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첫 전투에서 쓴맛을 본 연합군. 기세등등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령관 막사로 돌아온 조예령은 신경질을 팍팍 냈다.
“아니, 마법사는 그렇다 쳐도. 일반 병사들까지 상급 포션을 퍼마시더라니까?”
“그래. 나도 봤다.”
“그게 말이 돼? 개인당 두세 병씩만 나눠 줘도 수백 병은 족히 될 텐데.”
류씨 일가에 그만한 자금이 있을 리 없다. 설사 돈은 있어도 물건을 구하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테고.
“하계의 조직들한테서 끌어다 쓴 걸지도 모르지.”
“…하계의 조직?”
“그래. 교단은 이번 분기 제물을 올려 보내지 않았어. 거기에 남궁세가의 가주는 직접 올라왔고.”
“그럼 저 포션들…….”
교단과 5대 가문이 힘을 보태 준 거였단 말인가.
조예령은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었다.
하계와 연결된 탑은 류씨 일가의 영지 너머에 있으니까.
“성을 뚫지 못하면 하계에서 물자를 계속 올려 보내 준단 거잖아?”
“그렇겠지.”
“젠장! 저 졸렬한 자식들. 비겁하게 소모전으로 나오다니!”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전쟁의 기본이다.”
그녀가 평소처럼 길길이 날뛰자 신성한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익숙한 시선을 느낀 조예령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뭐, 좋은 방법 없어?”
“있긴 있지.”
“오, 역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뭐?”
성벽을 포위한 채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신성한이 그렇게 말하자 조예령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게 뭐야. 농담이지?”
“보름 뒤에 승천자 부대가 되살아난다.”
“아.”
정확히는 망가진 신체의 수리가 끝나는 거지만.
그 말에 조예령은 손뼉을 딱 쳤다.
그래, 성벽의 결계는 무적이 아니다.
그녀의 공격에 금이 갈라지고 휘청댔으니까. 다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수복되니 뚫지 못할 뿐.
하지만 승천자들이 반마력 입자포를 동시에 퍼부으면 고쳐지기 전에 와장창 깨질 거다.
“뭐야, 그럼 우린 공격할 필요도 없었네!”
“아니. 우리 선에서 전쟁이 안 끝나면 위에서 책임을 묻겠지.”
“아… 그러네.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하계 세력들이 합심해서 작정하고 등을 받쳐 주는데 우리끼리 어떻게 뚫어?”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혼자선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버겁다.
그래서 그들은 똘똘 뭉친다.
그럼 정말 같은 종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끈질겨진다.
천사들이 왜 하계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시민 등급으로 차별했겠는가.
그들이 하나로 단결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천사들은 약 백여 년 전 인류와 처음 접촉하고 인류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이십여 년간 뒷공작을 벌여, 최초의 플레이어들과 인간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천사가 아니라 악마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서로 시기하며 분열하다 끝내 정복당했다.
“위에서 우리 사정을 헤아려 줄 거 같나?”
“아, 제기랄. 짜증 나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네. 우리가 무능하다며 벌을 주겠지.”
“그리고 승천자들이 개입하면 나도 죽을 기회를 잃는다.”
멈칫.
그 말에 찻잔을 쥐려던 조예령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녀의 노골적인 반응에 신성한은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 난 그 전에 승부를 볼 거다.”
“…그렇게까지 죽고 싶어?”
조예령은 서글프고 서운하단 목소리로 되물었다.
“뿌리가 썩으면 나무도 말라 죽는 법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
이십 년이 넘도록 그는 절망하고 후회했다.
아들과 딸에게 못 할 짓을 시켰다.
사랑했던 여자도 지키지 못했다.
아까도 말했듯 사람은 혼자일 때 나약하다. 몸이 아닌 마음에 병이 들면 자력으로는 이겨 낼 수도 없을 만큼.
곁에 지탱해 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버텼을지도 모른다만.
“너무 늦었다.”
그러니 날 막지 말아 줘. 신성한의 부탁에 조예령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만약 방해하면 어쩔 거야?”
“그럼 평생 널 원망하며 살아가겠지.”
“너무해…….”
조예령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여도 신성한은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원래 그런 남자였다.
자신이 정한 일은 묵묵히 수행한다. 설사 그게 가시밭길이라도.
“넌 아버지로서 완전 실격이야.”
“…….”
“아들이랑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 가면 네 아내가 퍽이나 좋아하겠네. 챙겨 주진 못할망정.”
조예령이 신랄한 말투로 비꼬았지만 신성한은 묵묵부답이었다.
본인도 아는 거겠지. 자신의 선택이 비합리적이란 것쯤은.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이미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꼈는데.
“30분 뒤에 다시 성문을 공격한다. 이번엔 나도 나서지.”
“뭐? 하지만…….”
결계는 처음보다 훨씬 두터워졌다. 그가 합세한들 부술 수 있을 리 없다.
“개인 특성을 쓸 거다.”
“……!”
가족한테조차 숨겼고, 오직 조예령만 알고 있는 그의 비밀.
개인 특성을 쓰겠단 말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 그걸 쓰면…….”
“괜찮아. 어차피 난 곧 죽어. 그러니 대가를 걱정할 필욘 없어.”
그의 개인 특성은 강력하나 그만큼 바쳐야 할 대가도 컸다.
그것은 그의 기억.
더 정확히는 그가 행복하게 여겼던 추억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기억을 많이 바칠수록 개인 특성의 유지 시간도 길어진다.
반대로 적거나 사소한 추억이면 유지 시간 역시 극도로 짧아졌다.
“시간 되면 나와라.”
신성한이 허리에 검을 차고 일어섰다.
조예령은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 * *
“적들이 달아나는 모습 보셨습니까?”
“이대로면 한 달도 너끈히 버틸 겁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에 취한 경비대장과 병사들. 그들은 정도현을 마치 신처럼 우러러봤다.
류중현도 두 일가의 연합군을 무찌른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좋았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정도현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표정이 밝진 않았다.
그러자 눈치 없이 떠들던 수하들에게 류중현이 주의를 주곤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 도현 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으신지…….”
“신성한이 나서지 않았어.”
“예? 아, 그러고 보니 조예령만 달려들었지요.”
흥분이 가라앉자 의아함이 몰려왔다.
왜 조예령 혼자 결계를 공격했을까.
둘이서 함께 밀어붙이는 편이 훨씬 쉬웠을 텐데.
“신호영, 뭐 짚이는 거 없냐?”
“글쎄. 수상한 낌새를 느낀 걸지도.”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싸움에 항전하는 적들을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겠는가.
저놈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그렇게 여길 터.
“조예령을 미끼로 던지고 뒤에서 지켜봤다? 조예령 입장에선 불쾌할 텐데? 가주끼리도 서열이 있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두 분은 소꿉친구니까. 그만큼 아버지를 신뢰하고 있는 거겠지.”
“뭐, 저들이 방심하지 않아서 큰 피해는 못 준 게 아쉽지만. 그래도 저희가 이겼지 않습니까?”
류중현이 칙칙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좋게 말했으나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이겼다고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라고.
“안심하긴 일러. 신성한이 개입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예? 아무리 가주라도 저 결계를 단숨에 없애진 못할 텐데요?”
정도현은 마력 포션만 나눠 주지 않았다.
보호 결계의 마법진을 보완할 최상급 마정석도 수십 개나 뿌렸다.
그 덕에 마법진에 담을 수 있는 최대 마력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처음엔 적군을 방심시키고자 마력을 덜 충전해 뒀지만, 중간부턴 최대치까지 마력을 채웠다.
조예령도 한층 견고해진 결계에 질려서 줄행랑쳤지 않은가.
플레이어 한 명 끼어든다고 전황이 뒤집히진 않으리라.
“말이 안 됩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럼 너희가 세 명한테 털린 건 말이 되고?”
“그, 그건…….”
“똑똑히 알아 둬라, 애송아. 세상에 ‘절대’란 건 없단다.”
요 며칠 푹 쉬면서 몸을 얼추 회복한 남궁제가 류중현을 꾸짖었다.
전투든 전쟁이든 방심과 자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적이라면서.
그렇게 말한 남궁제는 고갤 돌려 신호영을 쳐다봤다.
“자네 아버지 말인데, 뭐 특별한 능력 없는가?”
“특별한 능력이라면…….”
“개인 특성 말이네.”
그 말에 정도현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버티는 것도 힘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건 전부 자네의 개인 특성 덕이었네.”
“그러니 저쪽에서 반격할 수단이 있다면 개인 특성이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신호영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중얼댔다.
“설마…….”
“미심쩍긴 한가 보네?”
“…확실치는 않지만, 죄를 지은 날 심문할 때 이런 소릴 하셨다.”
지하 창고에 어찌 침입했는지는 자세히 묻지 않겠다고. 네게도 말 못 할 비밀이 있겠지.
그땐 별 뜻 아니라 받아들였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아버지의 말투와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제 자식한테까지 개인 특성을 숨겼다. 뭐, 그런 뜻인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도 여동생 외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아버지도…….”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면 알겠지.”
개인 특성 같은 뾰족한 수가 없으면 성을 포위한 채 대책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끌 거고, 뭔가 있으면 금방 재정비해서 달려들겠지.
데엥, 뎅-!
말이 씨가 된다더니. 성벽과 망루에서 시끄럽게 종소리를 울려 댔다.
병사들도 부리나케 달려와 바깥 상황을 보고했다.
“적들이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 신성한이 조예령과 같이 선두에 섰습니다.”
“공성 병기도 배치됐습니다!”
아깐 그저 인사치레였다고 말하듯 연합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운반과 설치에 시간이 걸리는 공성 병기들도 마침 가동 준비가 끝났다.
“공성 병기까지 다 배치했다고?”
“마정석의 마력이 다하면 공성 병기도 멈추지 않습니까?”
“이번 공격으로 끝장을 보겠단 건가.”
정도현은 상대의 의도가 짐작 가질 않아서 찜찜했다.
신성한은 왜 저리 서두르는 걸까.
윗선에서 빨리 끝내라 압박이라도 가했나?
하지만 이번 공격마저 막히면 저들도 더는 방도가 없을 텐데.
“역시 개인 특성이 있어.”
“뭐?”
“서두르는 게 아니야. 자기가 나서면 뚫을 수 있단 자신감이지.”
“허, 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다들 불안함을 느끼자 정도현은 병사들에게 나눠 준 매직 스크롤을 써도 좋다고 했다.
“저쪽이 올인했으니 우리도 받아 줘야지.”
그는 일반병들에게 중급 매직 스크롤을 수십 장씩 나눠 줬다.
그러니 그들은 잠시나마 마법사가 되는 셈.
물론 중급 마법으론 가주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다. 정통으로 맞춘들 잠시 발목을 붙잡는 정도겠지.
그걸 알면서도 병사들에게 매직 스크롤을 나눠 준 그의 진짜 목적은 가주가 아니라 공성용 병기를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수백 명이 동시에 주문을 날린다면 공성용 병기의 화력전에서도 밀리지 않을 테니까.
* * *
연합군이 비장한 얼굴로 신성한과 조예령을 뒤따랐다.
그들 뒤엔 집채만 한 공성용 병기들도 천천히 움직인다.
마정석을 원료 삼아 마력탄을 발포하는 대포들. 그것의 위력은 작은 산조차 단숨에 평지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그런 걸 수십 대나 끌고 왔다.
“모두 대기.”
“……?”
성문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신성한이 오른손을 들더니 정지하라 명했다.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턴 나와 조예령 둘이서 간다. 너흰 여기서 대기해라.”
“예?”
“조예령이 신호를 줄 거다. 그럼 성벽을 향해 일제히 포격해라.”
그의 뜬금없는 지시에 다들 이해가 안 돼서 술렁댔다. 그러자 조예령이 도끼를 번쩍 들더니 땅바닥에 꽂았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갈라졌다.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곤 잡담을 멈췄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의문 갖지 말고. 내가 쏘라고 외치면 너흰 쏘면 돼. 혹시 이해 못 한 머저리 있나?”
““없습니다!””
그녀는 도끼를 뽑아낸 뒤, 신성한과 함께 성문으로 달려갔다.
가주들의 무모한 돌진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당황했는지, 활을 겨눈 채 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에 신성한과 조예령은 성벽 앞에 도달했다.
“바친다.”
신성한은 칼을 천천히 뽑으며 시스템과 거래했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게 한없이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멎었다.
「시간 정지」. 그게 신성한의 개인 특성이었다.