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허억, 헉…….”
푹.
신성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에 칼을 박아 넣고 주저앉아 몸을 기댔다.
“…윽!”
지끈-!
힘겹게 일어난 신성한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누군가가 망치로 머릴 으깨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기억을 뜯어낸 부작용이다.
「시간 정지」를 하루에 세 번, 그것도 단시간에 연달아 쓰다니. 너무 무리했다.
‘괴물 같은 놈.’
정도현은 급소를 몇 군데나 찔리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곧 꺼질 불씨처럼 생명력이 줄어들었으니 저대로 놔둬도 곧 죽겠지만.
신성한은 옆으로 고갤 돌려 쓰러진 여인을 바라봤다.
“조예령, 괜찮아?”
“으, 아…….”
조예령은 힘겹게 입을 뗐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빠르게 죽어 가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방금 쓴 「시간 정지」의 대가로 바친 탓에 조예령과 보낸 어릴 적 추억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림 위에 검게 덧칠해, 원래 뭐가 그려져 있었는지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미안하다.”
어릴 적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이 사라지면서 감정도 흐려졌다.
조예령. 그의 소중한 친구이자, 어릴 적부터 짝사랑했던 여자.
가문에서 정해 둔 약혼자가 있어, 그는 끝내 자신의 마음조차 고백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소중한 여자가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데. 눈물을 흘리긴커녕 섬뜩하리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기억이라곤 성인식 시험을 함께 통과하고, 해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의 파티장에서 만나 소소히 대화를 주고받은 정도.
소꿉친구였단 것조차 이젠 떠올릴 수 없으니, 그에게 그녀는 공식 석상에서 대화 몇 번 해 본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신성한은 쓰러진 그녀 곁으로 다가가 기꺼이 제 무릎으로 머릴 받쳐 줬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괜, 찮아…….”
조예령은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네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해도 이해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널… 기억할게…….”
조예령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리 말하곤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결이 멎었다.
“…….”
신성한은 비척대며 일어섰다.
잠깐 쉰 덕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도 조금은 가셨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괴물.”
신성한이 그렇게 말하며 뒤돌았다.
거기엔 쓰러진 정도현을 부둥켜안은 노인이 있었다. 용인화를 사용한 남궁제였다.
정도현도 심각했지만, 남궁제의 몸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몸 곳곳에 칼자국과 화상을 입어서 몸이 너덜너덜했다. 방금까지 신성한과 싸워 댄 결과였다.
피는 멎었으나 다시 싸우면 상처가 터지리라.
“싸우다 말고 왜 내빼나 했더니. 소중한 여자였나?”
“오랜 친구다.”
“그런 것치곤 별로 슬퍼 보이지 않는구먼.”
남궁제는 정도현의 상처를 점혈로 봉합해 지혈했다.
신성한은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자세를 다잡았다.
마력을 끌어 올리자 끔찍한 두통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저 괴물 녀석들이 약해진 지금 끝장내 둬야만 했다.
그가 걸음을 떼려던 순간. 남궁제가 툭 내뱉었다.
“이 애, 내 아들일세.”
“…뭐?”
정도현이 남궁제의 아들이란 말에 신성한은 멈칫했다.
“내가 원해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내 아들이야.”
“목숨 구걸인가?”
“허허. 천하의 남궁제가 그런 구차한 짓거릴 할 것 같나?”
남궁제는 아들을 죽일 뻔한 원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용인의 살기와 기백에 신성한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남궁제는 눈을 감고 계속 말했다.
“내겐 자식들이 많았다네. 내 뒤를 이을 강한 후계자가 필요해서 욕심을 냈거든. 하지만 하나같이 나약했었네. 그러다 늘그막에 막내아들이 태어났지.”
자식 복이 없었던 남궁제는 여든을 넘겨 득남했다. 나이로 치면 아들이 아닌 손주뻘이었지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막내아들은 다른 자식들과 궤가 달랐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검술이든 무공이든 뭐든 가르치는 족족 습득했네. 오만하지 않고 성실하기까지 했지.”
그러니 그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내려 준 축복이라 생각했네. 그 애가 장성하면 안심하고 물러나도 되겠구나 싶었지.”
“뭐 어쩌란 거냐.”
“쯧. 성질이 이리 급해서야. 이제부터 본론이니 잘 듣게나. 내 막내아들이 죽어 버렸네. 내 욕심 때문에 말이야.”
갑작스러운 전개에 의문이 피어났다.
막내아들이 죽었다니. 왜?
남궁제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며 그날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유적형 던전을 공략하다 용인의 비약을 찾았네.”
그런데 비약은 한 병이 아니라 무려 수십 병이나 발견됐다.
남궁제는 그것들을 가문의 정예 기사들에게 아낌 없이 나눠 줬다.
그들이 강해지는 게 곧 가문의 힘을 키우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용의 힘을 얻는 건 꺼림칙했지만,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탓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유혹을 도저히 이겨 내지 못했다.
“당연히 막내아들한테도 비약을 나눠 줬었네. 그리고 비약과 함께 발견됐던 ‘드래곤 하트’란 영약까지도.”
“…드래곤 하트?”
삼키면 막대한 마력을 안겨 주는 영약, 드래곤 하트.
남궁제는 그걸 본인이 취하지 않고 막내아들에게 양보했다.
막내아들은 노쇠한 자신을 대신해 가문을 이끌어야 했으니까. 그게 화근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인간이 감히 손대선 안 될 물건이었어.”
드래곤 하트를 삼킨 막내아들은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했고, 결국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되었다.
결국 남궁제와 정예 기사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막내아들을 죽여야만 했다.
“유언은 다 지껄였나.”
얘기가 끝났다고 여긴 신성한이 검을 겨누자, 남궁제는 피식 웃으며 중얼댔다.
“인간이란 참 어리석지.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든.”
“……?”
“나랑 내기 하나 하지. 내 아들이 드래곤 하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난 할 수 있다는데 걸겠네.”
“……!”
남궁제는 막내아들을 죽이고 회수했던 걸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화아아악-!
그의 손에 들린 조그만 구슬. 거기서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다.
“바친… 큭!”
신성한은 곧장 「시간 정지」를 발동하려 했으나, 두통이 몰려와 잠시 휘청대고 말았다.
그 틈에 남궁제는 정도현의 입속에 드래곤 하트를 넣어 줬다.
“실패해도 이 못난 애비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 다오. 어차피 살길은 이것뿐이니까.”
“…바친다!”
신성한은 한발 늦게 「시간 정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수천 개의 바늘이 머릿속을 찌르고 긁는 듯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꾹 참고 달렸다.
성인이 되고서 조예령과 만나 대화했던 추억들까지 전부 소모했다.
그렇게 번 귀한 몇 초를 허투루 날릴 순 없었다. 그 일념 하나로 몸을 움직였다.
푹-!
신성한은 거슬리는 남궁제부터 처리했다. 목을 찌르고 옆으로 찢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그런 뒤 바닥에 쓰러진 정도현의 심장을 노렸다.
푹, 푸욱!
가슴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내장까지 전부 헤집었다.
드래곤 하트인지 뭔지를 흡수해 괴물로 변하기 전에 반드시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허억, 헉…….”
그에겐 이제 검강은커녕 검기를 쓸 기력도 없었다. 칼날엔 마력 한 줌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정도현도 다 죽어 가는 중에 시간이 멈춰서 「호신강기」를 일으키지 못했단 거다.
덕분에 두부처럼 뼈와 살이 썰렸다.
마력이 고갈된 신성한은 숨을 헐떡이며 무릎 꿇었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움직였다.
“해치, 웠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성한은 땀을 줄줄 쏟으며 정도현을 바라봤다.
미동조차 없었다. 난도질된 상처들도 재생될 기미가 안 보였다.
죽었다. 저건 절대 살 수 없다.
분명 그럴진대, 놈에게서 마력이 느껴진다.
분명 아까 삼킨 드래곤 하트일 거다.
그 강대한 마력은 목구멍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심장부에 안착했다.
두근.
신성한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놈의 맥박이 뛰었다.
“…괴물 새끼.”
신성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멈췄어야 할 정도현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아주 느릿하던 박동이 채찍질 당한 말처럼 점차 빨라졌다.
쩌적, 쩌저적.
정도현의 피부가 변화했다. 용인처럼 비늘이 돋는다. 시커먼 뿔과 날개도 한 쌍 자라났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휘감을 정도로 기다란 용의 꼬리까지.
툭.
정도현이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되살아났으나 신성한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력 고갈로 탈진해서만은 아니다.
움직이면 죽는다. 그의 본능이 그리 속삭였다.
“…….”
정도현은 제 옆에 썩은 나무통처럼 널브러진 노인, 남궁제를 발견했다.
목이 반쯤 잘려 피가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용인이라면 이깟 상처쯤 순식간에 재생할 텐데. 이상하게도 피가 멎지 않았다.
온몸의 혈액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크르르…….”
정도현이 짐승처럼 그르렁 댔다.
분노한 듯하면서도 구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그러다 고갤 홱 돌려 신성한을 쳐다봤다. 네가 죽였냐고 묻듯이.
“크워어어어!”
이성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포효에 땅이 갈라지고 대기가 요동쳤다.
신성한은 검을 들어 올렸다. 무의미한 발버둥임을 알면서도.
콰앙-!
흙먼지가 일며 정도현이 사라졌다. 동시에 신성한의 가슴팍에 통렬한 충격이 꽂혔다.
“커헉!?”
신성한이 피를 마구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일격에 결판이 났다.
설사 만전의 상태였어도 막아 낼 수 있었을지 의심되는 위력이었다.
쿠당탕!
신성한은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다 성벽에 쾅 처박혔다. 그대로 벽을 뚫고 성에서 추방당한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대자로 뻗었다.
“가, 가주님!”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와 수호자들이 그를 알아보곤 얼어붙었다.
우두머리가 당했으니 조직의 결속력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수순.
“적장이 쓰러졌다!”
“싸워라!”
수적 열세에 밀리던 류씨 일가는 사기가 올랐다. 분명 정도현이 해치웠으리라.
방금까지 몰아붙였던 연합군은 수장의 패배에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후, 후퇴! 후퇴하라!”
신씨 일가의 수호자는 신성한을 업으며 퇴각 명령을 내렸다. 안 그래도 병사들은 이미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쫓아라!”
연합군이 등을 보이자 류중현이 선봉에 서며 반격을 개시했다.
병사들이 활을 쏘고 창을 마구 던져 댔다. 달아나느라 정신없던 연합군은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졌다.
류중현과 그의 병사들이 승리감에 취해 적군을 바짝 뒤쫓을 때.
등 뒤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 어? 저게 뭐야!?”
“히익! 괴, 괴물이다!”
류중현은 뭔 일인가 싶어 뒤돌아보곤 잠시 숨이 멎었다. 거기엔 용인이 날뛰고 있었다.
“크아아아!”
그가 괴성을 내지르며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날아갔다.
‘정도현?’
머리 위에 뜬 이름은 분명 정도현이었다. 그런데 왜 괴물처럼 변해서 우릴 공격한단 말인가?
정도현의 일방적인 폭력에 류중현과 병사들은 덜덜 떨었다.
“후, 후퇴해라!”
그들은 졸지에 연합군과 함께 도망쳤다. 연합군도 어리둥절해서 뒤돌아봤다 기겁하며 더 빨리 도망쳤다.
“크워어어어어!”
완전히 폭주한 정도현은 사냥감들을 쫓았다.
아니, 정확히는 수호자의 등에 업혀 도망치는 신성한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