함이 메워졌다.
그런데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중요한 누군가를 또 잊고 있는 걸까. 그가 그런 고민을 할 때.
이윤정이 허공을 바라보며 놀란 기색으로 중얼댔다.
“네? 권하율 언니도 직접 하겠다고요?”
권하율. 이윤정이 언급한 누군가의 이름에 정도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분명 아는 사람의 이름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나질 않았다.
“아, 알았어요. 언니 좀 진정하세요.”
이윤정은 권하율을 타이르며 정신 감응을 펼쳤다.
그러자 서아린의 심상 세계가 서서히 밀려나고, 권하율의 심상 세계가 대신 자리 잡았다.
새로운 여인, 권하율이 모습을 드러내자 서아린이 혀를 짧게 찼다.
권하율은 정도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정도현 씨, 저 알아보겠어요?”
“으음……. 권하율 팀장님? 이름이랑 직책밖에 안 떠오르네요.”
사실상 다 까먹었단 말에 권하율은 오히려 잘됐단 듯이 그와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서서히 바뀌었다.
“여긴…….”
어두컴컴한 영화관.
어느새 정도현과 권하율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아린과 이윤정은 저 먼 곳의 끄트머리에 자리가 배정됐고.
기억났다. 권하율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 개인 특성 때문에 즐길 수 없게 된 것도.
“맞아. 「독심술」 때문에 영화관은 얼씬도 못 했었죠.”
“맞아요. 정도현 씨랑 이렇게 손잡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 속마음이 안 들려서 괜찮지만요.”
권하율은 스크린 대신 고갤 돌려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서아린이 했었던 행동을 그대로 실행했다.
정도현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입술을 핥거나 장난스럽게 깨문다.
연인이나 할 법한 그녀의 행동에 정도현은 머릿속이 굳어 버렸다.
‘뭐지?’
장난치는 게 아니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키스가 끝나자 권하율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언젠가 연인이 생기면 꼭 해 보고 싶었어요.”
영화관에서 대범하게 애정 행각을 나누는 것. 그게 그녀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게 무슨…….”
“사랑해요, 정도현 씨.”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고백해 오자 정도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까 서아린의 마음을 알았을 땐 내심 기뻤다.
죽기 전에 손주 얼굴을 보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뤄 드릴 수 있겠거니 싶었으니까.
그런데 서아린에 이어 권하율까지 고백해 오자 곤혹을 느꼈다.
“저를 왜……?”
“기억나게 해 줄게요.”
권하율은 영화관에서 보냈던 추억 대신 다른 기억을 끄집어 냈다.
땅이 흔들리며 멋들어진 대저택이 솟아올랐다.
그건 본 그는 잊었던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마구 쏟아졌다.
그래, 시민들을 지키다 권하율이 인형의 마녀에게 납치당했었지.
저 저택은 인형의 마녀의 은신처였고.
“정도현 씨가 구해 줬을 때,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요.”
레드 플레이어, 순백교, 악마, 마녀…….
어떤 악과 마주쳐도 굴하지 않고 뚫고 나아가는 그가 멋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동경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쭉 좋아했어요, 제가 둔해서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그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했다.
아니, 없으면 안 된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을 땐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뒤였다.
“…….”
권하율의 마음이 서아린 못지않단 걸 확인한 정도현.
잠자코 지켜보던 서아린이 다가와 권하율 옆에 섰다.
그녀들이 서로를 흘끗 쳐다보곤 동시에 말했다.
“저예요, 이 여자예요?”
“정도현 씨 선택에 맡길게요.”
정도현은 난감함에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저 둘과 깊은 관계로 발전해 갈 생각 자체를 해 본 적 없었으니까.
누가 더 좋냐고 물어봐도 당장 답할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이런 일도 다 생기네.
정도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음은 알겠는데……. 당장 해결할 문제가 남았잖아요.”
영광의 일족은 정리됐으나 아직 천사들이 건재했다.
그들과 싸워 이기고 살아남아야 사귀든 말든 하지 않겠느냐고.
정도현이 결정을 유보하자 서아린은 초조했는지 질문했다.
“고민하는 거예요? 아니면 뭐, 양다리라도 걸치게요?”
“내가 뭐, 양아치냐?”
정도현이 억울하단 표정을 짓자 서아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죽지 말고 돌아와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그래.”
“그럼 나갈게요.”
이윤정은 그의 기억도 전부 돌아왔으니 심상 세계에서 빠져나가자고 했다.
쿠구구궁-!
이윤정이 정신 감응을 해제하자 공간이 불안정해지며 마구 흔들렸다.
이거 괜찮은 거 맞냐며 불안해하는 서아린을 이윤정이 진정시키는 사이.
권하율이 슬쩍 다가와 정도현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솔직히 전 상관없어요.”
“……?”
“당신 옆에 남을 수만 있으면, 둘 다 골라 버려도 상관없다고요.”
권하율은 그렇게 말하곤 서아린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전했다.
“서아린 씨도 저랑 똑같나 보네요.”
“예?”
그 말을 끝으로 심상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무(無)로 돌아갔다.
* * *
“…….”
현실 세계의 정도현이 눈을 떴다.
심상 세계로 빨려 들어가면서 기절했었는지 푸른 하늘이 보였다.
서아린과 권하율 그리고 이윤정도 각자 몸을 일으켰다.
“……?”
일어나던 정도현은 위화감이 들었다.
몸의 감각이 늘어난 느낌이다.
머리 위를 만지자 딱딱한 뭔가가 잡혔다.
‘뿔?’
얼굴은 물론이고 전신의 피부가 용의 비늘로 촘촘히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어깨와 허리 뒤엔 날개와 꼬리까지 달렸다.
“이건…….”
용인으로 변한 남궁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남궁제가 죽기 전, 자신의 입속에 무언가 넣었던 걸.
‘그게 드래곤 하트겠지.’
드래곤 하트의 효능인지 온몸에서 마력이 흘러넘쳤다.
단순히 레벨을 올린 것 이상의 성장이었다.
천사들과 싸우기 전에 한층 강해진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평소처럼 기뻐할 순 없었다.
“…….”
드래곤 하트는 남궁제가 남기고 간 유산이었으니까.
살아서 같이 돌아가자고 약속했는데 결국 못 지켰다.
“꼭 복수해 줄게요, 영감님.”
정도현은 그렇게 중얼대곤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훔쳤다.
“오빠.”
“그래, 윤정아. 구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 어?”
이윤정이 어깰 두드리자 정도현은 고갤 돌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도 그 못지않게 바뀌어 있었다.
헤일로와 날개의 개수가 늘어났다.
눈동자에는 웬 마법진 비슷한 문양이 떠올라 있었고.
“너……. 그 모습은 뭐야?”
“아, 이거요? 메시아로 각성해서 그래요.”
“…메시아? 네가?”
“네. 그리고 오빠가 예언 속 암흑룡, 이클립스예요. 정확히는 이클립스의 드래곤 하트를 얻은 상태죠.”
내가 나쁜 놈이었다고?
정도현 본인만 몰랐었던 충격적인 진실에 그는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